들뢰즈의 《시네마》 연작은 영화/영화사 연구가 아니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가 아니다. 이 연구는 분류학(taxonomie), 즉 이미지들과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다.”(《시네마1: 운동-이미지》, 1983, 원서 7쪽)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시네마》 연작은 사실 ‘영화’를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 영화는 소재일 뿐, 실제 다루려고 하는 건 서양 철학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인 주객(subject-object)의 문제, 마음의 본성, 이미지의 본질, 뇌, 이런 것들이다. 영화는 이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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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화학적 연구 방식

들뢰즈는 분류의 달인이다. 거의 모든 책을 분류로 이끌어간다. 그의 분류는 사후적이다. 즉, 이미 분류를 끝내놓고 나서 그 분류를 출발점으로 삼는 서술을 보여준다. 아래에 몇 개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명시적으로 도식이 등장하는 예일 뿐, 사실상 모든 저술에서 분류 표를 만들자면 만들 수 있다. 《니체와 철학》(1962) 《베르그손주의》(1966)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1968) 《안티 오이디푸스》(1972), 과타리와 공저 《시네마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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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

들뢰즈의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6장은 ‘Les puissances du faux’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The powers of the false’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거짓의 역량’으로 옮겼고, 이 때문인지 국내의 연구자는 모두 ‘거짓의 역량’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역자 이정하 선배께 미안하게도). 일단 이 표현이 니체의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하자. 들뢰즈는 이 점을 명시한다. 그렇다면 니체한테 the fal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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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30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들 이제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병렬을 소묘하는 것만으로는 그 둘의 관계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몇 가지를 분명히 하려 합니다. 첫째, “기술 기계들은 분명 고장 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기능한다. 그것들 고유의 극한은 마모이지 고장이 아니다.” 맑스는 기계가 닳은 만큼 가치가 생산물로 이동했다는 얘기를 하죠. 이와는 달리, “욕망 기계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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