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화학적 연구 방식

들뢰즈는 분류의 달인이다. 거의 모든 책을 분류로 이끌어간다. 그의 분류는 사후적이다. 즉, 이미 분류를 끝내놓고 나서 그 분류를 출발점으로 삼는 서술을 보여준다. 아래에 몇 개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명시적으로 도식이 등장하는 예일 뿐, 사실상 모든 저술에서 분류 표를 만들자면 만들 수 있다.

《니체와 철학》(1962)

《베르그손주의》(1966)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1968)

《안티 오이디푸스》(1972), 과타리와 공저

《시네마1: 운동-이미지》(1983)

분류는 왜 하는 걸까? 들뢰즈에게 분류는 본성의 차이가 나는 것들을 구별하는 절차다. 주제가 되는 대상이 있다고 치자. 가령 그게 이미지다. 이미지에는 여러 본성이 있다.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여러 본성이 섞인 잡탕(복합물, 혼합물)이다. 학술적으로 잡탕을 그냥 다루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특성에 따라 이런저런 분류를 시도해 본 후, 대상에 적합한 최종 분류에 도달한다. 그후에 그 분류에 입각해서, 즉 서로 다른 본성들에 입각해서, 학술 작업에 돌입한다.

가령 여러 특성이 있는 물질 세계가 있다 치자. 이를 다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그것들의 분자식을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특성 있는 물질들이 분류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서로 다른 원자들을 찾아내고 구별하고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주기율표가 마련되어야 한다. 특성 있는 물질에 대한 학문인 화학은, 주기율표에 따라 원자를 알아내고, 원자들의 결합인 분자식을 찾고, 그것들의 화학 반응을 이해하는 절차를 따른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화학을 닮았다. 현상을 본질에 따라 분류하고, 복합물을 구성하는 과정을 밝히는 것. 물론 모든 철학자는 분류를 시도한다. 어찌 보면 ‘개념’이라는 원자를 찾아내어 작업 대상을 분류하는 일이 철학의 본령이기도 하다. 고대 밀레토스 학파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헬레니즘 철학이 그런 일을 했고, 중세 스콜라철학, 나아가 근대 철학도 이 일을 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에 가장 능할까?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각자 다룬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제가 일치한다면, 누가 분류를 가장 잘 했는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공부할 때는 이런 훈련이 재미있고 유용하다. 구체적 사례와 추상적 분석이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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