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30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의 체제의 차이들

이제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병렬을 소묘하는 것만으로는 그 둘의 관계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몇 가지를 분명히 하려 합니다. 첫째, “기술 기계들은 분명 고장 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기능한다. 그것들 고유의 극한은 마모이지 고장이 아니다.” 맑스는 기계가 닳은 만큼 가치가 생산물로 이동했다는 얘기를 하죠. 이와는 달리, “욕망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 나며,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 언제나 생산하기는 생산물에 접붙으며, 기계의 부품들은 연료이기도 하다.” 기술 기계의 관점에서 봤을 때만 고장이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생산의 경과의 두 번째 국면인 등록의 생산이 일어날 때, 기관 없는 몸, 즉, 경과의 순간적인 멈춤은 고장이라고 할 수 있죠. 또는 죽음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산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것도 작동의 일부에요. 안타까운 사례로 며칠 전 일본에서 화산이 분출했는데, 인간적 관점에서 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연과 우주의 운행의 관점에서는 기능의 일부예요. 이런 의미의 고장이지, 작동이 멈췄다는 뜻은 아니에요. 계속 삐걱거리면서도 계속 가요.

그걸 잘 보여주는 예술 작품들이 있습니다. 들뢰즈·과타리가 열거하는 예들을 검색해보세요. 가령 자동차를 막 구겨서 압축해요. 그러면 자동차 고장이죠? 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과 연결되면서 뭔가 느낌을 낳지요? 그래서 그것도 작동의 일부예요. 고장이 작동의 일부를 이루는 게 욕망 기계입니다. 그게 욕망 기계가 기술 기계와 차별되는 가장 중요한 측면입니다. 욕망 기계의 작동을 우리 현실 활동에서 대표하고 있는 게 예술입니다. 예술가들은 항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들뢰즈·과타리가 드는 다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원서 464쪽과 465쪽 사이에 만 레이의 <무용가/위험(불가능성)>(1970년)이라는 작품 그림이 있습니다. 제목은 ‘Dancer/Danger’인데, 그림을 보면 대문자로 이 두 단어가 C와 G에서 겹칩니다. 이 그림을 보면 톱니바퀴들은 기능하지 못합니다. 무용가의 운동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대한 비유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결국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부품을 이루”(464쪽)면서 이 작품은 작동합니다. 작품은 내적으로 완결되는 게 아닙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인간과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기능하는 것이지요. 욕망 기계의 작동도 이와 같은 식이라는 것이 들뢰즈과타리의 입장입니다. “욕망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일부를 이룬다. […] 더구나 예술 작품은 그 자신이 욕망 기계이다.”

다음에 욕망 기계들과 기술 기계들의 두 번째 차이가 다음 문단에 언급됩니. “욕망 기계들이 반생산을 생산하는 것은 자신들 자체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운동의 일부로서, 생산의 경과의 일부로서 반생산을 포함하고 있죠. 즉, 기관 없는 몸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죠. 그에 반해 “기술 기계들에게 고유한 반생산은 경과의 재생산의 외래적 조건들 속에서 생산될 뿐이다(이 조건들이 <나중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즉, 기술 기계 외부로부터 생산된다는 것이죠. 기술 기계들의 고유한 반생산은 언제나 사회 기계와 결부되어 있어요. 시계가 예가 될 수 있습니다(원서 165쪽). 시계는 기술 기계죠.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 기능하냐에 따라, 어떤 사회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합니다.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열차 시간, 출근 시간, 회의 시간 같은 것들은 사람을 통제하죠? 그래서 기술 기계는 독자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항상 사회 기계 속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술 기계는 원인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형식의 지표일 따름이다.” 욕망 기계들은 기술 기계, 사회 기계를 다 관통합니다. 욕망 기계가 제일 근저에 있고, 사회 기계가 그 위쪽에 있고, 기술 기계가 더 위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층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단 마지막 부분입니다. “욕망적 생산은 본원적 억압의 장소인 반면 사회적 생산은 탄압의 장소이며, 또한 후자로부터 전자로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과 유사한 뭔가가 실행된다.” 앞서 설명했듯,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은 본원적 억압과 구별됩니다. 본원적 억압은 존재론적인 거였죠. 그에 반해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은 심리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뭔가 나오지 못하게 누르는 거죠. 심적 수준에서의 무의식을 들여다봤을 때, 안에 있는 게 겉으로 의식화되지 못하도록 누르는 작용이 고유한 의미의 2차적 억압입니다. 사회적 생산은 ‘사회적’ 탄압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전쟁의 상처, 세월호의 상처, 이태원의 상처,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든 더 이상 생각하기 싫도록 만드는, 의식 층위로 떠올리기 싫게 만드는 거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 자체를 아예 눌러버리는 식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죽음 본능’의 역할도 바뀝니다. 욕망적 생산에서 죽음 본능은 새로운 작동의 출발점인 데 반해, 사회적 생산에서 죽음 본능은 탄압을 거쳐 무의식적 심리적 억압을 낳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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