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은 긍정이다 : 비판의 본질을 묻는다

‘비판’의 본질이 무엇인지 검토해야 할 때다. 한국의 담론 생산자, 이른바 지식인에게 ‘비판’의 의미가 많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한국의 식자층이 유독 심하게 삐딱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이 또한 ‘비판’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사대주의 혹은 노예근성 탓이라고 진단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인문학의 환골탈태를 주장했으며, 《뉴노멀의 철학》(20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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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의 사상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가 죽은 지 100년도 훨씬 넘게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새롭고 낯설다. 그는 마치 갓 쓰인 것처럼 읽힌다. 또는 읽히지 못한다. 니체가 읽히지 못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이 그가 제기한 물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음의 중심에 니힐리즘(Nihilismus)이 있다. 흔히 신의 죽음이 니힐리즘을 가져왔다고 한다. 마치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신을 죽이기라도 했던 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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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훈 교수의 반론에 보태] 가짜의 역량이다

“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이라는 글에 정대훈 교수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탰다. 토론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가짜’도 좋은 번역어지만 ‘거짓’도 원의에 충실한 면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가짜’든 ‘거짓’이든 존재론적이면서도 인식론적인 준거점인 ‘진짜’ 혹은 ‘참/진실’을 상정한 채 하위의 혹은 가치 없는 것을 나타내지만, 니체와 들뢰즈는 ‘가짜’ 혹은 ‘거짓’이 더이상 이러한 위계질서에 종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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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니체, ‘거짓의 역량’? 아니, ‘가짜의 역량’

들뢰즈의 《시네마2. 시간-이미지》의 6장은 ‘Les puissances du faux’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The powers of the false’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거짓의 역량’으로 옮겼고, 이 때문인지 국내의 연구자는 모두 ‘거짓의 역량’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역자 이정하 선배께 미안하게도). 일단 이 표현이 니체의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하자. 들뢰즈는 이 점을 명시한다. 그렇다면 니체한테 the fal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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