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한국어 판본을 읽기 어려운 이유 (4)

1편, 2편, 3편에 이은 글입니다.

A quel point les visages se déforment dans un tel miroir. Et il n’est pas sûr que ce soit seulement le sommeil de la Raison qui engendre les monstres. C’est aussi la veille, l’insomnie de la pensée, car la pensée est ce moment où la détermination se fait une, à force de soutenir un rapport unilatéral et précis avec l’indéterminé.

이 지점에서 얼굴들은 이런 특이한 거울 안에서 이지러진다. 그리고 오로지 이성의 잠만이 괴물을 낳는다는 것은 확실치 않다. 괴물을 낳는 것은 또한 사유의 깨어 있음, 불면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유는 규정이 단일한 하나가 되는 국면을 말하기 때문이다. 규정은 미규정자에 대해 어떤 일방향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함에 따라 단일한 규정이 된다.

이런 거울에서 얼굴들은 얼마나 일그러지는가.‘ 문장에서 ‘일그러진다’는 표현은 프랑스어로 se déformer이다. 즉, 형상/형태(forme)를 상실한다(dé-)는 뜻이다. 원래의 형태가 왜곡된다는 뜻. ‘괴물들을 낳는 것은 이성의 잠뿐이라는 점은 확실치 않다.‘ 고야의 그림 제목이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생각의 밤샘, 생각의 불면도 괴물들을 낳는다. 생각이란 미규정과 일방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규정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저 계기이기 때문이다.‘ 원문에 ‘생각의 밤샘’은 그냥 ‘밤샘’일 수도 있는데, 어차피 밤새면 생각이 둔해지기 때문에, 괴물을 낳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에 큰 차이는 없다.

‘규정이 하나가 된다’는 문장에서 la가 une이 된다고 되어 있는데, 하나가 된다는 건 여러 가능한 규정이 하나로 모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잠을 못 자면 생각은 규정을 행하지 못한다. 여기에 생각 혹은 사고가 하는 일이 언급되는데, 그건 ‘미규정과 일방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 표현에는 앞에 언급된 문장에 등장한 두 표현이 결합되어 있다. ‘차이는 (…) 현전과 정확함이라는 유일한 계기에만 있’다는 문장의 ‘정확함’과 ‘차이는 일방적 구별과도 같은 규정하기의 저 상태’라는 문장의 ‘일방적’이 그것이다. 즉 ‘일방적이고 정확한 관계’는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하기/규정짓기’에 의해 맺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생각이 하는 일이다. 차이는 홀로 있지 않다. 차이는 생각에 의해 발생하고 만들어진다. 생각은 또한 규정하기 혹은 규정짓기이다.

La pensée « fait » la différence, mais la différence, c’est le monstre. On ne doit pas s’étonner que la différence paraisse maudite, qu’elle soit la faute ou le péché, la figure du Mal promise à l’expiation. Il n’y a pas d’autre péché que celui de faire monter le fond et de dissoudre la forme.

사유는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괴물이다. 차이가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그것이 오류나 죄이며 속죄가 필요한 악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차이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탕을 올라오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킨다는 죄밖에 없다.

생각은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괴물이다.‘ 앞에서 괴물을 낳는 더 나은 방법은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생각은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인다’. ‘차이가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 차이가 과오 혹은 죄, 앞으로 속죄해야 할 의 형상(figure)이라는 점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여기 묘사된 바에 따르면 차이는 ‘원죄’와도 비슷하다.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이는 것 말고 다른 죄란 없다.‘ 모든 기성 질서를 흩어버리다니, 이게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인가. 차이야말로 존재론적 죄짓기다.

Qu’on se rappelle l’idée d’Artaud: la cruauté, c’est seulement LA détermination, ce point précis où le déterminé entretient son rapport essentiel avec l’indéterminé, cette ligne rigoureuse abstraite qui s’alimente au clair-obscur.

아르토의 생각을 떠올려보라. 잔혹성, 그것은 단지 본래적 규정일 뿐이다. 그것은 규정되는 것이 미규정자와 본질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이 정확한 지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규정되는 것이 명석-애매를 자양분으로 삼는 이 엄밀한 추상적인 선과 관계하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아르토의 아이디어를 상기해 보자. [아르토에게] 잔혹은 본래적 규정하기이며, 규정된 것이 미규정과 본질적 관계를 유지하는 저 정확한 지점이며, 명암법에서 양분을 얻는 저 엄격한 추상적인 선이다.‘ ‘본래적 규정하기’는 LA détermination이다. 이어 ‘미규정과 본질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앞에서 ‘생각이란 미규정과 일방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규정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저 계기’라고 했음을 떠올릴 때, 생각과 아르토의 잔혹은 같은 것이다. 또한 르동의 ‘명암법’이 다시 등장하면서, 생각은 바닥을 올라오게 하는 추상적인 선의 작용이라고 설명한다. 한글본이 ‘명석-애매를 자양분으로 삼는’다고 옮긴 것은 코미디다. 앞에서는 그래도 ‘명암’이라고 옮기는 성의는 보여줬지 않은가. 그런데 한 문단 안에서 해명도 없어 번역어가 바뀌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pensée를 일관되게 ‘사유’라고 옮기는 것 역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문(책의 한 챕터)을 쓴 게 있으니, 나중에 소개하겠다.

지금까지 옮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거울에서 얼굴들은 얼마나 일그러지는가. 괴물들을 낳는 것은 이성의 잠뿐이라는 점은 확실치 않다. 생각의 밤샘, 생각의 불면도 괴물들을 낳는다. 생각이란 미규정과 일방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규정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저 계기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차이를 만든다. 하지만 차이는 괴물이다. 차이가 저주받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 차이가 과오 혹은 죄, 앞으로 속죄해야 할 악의 형상(figure)이라는 점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이는 것 말고 다른 죄란 없다. 아르토의 아이디어를 상기해 보자. [아르토에게] 잔혹은 본래적 규정하기이며, 규정된 것이 미규정과 본질적 관계를 유지하는 저 정확한 지점이며, 명암법에서 양분을 얻는 저 엄격한 추상적인 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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