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은 긍정이다 : 비판의 본질을 묻는다

‘비판’의 본질이 무엇인지 검토해야 할 때다. 한국의 담론 생산자, 이른바 지식인에게 ‘비판’의 의미가 많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한국의 식자층이 유독 심하게 삐딱한 건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이 또한 ‘비판’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사대주의 혹은 노예근성 탓이라고 진단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인문학의 환골탈태를 주장했으며, 《뉴노멀의 철학》(20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현에서 정점에 이른 ‘현실에 대한 인문학의 초연함’은 식민 통치와 독재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인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은 현재에 대한 저항을 기본으로 삼는 활동이다. 현재를 넘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이 활동들을 관통한다. 저항이란 현재를 부정하는 의지가 아니라 미래를 긍정하는 의지다. 김현의 담론에는 이런 인식이 부재하며,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에서 한 걸음도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또한 이런 테제는 비판의 핵심이 ‘부정’에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뿌리내리게 했다. 비판의 본질은 건설에 있으며, 니체의 말처럼 망치의 사명은 부수고 나아가 만든다는 데 있다.”(188쪽)

니체가 말년인 1888년에 발표한 얇은 책 《우상의 황혼》의 부제는 “망치로 철학하는 법”이다. 대부분 해석자는 ‘망치로 철학한다’는 표현을 ‘깨고 부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니체와는 아무 상관 없다. 니체가 ‘파괴’를 찬양한 건 사실이다. 이 점은 그냥 사실에 불과한 정도가 아니라 니체 사상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었다면 니체가 특별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가령 많이 회자되고 있는 신영복의 서화(X 표시는 내가 덧붙인 것임) 하나를 보자. 그는 여기에서 말한다. “공부는 망치로 합니다.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는 망치의 용도를 깨뜨리는 데 한정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틀렸다. 내가 ‘일면적’이라고 하지 않고 ‘틀렸다’고 말한 건, 망치의 더 중요한 용도를 언급하지 않은 채 파괴에 주목하며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건설’의 도구로서 ‘망치’를 내세웠다. ‘권력의지’ 개념을 설명한 유명한 구절에서도 “창조적 충동”을 언급한다(1885년 6-7월 단편, 36 [31]). 망치는 예술가가 대리석을 조형해서 상을 끄집어낼 때 사용하는 도구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이를 잘 예시한다고 본다. 가령 ‘아틀라스라고 알려진 노예’라는 작품(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직접 찍은 사진임)은 ‘조각’ 자체를 조각한 작품이다. 즉, 원재료인 대리석의 물성에서부터 작가가 보고 뽑아내려 한 이미지까지를 한 작품에 담고 있다.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 할 만한다. 이렇게 본 것을 뽑아내는 도구가 바로 망치다.

Michelangelo, Schiavo detto Atlant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다음 구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인식할 때도 나는 생식하고 생성하는 내 의지의 쾌를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인식에 결백함이 있다면, 이는 그 안에 생식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의지가 나를 꼬셔서 신과 신들한테서 멀어졌다. 만약 신들이 있다면, 창조할 게 도대체 뭐가 있겠니?

하지만 내 열렬한 창조의 의지는 늘 새롭게 나를 인간에게 몰아친다. 그렇게 망치를 돌로 몰아친다.

아, 너희 인간들아. 하나의 이미지가, 내 여러 이미지 중의 이미지가 돌 속에서 잠자고 있다! 아, 그게 가장 단단하고 가장 흉한 돌 속에서 잠자야 한다니!

지금 내 망치가 그 이미지를 가둔 감옥을 잔혹하게 두들겨 팬다. 돌에서 파편들이 뿌옇게 날린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2부 ‘지복의 섬에서’)

깨고 부수는 건 시작에 불과하고, 건설하고 정립해야 한다. 건설과 정립이 본질이고, 파괴는 파생적 현상이다. 부정에 그치면 비판은 좌초한다. 니체의 철학이 ‘긍정’인 것은 예술가의 궁극적 작업이 ‘긍정’을 지향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한 번 더 니체에게 의지해 말하자면, 비판이란 미래를 창조하는 실천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또 다른 한 구절에는 이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창작과 노력을 가르쳤다. 인간한테 파편이고 수수께끼고 무서운 우연인 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결집하라고.

창작자, 수수께끼 푸는 자, 우연의 구원자로서 나는 미래에서 창조하라고, 일어난 모든 일을 창조하며 구원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인간의 지나간 일을 구원하고 모든 “일어난 일”을 개작해서, 마침내 의지가 “하지만 나는 이러길 욕망했다! 이러길 욕망할 거다!”라고 말하라고.

나는 그들에게 이걸 구원이라고 했고, 이것만을 구원이라고 부르라고 그들에게 가르쳤다.” (2부, ‘낡은 목록들과 새 목록들’. 니체의 강조.)

과거, 즉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은 “파편이고 수수께끼고 무서운 우연”이다. 관행적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힘든 부정의 대상이다. 지적하고 비난하고 뒤집고 싶은 것.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지점에서 많은 담론 생산자는 멈추고 만다. 현 상태에서 출발해서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은 과거, 즉 현 상태뿐이다. 니체는 그것을 “하나로 압축하고 결집”해서, 즉 재료와 출발점으로 삼아서, “개작”하라고 조언한다. 현 상태는 미래의 창조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창조 없는 비판은 공허할 뿐 아니라 무력하고 해롭다.

한국의 담론 생산자는 망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부정’과 ‘지적’과 ‘비난’을 비판의 의미로 잘못 실천하고 있다. 공공재인 지면의 일부를 나눠 갖는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치 복 받을 예정인 가난한 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책임하고 비겁하다는 평을 면하려면, 식자층은 자기 전문 영역에서 구체적인 설계도를 내놓아야 한다. 혹 가장 많이 누리면서 가장 적게 기여하는 건 아닌가?

(나의 유튜브 채널 ‘철학은 “생각의 싸움”이다‘에 니체 강독 강의를 연재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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