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가 죽은 지 100년도 훨씬 넘게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새롭고 낯설다. 그는 마치 갓 쓰인 것처럼 읽힌다. 또는 읽히지 못한다. 니체가 읽히지 못하는 것은, 많은 독자들이 그가 제기한 물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음의 중심에 니힐리즘(Nihilismus)이 있다.
흔히 신의 죽음이 니힐리즘을 가져왔다고 한다. 마치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이 신을 죽이기라도 했던 듯이. 하지만 말 한 마디로 죽을 신이 아니다. 오히려 신을 죽인 것은 우리들이다. 신을 만든 것이 우리이듯이. ‘신은 죽었다’는 말의 깊은 뜻이 거기에 있다.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신을 죽였다는 것, 애초에 우리가 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니힐리즘은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다. 니힐리즘은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그 말은 특히 최고의 가치와 의미의 상실을 가리킨다. 최고 가치로 여겨져 온 신이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하다니!
그런 인식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감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 허무감이 니힐리즘 자체로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니힐리즘의 인식은 우리가 가진 인식 권력의 증대를 나타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권력은 앎(Wissenschaft)을 통해 발휘되며, 순수하게 긍정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을 만들어 냈을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긍정은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을 명확히 아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현실 추수에 반대된다. 긍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대개 세상은 고통스럽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특히 시간 앞에서의 무력감은 한없다. ‘이미 일어난 일'(Es War ; it’s done)은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의지(Wille)는 그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이로써 원한감정과 복수심은 쌓여만 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
‘자신의 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無)를 의욕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발명된 것이 바로 최고 가치인 신이었던 것이다. 무를 향한 의지. 이 때 니힐리즘은 태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제 우리는 신을 만들어낸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신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실천적 창조 권력은 그만큼 크고 강하다. 우리는 무를 존재케 할 수조차 있다. 우리는 드디어 이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창조 권력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예술과 기술이다. 니체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달리 예술과 기술의 친연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창조하는 자, 증여하는 자로서의 삶의 방식이기에. 니체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미학적인 까닭이 그것이다. 그 미학은 근본적으로 삶을 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윤리이다. 그 윤리는 사회 속에서만 행해진다는 점에서 정치이다.
이 과정에서 산출되는 것이 고통의 반대인 기쁨이다. 커다란 기쁨은 고통마저도 긍정한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그럼 좋다, 다시 한 번!’ 기쁜 앎(la gaya scienza)은 이렇게 외칠 수 있게 해준다. 삶과 세계 속에서 기쁨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용감한 자들이면 누구나 니체를 가깝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니체의 의미.
니체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니체 자신의 책들이다. 《기쁜 앎》,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 계보학》, 《이 사람을 보라》 같은 책들을 첫 페이지부터 차례로 읽어 보라. 채 몇 줄 읽어가기 전에 번개에 맞은 것 같은 전율이 엄습할 것이다. 그 후 그 떨림 속에서 사는 삶은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2018.02.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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