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개방성의 딜레마?

보편적 언어란 없다. 자기가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구체어가 있을 뿐이다. 가령 내 경우라면, 한국어. 물론 한국어도 단일한 보편어가 아니다. 한국어는 지역, 연령, 성별, 계층, 학력, 국적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조합된 여러 언어의 집합이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저 요인들이 뒤얽혀 형성하는 집단마다 같은 한국어일지라도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정의(justice)’라는 말의 정의(definition)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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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유목‘ 대 ’국가‘, ’전쟁기계‘ 대 ’포획장치‘를 말한 이유

들뢰즈가 ‘유목’ 대 ‘국가‘’, ‘전쟁기계’ 대 ‘포획장치‘’를 말할 때, 가장 중심에는 공간의 문제가 있다. 나는 “매끈한 공간 대 홈 파인 공간 : 전쟁기계, 또는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 들뢰즈의 공간의 정치철학” (2018.12)에서 이 공간의 문제를 개략적으로 살핀 바 있다. 유목과 전쟁기계는 홈 파인 공간을 매끈한 공간으로 만드는 삶의 방식이자 운동인 데 반해, 반면 국가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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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관련한 푸념 한 마디

나는 프랑스 현대철학을 한국에 소개한 1세대에 속한다. 내가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를 번역 출판한 게 1996년 겨울이고(2021년 전면 개정판을 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천 개의 고원》은 2001년 초여름에 출간되었다. 그 사이 1998년 여름에는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라는 번역서를 통해 데리다, 레비나스, 리쾨르, 료타르 등의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고. 어쨌건 1980년대 후반부터 니체와 푸코를 통해 들뢰즈를 접했고, 대학을 졸업하던 1992년에는 니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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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를 위해’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를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를 위하는 일은 ‘가능’한 일일까? ~를 위하는 일이 ~에게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는 걸까? 그건 ~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힘을 얻고 힘을 행사하려는 은밀한 계책은 아닐까? 자신을 위하겠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위하더라도 안 될 수 있지만, 책임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니까. 그런데 타자(타인, 집단, 동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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