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관련한 푸념 한 마디

나는 프랑스 현대철학을 한국에 소개한 1세대에 속한다. 내가 들뢰즈의 《베르그손주의》를 번역 출판한 게 1996년 겨울이고(2021년 전면 개정판을 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천 개의 고원》은 2001년 초여름에 출간되었다. 그 사이 1998년 여름에는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라는 번역서를 통해 데리다, 레비나스, 리쾨르, 료타르 등의 사상을 소개하기도 했고. 어쨌건 1980년대 후반부터 니체와 푸코를 통해 들뢰즈를 접했고, 대학을 졸업하던 1992년에는 니체의 미학으로 학부졸업논문을 쓸 때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작업을 참조하기도 했다.

생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한동안 학술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다행히 2010년대 초반에 다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말하자면 200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초반에 내 업계와 관련해서 통용되었던 낯선 용어가 있었으니, 바로 ‘포스트주의’나 ‘포스트 담론’이 그것들이었다. 이 용어들이 내가 1990년대 초반에 공부했던 학자들의 사상을 뭉뚱그려 지칭한다는 것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도 통용되는 이 용어들을,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연원이야 어찌됐건 이 용어들은 1990년대 초반 맑스주의의 몰락과 함께 수입된 그에 대립되는 외래 사상을 총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고, 그 후로도 주로 비난의 내포와 함께 끈질기게 살아남은 용어가 되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면, 통상 그 용어들로 지칭되는 사상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 나로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누군가 악의가 없다면 그 ‘틀린’ 용어들을 계속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용어들이 유통된 데는 저 사상들을 수용하고 소개한 학자들의 탓도 클 것이다. 사실 소개하는 본인도 모르는 채로 소개하다 보니, 정작 사상의 쓸모는 수용되지 못하고 겉멋만 ‘아라모드’ 방식으로 유행된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할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이 사상들은 ‘패스’될 운명이었고, 또 언젠가 ‘재발굴’될 운명이기도 했다. 혹 나의 생각에 반박할 사람이 있으면, 포스트 어쩌구가 무엇인지 내게 잘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가장 열심히 ‘팠던’ 건 들뢰즈였다. 들뢰즈의 철학은 무척 어렵다. 들뢰즈가 무엇을 말했는지 잘 정리된 글은 안팎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나아가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그 어떤 프랑스 철학자와도 다르다. 누구와도 묶이기 어렵단 말이다(아마 유일한 예외가 과타리일 테지만, 그와는 이미 많은 일을 함께 했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요컨대 들뢰즈의 철학은 한국에서 1990년대는 물론 그 언제도 적절히 이해된 적이 없고, 따라서 검증되거나 극복된 적도 없다. 시간이 지나며 잊힌 것일 뿐, 그밖에 어떤 유의미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많은 사상가들이 그런 운명을 겪곤 한다. 따라서 특별히 비난할 것도, 호들갑을 떨 것도 없다. 단지 문제는, 지금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들뢰즈가 꼭 필요한데, 마치 철 지난 사상가로 이미 극복되었다고 간주되는 작금의 ‘꼴’이 별로 보기 좋지 않다는 점이다. 니체의 ‘초인’의 문제를 직감도 못하는 채 떠들어내든 ‘포스트휴먼’이나 ‘트랜스휴먼’ 운운하는 꼴도 보기 싫고, 들뢰즈와 과타리의 ‘파시즘’의 문제를 태곳적 일로 취급하는 담론 공해 생산자들도 꼴불견이고… 참기 어려운 일이 많아지는 걸 보니 많이 늙었나 보다.

무책임하게 싸질러놓은 푸념이지 않기 위해, 한 구절 소개하고 가겠다. ‘도주선’이라는 용어가 낯설다면, ‘도망갈 구멍’,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아래는 《천 개의 고원》에서의 인용이다.

도주선들 자체가 죽음과 제물의 냄새처럼, 사람을 파괴해버리는 전쟁 상태처럼 이상한 절망을 발산한다. 도주선들은 앞에서 살펴본 위험들과 혼동할 수 없는 고유한 위험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황혼녘에 탄창이 빈 소총을 손에 들고 표적들이 쓰러져 있는 버려진 사격장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나 자신의 숨소리 말고는 오로지 적막이었다. (……) 나의 자기 공양은 뭔가 습기와 어둠 같았다.” 도주선 자체가,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파괴한 후 우리 자신도 해체되고 파괴되어버릴 위험이 있는 전쟁인 것은 왜일까? 바로 이것이 네번째 위험이다. 즉, 도주선은 벽을 넘고 검은 구멍들로부터 빠져나와도 다른 선들과 연결되고 매번 원자가를 증가시키는 대신 파괴, 순수하고 단순한 소멸, 소멸의 열정으로 바뀐다. 클라이스트의 도주선, 그가 이끄는 불가사의한 전쟁, 그리고 자살, 도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바꾸는 출구로서의 이중의 자살이 그런 것처럼.

(2019.12.13. 마지막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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