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언어란 없다. 자기가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구체어가 있을 뿐이다. 가령 내 경우라면, 한국어.
물론 한국어도 단일한 보편어가 아니다. 한국어는 지역, 연령, 성별, 계층, 학력, 국적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조합된 여러 언어의 집합이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저 요인들이 뒤얽혀 형성하는 집단마다 같은 한국어일지라도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정의(justice)’라는 말의 정의(definition)는 집단마다 각양각색이다. 특정한 정의(definition)가 옳으냐 그르냐는 둘째로 하고, ‘합의’된 정의에 이를 수 없을 정도라는 점이 중요하다. 언어가 공유되어야 합의가 가능할 터이니.
공론장에서 열린 토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좀 있다. 무엇보다 토론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언어는 선험적이고 자연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토론에 참여할 땐 누구건 간에 자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자기 언어를 쓰려 할 것이다. 나라면 한국어를 공식어(lingua franca)로 삼자고 주장할 것이다. 하버마스라면 독일어, 샌더스라면 영어를 공식어로 삼겠다고 주장하겠지만.
벌써 드러나지만, 어떤 언어로 토론하느냐를 결정하는 문제부터가 벌써 얽혀 있는 권력관계를 드러낸다. 가위바위보나 사다리 타기로 정하지 않는 한(이렇게 해서 한국어로 결정되면 하버마스나 샌더스가 따를 리 없다), 어떤 토론이 시작된다는 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언어가 강제된다는 뜻이다. 참가자 모두가 조금이라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란 결국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언어일 테니까(가령 영어). 사정이 이렇다면, 언어보다 먼저 언어 구사자의 권력적 지위(어떤 언어에 능한 사람인가)에서부터 시비거리가 생기는 셈이다.
물론 공론장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원칙 차원의 문제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토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합의에 이르기까지 한정된 시간을 전제하며, 이를 위해 참석자를 제한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임의의 수의 참석자가 임의의 시간 동안 임의의 주장을 (그것도 틀린 근거와 부당한 논리도 동원하며) 개진하는 토론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건 끝나지 않는 토론, 토론의 악무한이다.
개방성. 말이 좋지, 개방은 비현실적이며, 그런 점에서 현실의 구성을 가로막는다. 진도가 안 나간다는 뜻이다. 더욱이 포퓰리즘으로 수렴될 가능성도 너무 크다. 개방성은 반동으로 가는 첩경이다. 그럼 어째야 할까? 어쩌면 권력관계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포기하는 편이 개방성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 아닐까?
(2021년 5월 3일의 단상을 조금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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