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위해’ 말하고 행동한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를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를 위하는 일은 ‘가능’한 일일까? ~를 위하는 일이 ~에게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는 걸까? 그건 ~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힘을 얻고 힘을 행사하려는 은밀한 계책은 아닐까?
자신을 위하겠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위하더라도 안 될 수 있지만, 책임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니까. 그런데 타자(타인, 집단, 동물, 자연 등)를 위한다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가령, 동물을 위한다는 행위를 보자. 내가 어렸을 때, 키우던 개와 치킨을 나눠먹다가 고역을 치른 적이 있다. 개는 닭뼈를 소화하지 못한다. 나는 막연히 개가 뼈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고(특히 TV에서 방영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봤다), 그래서 뼈를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개는 먹은 걸 다 게워냈다.
어떤 이는 나의 ‘무지’를 지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점에서 대체로 무지하다. 누가 인간과 자연과 동물의 질서를 잘 알겠는가? ‘안아키’ 부모는 아이를 위한다고 백신 접종을 거부한다. 과연 그게 아이에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을 거부한다. 아이에게 수혈을 막는 부모의 행위가 아이에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코로나19 때 백신을 거부한, 그럼으로써 무수한 타인을 위험에 노출시킨, 수많은 이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믿음이 있게 마련이고, 그 믿음은 꺾기 어렵다.
노동자를, 농민을, 빈민을, 이민자를, 아이를, 노인을, 여성을, 장애인을, LGBTQ를, 동물을, 멸종 위기 종을, 다른 등등을 ‘위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굉장히 복잡하다. 나는 ‘위함’의 이름으로 ‘해’를 끼친 무수한 경우를 알고 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위함’을 내세우지 말자는 것이다. ~를 대변한다는 건 ‘대변’의 이름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행위다. 인간은 타자를 대변할 수 없다. 원리상 그러하다.
그래서 중요한 건 타자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이다. 이 일은 결코 대변이 아니다. 운동은 공간과 미디어를 창출하는 실천이다. 나는 묵묵히 이 일을 하는 활동가들을 존경한다. 반면, 대변을 입에 달고 항상 자신을 중심에 놓는 이른바 ‘진보’ 인사들을 기각한다. 내가 알고 목격한 수많은 사례를 다 끄집어 내고 싶진 않다. 위선자가 너무 많다. 고의로 그런 경우도, 자신을 속이며 굳건한 신념으로 그런 경우도, 결국은 자신을 위하고 대변하는 위선자가.
타자를 대변하는 건 불가능하다. 위하는 척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위한다고 솔직히 말하자. 희생마저도 증거가 될 순 없다. ‘순수한’ 희생도 자기를 위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주고 잊으라는 말이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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