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이미지론 특강 (셋째 시간) (2017년 1월 25일, 성균관대) –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 : 시간이란 무엇인가?

지난 강의에 이어…

들뢰즈의 이미지론 특강 (셋째 시간) (2017년 1월 25일, 성균관대) by 김재인
–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 : 시간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운동-이미지가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운동-이미지는 특히 영화에서 잘 드러나지만, 세분될 수 있어요. 영화는 이걸 더 잘 우리에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례입니다. «협상들»(1990)에서 두 권의 «영화»와 관련한 인터뷰가 있는데, 이걸 참고합니다. 한 문장만 미리 보겠습니다. “시간-전체-열림(temp-tout-ouvert)이라는 이 관계를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걸 훨씬 쉽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영화이다.”(PP 79~80) 영화는 사실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해주는 수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첫 번째 시기의 과제와 영화에 대한 탐구가 맞물리는 거죠. 그러니까 들뢰즈가 하려는 건 이미지론이지만, 그걸 인간이 겪는 형태로 인간 경험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지의 모든 논리를 그 자체로 밝히려 하는데, 그걸 영화가 구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거기까지 가진 않을 거구요.

운동-이미지는 셋으로 쪼갤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지각(perception)입니다. 지각-이미지(images-perception)죠. 물질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지각입니다. 우리에게 지각되었다는 것은 우리한테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한테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interesting)는 건데, 그렇다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런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우리한테 필요한 것들이 있었죠. 그게 우리한테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자외선을 눈으로 보지 못해요. 진화 과정에서 그건 우리의 지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우리 지각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은 우리한테 흥미를 끄는 것, 유용한 것, 또는 주의를 끄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지각입니다. 지각은 사물에서 우리에게 온 거죠.다르게 얘기하면 지각은 사물 빼기 무언가, 사물에서 무언가가 빠진 거예요. 이 방을 박쥐가 보면 다르게 보이고 나비가 보면 다르게 보이거든요. 지각은 그런 식이에요. 가령 누가 나에게 주먹을 휘둘러요. 그럼 어때요? 우리는 지각합니다. 근데 지각한다는 건 저기 있는 무언가에 관한 이미지를 우리가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각도 물질 세계의 일부, 물질의 운동의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지각은 세계 속에 있습니다. 지각이 물질 속에 있다고 들뢰즈나 베르그손이 얘기하는 건, 물질와 의식의 구분을 극복했기 때문이에요. 지각이 뭐냐? 물질의 일부, 이미지의 일부, 이게 지각입니다.

누가 주먹을 휘둘렀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몸을 피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주먹을 휘두르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반응을 보이죠. 그런 반응을 포괄적으로 반작용(réaction)이라고 합니다. 자극이 있으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있게 되는 거죠. 이 상황을 지각이 운동으로 연장된다고 표현합니다. 이게 반사 신경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조건반사 있죠? 어떤 지각 후에 지체 없이 운동으로 반응이 뻗어나가는 상황 속에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자극은 밖에서 가해지는 작용(action)입니다. 앞에서 둘째 시간에 작용-반작용 얘기했죠?외부 작용이 있으면 우리는 반작용합니다. 작용에서 반작용으로 뻗어나가는데(prolonger), 그렇지만 바깥쪽으로 선형(linear)으로, 하나의 연속된 선으로 뻗어 나가지 않고, 그 사이에 잠깐 멈췄다가 뻗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걸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잠깐 시간이 걸린 다음 반응을 보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조건 반사가 아닌 형태로 반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고유한 의미의 작용(action)입니다. 이 경우에는 ‘행동’이라고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부에서 어떤 작용이 오면 즉각 튀어나오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건 정확히 말하면 반작용입니다. 그거 말고 어떤 액션이 왔을 때, 자극이 왔을 때, 내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고, 이렇게 시간의 틈을 가진 다음에 나한테서 나오는 작용이 있는데, 이게 고유한 의미의 작용, 즉 행동입니다. 자극에 해당하는 게 지각이죠. 나로부터 나가는 게 작용인데, 단지 반사 수준에서 나온 작용이 있고(이건 엄밀하게는 반작용입니다), 어떤 틈이나 간격 후에 나오는 작용이 있습니다(이게 진짜 작용, 즉 행동입니다). 우리가 행동한다고 할 때는 나로부터 뭔가 시작되어야 하죠? 안 그러면 태엽 장치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랑 똑같다고 간주하죠(이건 반사 운동이죠). 이렇게 구분하고 보면 지각 후에 고유한 의미의 작용인 행동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지각-이미지와 행동-이미지 둘이 구분됩니다. 그런데 고유한 의미의 행동-이미지가 있기 전에 틈이 있다고 했죠? 틈, 간격, 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잠깐 멈춘다는 거예요. 이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가 ‘비결정의 중심’ 혹은 ‘미규정의 중심’입니다. 결정, 규정, 확정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잠깐 멈칫하는 시간을 가리켜요. 들뢰즈는 오직 비결정의 중심이라는 뜻에서만 그 간격을 ‘주체’라고 부릅니다. 주체는 전통적으로 어떤 행동의 출발점이잖아요.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하겠다, 이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주체인데, 들뢰즈의 이미지론에서 주체는 반사 작용을 하지 않고 잠깐 틈을 지니게 되는 그 지점 또는 그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것만이 주체입니다.

주체가 행동의 기원인 건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 행동을 정말 능동적으로 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각-이미지 뒤에 행동-이미지가 오기 전에 있는, 만들어진 틈의 특성을 affective라고 해요. 번역하기 까다로운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걸 affection이라고 해요. 그래서 운동-이미지에는 세 가지가, 지각-이미지, affection-이미지, 행동-이미지가 있습니다. 이제 affective와 affection을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들뢰즈는 특히 스피노자를 affection과 affect를 구분합니다. affection이 매 순간의 상태라면 affect는 상태의 등급의 등락입니다. 이 경우 저는 각각 ‘변용/느낌’과 ‘기운’이라고 옮기자고 제안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이미지를 구별할 때는 의미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일반적인 용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어쨌건 들뢰즈의 정의에 따르면 외부에서 오는 자극(지각)과 외부로 향하는 반응(행동) 사이에 있는 틈 또는 간격이 affection입니다. 조금 어색하지만 저는 ‘정중동(靜中動)’ 혹은 ‘감(感)’으로 옮겼으면 합니다. 일상적으로 ‘감정’이나 ‘정서’는 affect의 번역어로 쓰곤 하니까요. 정중동-이미지는 시간의 간격, 다시 말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반사적으로 반응이 튀어나오는 식이 아닌,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비결정’이 개입하게 되는 계기입니다.

이제 시간-이미지를 보겠습니다. 들뢰즈는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를 구분합니다. 들뢰즈는 ‘운동-이미지’라는 부제가 붙은 «영화» 1권에서 고전 영화를 다룹니다. 그리고 ‘시간-이미지’라는 부제가 붙은 2권에서 현대 영화를 다룹니다. 이 구분은 조금 편의적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없진 않아요. 역사적으로는 2차세계대전이 분기점입니다. 도식적으로 보면, 고전 영화는 운동-이미지를, 현대 영화는 시간-이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고전 영화 시기의 영화 감독 중에도 시간-이미지를 구현한 이들이 있습니다. 또 현대 영화에도 운동-이미지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편의상의 구분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편의상이지만은 아닌 것이, 세계 전쟁이라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오손 웰즈는 시기적으로는 전쟁 부터 활동했지만 전쟁 후에도 꽤 오래 활동했는데(007 시리즈의 하나인 ‘카지노로얄’도 만들었어요), 시간-이미지를 최초로 구현했다고 평가 받습니다. 전쟁 전이었는데도 말이죠. “내가 보기에 웰스는 직접적 ‘시간-이미지’(image-Temps)를, 운동에서 더 이상 단순히 귀결되지 않는 ‘시간-이미지’를 최초로 건립했다.”(PP 73) 따라서 영화 자체가 이미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라는 두 가지 특성을 다 갖고 있다고 봐야 맞겠습니다.

뭔가 작용(지각)을 받았을 때 안에서 잠시 생겨나는 멈춤의 계기, 그것도 하나의 이미지니까 그거를 별도로 떼어낸 게 정중동-이미지입니다. 어떤 틈이 생긴다는 거죠, 시간 간격이 생긴다는 거. 그래서 자극받은 대로 기계론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반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거죠. 하지만 자유의지가 개입한다는 건 아니에요. 여러 여지가 열렸을 뿐,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비결정 상태에 있거든요. 잠시 후 특정한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로부터 뭔가 행동이 나오는 것처럼 보이죠. 그 중간 틈새 시간이 정중동-이미지입니다. 행동-이미지와 구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운동-이미지는 세 경로를 따릅니다. 지각-정중동-행동으로 가는 경로를 감각-운동(sensori-motrice) 회로라고 합니다. 감각-운동 회로가 운동-이미지입니다. 이 회로를 잘 보여주는 게 고전 영화이고요. 전형적으로 액션 영화가 있어요. 액션 영화에서는 싸움하고 하는 과정 자체가 회로를 따르고 있어요. 이쪽의 행동은 저쪽 편의 행동으로 이어지죠. 이렇게 되면 저쪽 편에서는 지각으로 돌아옵니다.

세계를 살아간다는 건 어떤 자극(지각)을 받고 잠깐 멈췄다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는 거고, 표출된 행동은 다른 쪽에 지각으로 갑니다. 그랬다가 그쪽에서 다시 나한테 행동이 돌아오면, 내 쪽에서는 지각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감각-운동 회로를 언어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이미지들은] 소리나 심지어 목소리라 할지라도, 언어학적 기호(signes linguistiques)가 아니다.”(PP 68)

문제는 어떤 지각이 있고 잠깐 멈칫하는 시간 후에 행동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행동하지 못함으로 그냥 멈춰버리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각이 생겼지만 안에서, 정중동-이미지로만 머물면서, 맴맴 도는 도는 거죠. 조금 길지만 들뢰즈의 말을 직접 따라가겠습니다.

“액션 영화(cinema d’action)는 감각-운동 상황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을 지각한 후에, 필요하다면 아주 격렬하게 행동하는, 어떤 상황에 있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행동들은 지각들과 연쇄되어 있고(s’enchaîner avec), 지각들은 행동들로 연장된다. 이제 한 등장인물이 일상적 상황이건 특별한 상황이건, 가능한 모든 행동을 벗어난, 또는 그 어떤 반작용도 허용되지 않는, 어떤 상황에 처했다고 해 보자. 너무 강하거나, 너무 고통스럽거나, 너무 아름다운 상황 말이다. 감각-운동의 연계는 깨진다. 그 등장인물은 더 이상 감각-운동 상황에 있지 않고, 순수한 시각적 음향적 상황에 있다. 이건 또 다른 이미지 유형이다.”(PP 73~74)

‘순수한 시각적 음향적 상황’이라는 것은 정중동-이미지 속에 계속 있다는 거죠. 거기서 바깥으로, 행동으로 나가지 못하는 거예요. 전쟁 상황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거나, 그 끔찍함에 더 이상 아무 행동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겪었어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가 많이 그려낸 장면들이 바로 그겁니다. 행동하지 못하니까. 들뢰즈는 우선 네오리얼리즘의 위대한 발명가인 로셀리니를 예로 들어요. “내 생각에, 네오리얼리즘의 위대한 발명은 이렇다. 사람들은 상황에서 행동할 가능성을, 또는 상황에 반작용할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결코 수동적이지는 않다. 사람들은 가장 일상적인 삶 속에서조차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뭔가를 파악하든지 드러내든지 한다. 그것은 ‘보는 자’(Voyant)의 영화이다.”(PP 74) 문장 마지막에 나오는 ‘보는 자’는 ‘견자(見者)’로 옮기기도 하는데, 순수하게 보기만 한다는 거예요, 행동하지 않고. 정중동-이미지 안에 멈춰 있는 거죠. 이어서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순수한 광학적 음향적 상황에 이렇게 처하게 되면 붕괴되는 건 행동과 그에 따라 서사뿐이 아니며, 본성을 바꾸는 건 지각들과 정중동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전” 영화의 감각-운동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간의 유형도 더 이상 같지 않다. 공간은 운동과의 연결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연결 단절된 공간 또는 빈 공간이 된다. 현대 영화는 특별한 공간들을 건설한다. 감각-운동적 기호(signes sensori-moteurs)는 “빛기호(opsignes)”와 “소리기호(sonsignes)”로 대체되었다. 물론 운동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에 처해진 건 바로 운동-이미지 전체이다.”(PP 74) 운동-이미지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겁니다. 운동-이미지가 있다 할지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지각이 있고 정중동이 있는 와중에, 현행과 잠재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서, 계속 뭔가가 맴돌면서 마치 거울상처럼 어떤 것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결정체-이미지입니다. 자기 반사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서 풍요로워지는 거예요.

물음이 이어집니다. “지각이 순수한 광학적 음향적인 것으로 될 때, 행동과는 더 이상 관계가 없으니까, 지각은 무엇과 관계 맺게 될까? 운동으로의 연장에서 절단된 현행 이미지(image actuelle, coupée de son prolongement moteur)는 잠재 이미지, 정신 이미지 또는 거울 속 이미지(image virtuelle, image mentale ou en miroir)와 관계 맺게 된다.”(PP 75) 앞에서 얘기한 바에 따르면, 행동으로 연장되지 않은 지각-이미지, 즉 순수하게 빛과 소리로만 머물게 된 이미지는 시간-이미지가 될 겁니다. 들뢰즈는 그것을 ‘현행 이미지’가 아닌 ‘잠재 이미지, 정신 이미지, 거울 속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둘째 시간 강의에서) ‘현행’은 지금 여기에 나타났다는 뜻이라고 했지요? 반면 ‘잠재’는 숨어 있다고 했고요?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정중동-이미지가 다른 유형의 이미지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형(線形) 연장을 갖는 대신, 현실(le réel)인지 상상(l’imaginaire)인지 구별되지 않는 점 주위에 두 이미지가 서로의 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회로를 갖는다. 현행 이미지와 그것의 잠재 이미지가 결정(結晶)화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항상 이중이며 아니면 이중화되는 결정체-이미지이다.”(PP 75) 여기서 ‘선형 연장’은 지각-정중동-행동으로 연쇄되는 경로를 가리키죠? 다른 유형의 이미지는, 그게 아니라, ‘현실’인지 ‘거울 속 허상’인지 불분명한 지점을 둘러싸고 두 이미지가 서로 엮여들어갑니다.

잠시 용어를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인용 구절에는 “le réel”(영어 the real)과 “l’imaginaire”(영어 the imaginary)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가장 먼저 라캉의 ‘실재’와 ‘상상계’가 떠오를 겁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건 전혀 그게 아닙니다. 심지어 지금 살피고 있는 인터뷰가 실린 들뢰즈의 «협상들»의 한 인터뷰 제목이 ‹상상계에 대한 의혹›이고 여기서 ‘상상계’는 나쁜 개념이라고 비판합니다(PP 93-96). 그러니 ‘실재’와 ‘상상계’를 가리킬 수 없어요. 심지어 라캉의 틀에서도 ‘실재’와 ‘상상계’가 대립되지 않잖아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와 언어 전의 세계인 ‘상상계’를 모두 넘어서 있는 게 ‘실재’니까요. 그러면 들뢰즈가 가리키는 건 무엇일까요?

번역에 제시했듯, 그것은 각각 ‘현실’과 ‘상상’(거울에 비친 상)을 지칭합니다. 거울 앞에 서 있다고 칩시다. 두 개의 거울 사이에 있는/비친 들뢰즈 사진도 유명하죠?. 거울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고 거울 속에 있는 게 상상입니다. 각각 ‘현행 이미지’와 ‘잠재 이미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둘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중화됩니다. 들뢰즈는 그것을 결정체-이미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어느 것이 현실(현행 이미지)이고 어느 것이 상상(잠재 이미지)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정체 안에서 우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시간’, 시간의 층들(nappes de temps), 직접적 시간-이미지이다. 운동이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과 시간의 관계가 뒤집혔기 때문이다.”(PP 75) ‘시간’을 대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운동과 시간의 관계가 뒤집어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전통적으로 시간이란 ‘주기적 운동’의 수로 이해되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 가령 태양이 지구를 한 바퀴 돈 게 하루,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돈 게 한 달,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돈 게 일 년, 이런 식입니다. 시간은 운동에 종속되어 있었던 거죠. 이를 전복한 게 칸트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시간이 운동에서 독립했다는 거예요. (더 자세한 설명은 제가 쓴 들뢰즈의 칸트 해석을 참고하세요.) 아무튼 결정체-이미지에서 운동과 시간의 관계가 역전되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시간은 더 이상 운동-이미지들의 합성(몽타주)에서 귀결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시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운동이다.”(PP 75) 몽타주란 편집이죠? 보통 우리는 운동-이미지를 이렇게 저렇게 편집해서 늘어놓았을 때 시간이 생겨난다고 생각해요. 한 장면에 이어 다른 장면이 오면,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 오면, 그렇게 해서 시간이 흘렀다고 보는 식이지요. 들뢰즈는 몽타주(편집)는 단지 ‘몽트라주(montrage; 보여주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간에서 운동이 흘러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려면 시간이 무엇인지 답해야 합니다. 물리학 교과서에 따르면, 시간은 ‘시계가 측정하는 것(what a clock reads)’이라고 나와요. 그럼 시계가 뭘 측정하냐? 시계의 가장 기본 단위는 초입니다. 세슘-133 원자는 미세하게 진동해요. 제일 높은 에너지 준위와 제일 낮은 에너지 준위를 오가는데, 알려진 바로는 1초에 번을 진동다. 1초에 몇 번 진동하는지 표시하는 단위가 헤르츠예요. 즉, 91억 9263만 1770헤르츠만큼 1초에 진동합니다. 물리학에서는 세슘-133 원자의 최고 준위와 최저 준위의 헤르츠의 역수로 정의했어요. 이상하죠? 결국 순환적인 정의에 불과한 겁니다. 시계로 몇 번 오가느냐를 측정한 다음에 그것의 역수를 1초라고 한 거니까요. 물리학은 시간이 무엇인지 답하지 못하는 셈이에요. 들뢰즈는 이 지점을 공략합니다. 시간-이미지가 시간을 드러낸다는 거예요. 들뢰즈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가 시간이란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이냐입니다.

시간-이미지란 운동-이미지를 낳는 어떤 겁니다. 시간이란 운동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체’ 혹은 ‘열려 있는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시간과 전체와 열려 있음이 같은 뜻이라는 것이지요. 열려 있음(ouvert; open)은 닫혀 있음(fermé; closed)과 구분됩니다. 열려 있다는 건 뭔가 새로운 게 계속 생성한다는 뜻입니다. 이미지의 정의와 관련시켜 얘기하면 새로운 것이 계속 등장한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반면 모든 게 다 드러나서 끝나버리면 그것은 닫힌 겁니다. 물리학에서 닫힌 시스템(係)은 보통 결정론적 법칙이 지배한다고 해요. 반면 열린 시스템은 새로운 게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을 포괄할 법칙이 아직 없어요. 뭔가 법칙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새로운 게 등장하는 식으로 계속 가요. 그래서 들뢰즈는 보르헤스의 비유를 종종 들어요. 끝이 포크처럼 갈라져 있는데, 계속 포크처럼 갈라져 나간다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미로, 시간의 미로라고 평가합니다. 미로가 아무리 꼬여 있어도 거기에는 결국 나아가는 길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한 걸음 가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식이라면 끝까지 갈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이 ‘열려 있음’이에요. 시간이란 바로 그런 거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또 들뢰즈는 ‘전체(Tout; Whole)’라는 말을 써요. 영어로 우리는 all과 whole을 구분하죠? all은 이미 있는 것들을 다 모은 것, 전부예요. 반면 whole은 경계선 비슷해요. (둘째 시간 강의에서) 구름 이야기를 했는데, 물방울이 더 달라붙으면 전체 자체가 바뀌지요. 물방울이 몇 개 떨어져 나와도 전체가 바뀝니다. 그러니까 열려 있음이 바로 전체입니다. 전체는 집합(ensemble; set)과 구분됩니다. 집합은 닫혀 있는 시스템을 가리켜요. “전체(tout), 그것은 닫혀 있지 않다. 반대로 전체는 ‘열려 있는 것’(l’Ouvert)이다. 전체는 항상 열려 있는 그 무엇이다. 닫혀 있는 것, 그것은 집합들(ensembles)이다.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PP 79) 들뢰즈는 열려 있음이라는 의미에서 전체가 시간이고, 또 우주는 전체라고 말합니다. 계속 자기 생성을 이어가는, 즉 한순간도 똑같은 게 없는 새로운 분출, 그게 우주입니다. “전체는 시간의 차원(ordre)에 있다. 전체는 모든 집합들을 가로지르며, 정확히 말해 전체는 집합들이 자신의 고유한 경향성을 끝까지 실현하는 걸, 말하자면 완전히 닫히는 걸 막는다. 베르그손은 끊임없이 말한다. ‘시간’은 ‘열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매 순간 본성을 바꾸는 것, 끊임없이 본성을 바꾸는 것이다. 전체, 그것은 집합이 아니며, 한 집합에서 다른 집합으로의 영속적 이행, 한 집합에서 다른 집합으로의 변형이다. 시간-전체-열림(temp-tout-ouvert)이라는 이 관계를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걸 훨씬 쉽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영화이다.”(PP 79~80)

시간=전체=열림=우주. 이렇게 봐야 제대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운동-이미지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운동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운동-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운동-이미지를 낳는 다른 차원의 (자기) 생산 운동이 있고, 그게 바로 시간입니다. 정중동-이미지, 그리고 조금 더 심화된 수준에선 결정체-이미지가 시간을 보여준다는 거죠. 자기 생산을 거듭하되 계속 본성이 바뀌어 가면서 존재(존재란 말이 어울리지 않죠?)하는 운동, 계속 자기를 질적으로 바꿔가는 운동은 지금까지 말한 운동과는 다르죠? 그건 시간입니다. 시간 개념의 갱신은 영화를 통해, 결정체-이미지, 시간-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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