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초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진행한 특강의 일부를 정리했습니다. 들뢰즈가 이미지, 운동, 물질 개념을 갱신하고, 그것을 영화와 연결하기 위한 첫 시도입니다.
영화를 논의하면서 들뢰즈는 이미지 자체에 좀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983년에 나온 «영화»라는 제목의 1권 ‘운동-이미지’, 1985년에 나온 2권 ‘시간-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미지라는 게 뭐냐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한 가지만 짚고 가자면 ‘생각에 대한 이미지(像)’라고 할 때의 그 이미지하고 제3기에 특히 영화 작업을 통해 주목했던 ’이미지‘론은 완전 다른 문제입니다. 같은 ’이미지‘라는 말을 쓰지만 완전 달라요. 초기 특히 «차와이 반복»에서도 ’이미지 없는 생각‘이라는 표현을 들뢰즈가 몇 번 정도 쓰거든요. 하지만 이건 정말 ’이미지라는 거 없이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니에요. 이건 ’특정한 상‘을 염두에 둔 거예요. 그래서 ’고전적인 이성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상‘이 없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경험주의적이고 예술적인 생각‘을 지칭합니다. 그걸 추구하려고 한 거고, 그래서 «차이와 반복»에서도 현대 예술이 사례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1980년대에는 ’이미지‘ 자체를 다룹니다. 그거야말로 첫 번째 시기의 작업하고 조화를 이루는 접근일 수 있는데요,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의 하나로 이미지론을 전개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주제는 이미 발표된 글을 참고하세요.)
이미지라는 게 뭘까요? 제 강의에서 큰따옴표 부분은 들뢰즈의 강의록(1982년 1월 5일)에 있는 말을 직접 번역한 겁니다. 큰따옴표 없는 부분은 제가 간추린 겁니다. 강의록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따라갈 수 있게끔 만들어 봤습니다.
먼저 들뢰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라는 시기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고전적인 심리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겁니다. 고전적인 심리학의 기본 전제는 이미지와 운동을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이미지는 우리 의식 속에 있는 거고 운동은 물체들 속에 있는 거라고 구분했다는 겁니다. 그게 고전적인 심리학의 기본 전제인데요.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가 되면 더 이상 그 전제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왜 하필 그 시기였을까요? 바로 영화의 발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건 제 강의에서는 부수적인 주제고요. 아무튼 의식과 이미지와 운동 그리고 의식과 물체의 구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대안으로 제시된 두 가지 철학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현상학이고 다른 하나가 베르그손입니다. 현상학의 구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은 결국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무언가와 결합되어 있지만 어쨌건 결합되기 위해서라도 일단 분리를 전제합니다. 내가 컵을 떠올리면 나의 의식에는 컵이 있지만 그 컵은 이 컵에 대한 의식인 겁니다. 그래서 여전히 의식과 물체의 구분을 가장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특히 «물질과 기억» 1장에서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합니다. 간추리자면 “모든 의식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모든 의식은 무언가이다.” 말자하면 의식과 무언가가 동일하다는 거죠. 의식과 물체가, 이미지와 운동이 같은 거라는 겁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게 «물질과 기억» 1장의 독특성입니다. 베그그손 자신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건 굉장히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들뢰즈는 이미지와 운동의 이원론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까닭은 궁극적으로는 의식도 사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있는 건 뭐냐? 운동-이미지밖에 없습니다. 베르그손은 운동-이미지라는 표현을 쓰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베르그은 그 얘기를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운동-이미지는 들뢰즈의 해석이 담긴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운동-이미지라는 표현의 뜻을 아는 게 들뢰즈 이미지론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universe)는 온통 운동-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우주, 그러니까 실제로 운동-이미지들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딴 게 아니라 마지막 운동-이미지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운동이 이미지이고 이미지가 운동이다”라는 데 이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이미지‘, ’이미지=운동‘, 이미지와 운동은 같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이걸 이해하는 게 오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일단 시작 차원에서 “이미지는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지는 작용하고 반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구절을 먼저 봅니다.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에게 작용하는(agir sur) 바로 그것이며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에 반작용하는(reagir à) 바로 그것이다.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들을 [=다른 이미지들에서 온 작용들을] 받으며(subir) 다른 이미지들에게(sur) 반작용들을 행사한다.”
이때 ’작용한다‘는 말은 아지르(agir), 영어 액트(act)이고, ’반작용한다‘는 말은 레아지르(réagir), 영어 리액트(react)입니다.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작용하고 반작용하니까 운동합니다. 이미지는 1차적으로 다른 이미지에 작용하고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에 반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이미지가 있고 다른 이미지가 있는데, 한 이미지가 작용하면 다른 이미지는 그 이미지에 반작용합니다. 이처럼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것들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들이 이미지입니다. 이걸 요약한 것이 위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입니다.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들을 받으며 [즉, 다른 이미지들에서 온 작용들을 받으며] 다른 이미지들에게 반작용들을 행사한다.” 자 일단 그렇게 말할 수는 있는데, 그렇다면 왜 이미지라는 표현을 썼느냐?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게 왜 이미지냐? 이미지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합당하냐? 부합하느냐? 이런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건 너무 쉬운 문제, 단순한 문제라고 베르그손도 들뢰즈도 답합니다. 우리가 느낌으로 또는 감으로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아펙티브(affective)라는 말로 묘사했고요. 그런데 그건 증명이 아니니까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하겠지요. 전통적으로 이미지란 건 뭐냐?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예요. 이미지는 어원을 따지면 라틴어 이마고(imago)인데, 상(像), 즉 닮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미지는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미지, 그것은 나타나는 것(ce qui apparait)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what appears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나타나는 건 다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청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 넓게 말해 감각되는 것 또는 지각되는 것은 다 이미지입니다. 즉,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저기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것들이 계속 변하죠. 그걸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 대해선 몰라요. 항상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 뿐입니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나타나는 걸 현상(phénomène)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이미지와 현상은 철학적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근데 왜 현상이란 말을 안 썼을까요? 철학자들이 현상이라는 말을 쓸 때는 본질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에 안 쓴 겁니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걸어가면 계속 다른 게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미지는 멈춰 있지 않습니다. 정지해 있지 않습니다. 항상 “운동 중에(en mouvement)” 있습니다.
이 생각 자체는 굉장히 오래됐지만 베르그손은 여기에 굉장히 특별한 해석을 부여합니다. “나타나는 것이 운동 중에 있다면, 있는 건 운동-이미지들뿐이다.” 그러니까 이때 운동과 이미지는 하이픈으로 연결돼 있지만, 사실상 그 둘은 같다, 즉 등호(=)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타난다‘ 또는 ’운동 중에 있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중에 있다‘고 말 수 있습니다. 이어서 들뢰즈는 이걸 세분해 설명합니다.
들뢰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그 모든 요소적 부분 속에서(dans toutes ses parties)”, 베르그손의 표현으로는, “그 모든 면모에 있어(sous toutes ses faces)”, “이미지는 작용하고 반작용한다.” 이 표현들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요소적 부분들‘은 영어로는 elementary parts입니다. 요소(element)란 수학의 집합론에서는 ’원소‘라고 부릅니다. 집합을 이루는 구성물이죠. 지금 맥락에서는 이미지=운동을 이루는 구성물을 가리킵니다. 한편 ’면모‘란 영어로는 faces, ’얼굴‘, ’나타나는 면‘입니다. 얼굴 뒤에 따로 뭔가가 있지는 않지요? 따라서 이미지=운동의 나타나는 면을 가리킵니다. 이런 표현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이어 언급하듯, “이미지는 작용과 반작용의 받침대(support)가 아니”라, 이미지 자신이 즉자적으로(=그 자체로, 그 스스로) 작용하고 반작용며, “더 선호되는 말로 하면, 작용과 반작용은 이미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게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 우주 전체가 곧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요소적인 부분 또는 면모가 서로 작용하고 반작용한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앞에서는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작용하고 또 그 다른 이미지가 반작용한다고 했지만, 실은 모든 게 이미지이기 때문에, 운동 중에 있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미지의 요소적인 부분들 또는 이미지의 모든 면모들이 작용하고 반작용한다고 해야 맞다는 겁니다.
이렇게 비유해도 좋겠습니다(이건 데이비드 흄이 자아와 관련해 든 비유이기도 합니다). 구름이 있어요. 구름은 작은 물방울들의 모임이죠. 물방울 알갱이가 이합집산할 뿐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구름은 안개이기도 해요. 산허리에 걸쳐 있는 구름을 뚫고 등산하다 보면 알게 됩니다. 구름은 안개예요. 구름을 담는 별도의 그릇 같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지요. 구름은 우리가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지요. 이미지는 구름과도 같아요. 하지만 ’요소적 부분‘ 혹은 ’면모‘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이미지 그 자체라는 실체가 있지는 않아요. 이미지의 ’요소적 부분‘ 혹은 ’면모‘가 서로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거예요. 혹은 요소적 부분 혹은 면모끼리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것 전체가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작용하고 반작용하니까 이미지는 ’운동‘이고요. 또한 운동은 이미지의 운동 외에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운동은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것의 총칭입니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이미지는 항상 뭐랄까요, “즉자적”이라는 말이 어려운데, 그냥 그 자체로 있어요. 작은 물방울들이 모인 구름을 생각해 보세요. 구름은 그 자체로 있어요. 하지만 고정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물방울들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느냐에 따라 매 순간 전체 모습이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구름 그 자체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즉자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진도가 좀 나갔으니까, 잠깐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나타나는 것들이 이미지입니다. 근데 나타나는 것들은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운동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와 운동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매번 계속, 매 순간, 영어로 하면 every instant, 이미지는 운동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미지는 운동이랑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은 ’운동이 이미지이다‘보다는 ’이미지는 운동이다‘를 설명하는 중이니까요. 이걸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원소적인 부분 또는 모든 면모에 있어서, 자기들끼리, 즉 멀리서는 이미지라고 불리고 가까이에서는 요소적인 부분 또는 면모라고 불리는 것들끼리, 작용-반작용, 즉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곧 운동이다, 이미지는 운동 중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가보겠습니다. “이미지는 진동(ebranlement)이다. 이미지는 떨림(vibration)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운동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미지가 진동이고 떨림인 것은, 요소적 부분 혹은 면모가 미세하게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지(멈춤)나 고정은 시간을 멈추고 끊어서 파악했을 때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늘 요동치고 있죠. 사실 모든 것은 파동입니다(양자역학이 잘 밝혔지요).
고전 형이상학에서는 의식과 물체(또는 사물)을, 그리고 그 각각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이미지(의식에 속함)와 운동(사물에 속함)을 서로 분리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이미지가 곧 운동이기 때문에 사물과 의식의 구분은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물 쪽에 속하는 운동과 의식 쪽에 속하는 이미지라는 이분법 혹은 이원론은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운동-이미지(운동=이미지)만 있는데, 그것이 우주입니다.
이를 들뢰즈는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 “이미지의 즉자(un en-soi de l’image)가 있다”고 합니다. ‘즉자’란 ‘그 자신 안에 있음’, ‘그 자체로 있음’을 뜻합니다. 이미지의 바깥은 없다는 것이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는 전혀 자각(aperçue)될 필요 없다.”는 주장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각(aperception)’은 라이프니츠에게는 ‘의식’과 같은 뜻입니다(모나드론 14절). 칸트 철학에서는 ‘통각(統覺)’이라는 어려운 말로 옮깁니만, 여기서는 칸트의 의미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맥락에서는, 이미지는 누군가에게 의식될 필요가 없고 그 자체로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미지는 누군가에게 의식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미지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즉, 이미지)도 있지만,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것 역시 이미지입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자각되는, 의식되는), 즉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이미지도 있지만 나타나는 것 못지않게 나타나지 않는 이미지도 못지않게 있거든요. 한편 운동은 꼭 누군가에게 의식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운동인 채로 있습니다. 즉, 운동 중에 있는 이미지인 채로 있습니다. 운동도 운동-이미지입니다. 있는 것은 이미지뿐, 운동뿐입니다. “운동만이 있다. 다시 말해 “있는 건 이미지들뿐이다”.” 이점을 주목할 필요 있습니다.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존재하는 건 운동-이미지밖에 없습니다. 운동-이미지가 우주가 전부입니다. 그중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말고도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건 명백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나타남 중에 일부만을 의식합니다. 그럼 나머지 부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 혼자 운동하고 있는 운동-이미지를, 계속 거듭해서 나타남을 되풀이하는 그 이미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그게 바로 물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 플러스 보지 않는 것, 즉 이미지 전체가 물질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물질을 실체처럼 여기곤 했는데, 여기서 관건은 나타나는 것이 전부지만, 나타나는 게 꼭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일 필요는 없고 그냥 저 혼자 나타난 것으로써 나타나는 것도 여전히 있다는 거예요. 그 부분을 다 포괄하는, 다시 말하면 운동-이미지들의 우주 전체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가 문제인데, 그게 물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잠시 후에 설명을 덧붙이겠지만, 이미지와 운동과 물질, 이 셋의 동일성이 확보됩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견해 모두가 뒤집히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들뢰즈의 정말 철저한 유물론을 이해하는 바탕입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2천 년 넘게 지속되어 온 물질이라는 관념과 들뢰즈가 베르그손한테서 물려받은 물질이라는 관념은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전통적인 물질은 고전심리학이에서 말하는 의식과 사물, 이미지와 운동의 구분과 분리를 유지한 채 성립하는 물질관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랫동안 이어온 물질관은 바로 의식이 한 편에 물질이 다른 한 편에 있다는 이원론을 전제하는 유물론입니다. 근데 들뢰즈는 자신의 유물론을 새로 정립하면서 의식과 물질이라는 구분, 또는 이미지와 운동의 구분을 전제하지 않는 유물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겠습니다.
들뢰즈가 애용하는 표현 중에 ‘variation’이 있습니다. 들뢰즈 친구이자 들뢰즈에 대한 책을 쓴 장클레 마르탱(Jean-Clet Martin)은 Variation이라고 책 제목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걸 ‘변이’라고 많이 옮기는데, ‘변이’는 ‘돌연변이(mutation)’라고 할 때 적절하고, variation은 최우선해서 음악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러니까 ‘변주’입니다. 변주는 원곡 주변에서 변한다는 뜻이지만, 작곡가가 곡을 만들었더라도 곡 해석 즉 연주마다 다 다릅기 때문에, 모든 연주는 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있을 것을 포함해 모든 변주 전체가 해당 곡입니다. 이게 변주와 관련한 들뢰즈의 용어법입니다.
운동-이미지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변주’ 개념을 사용합니다. “영속적으로 변주하는(en perpétuelles variations)”이라는 말을 쓰는데, 영어로는 ‘in perpetual variation’입니다. 이 표현은 스피노자 설명할 때도 가끔 씁니다. 거기서는 ‘영속적’ 대신 ‘연속적(continuous)’이라고도 합니다. 운동-이미지는 영속적으로 변주하는 식으로 있습니다. 일렁임의 연속이라고 할까요? 세상에 있는 모든 파동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거나 나타나는 모든 것은 연속적 변주의 와중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거죠. 사정이 이렇다면, 사물은 추상의 산물이이며, 그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이미지의 연속적 변주가 곧 우주입니다. 이렇게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변주의 와중에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우주는 운동입니다.
들뢰즈는 탁자를 예를 듭니다. “탁자, 그것은 진동들, 떨림들의 시스템이다.” 탁자가 진동이라니요? 일감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근데 이 탁자는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죠? 그럼 분자란 뭐냐? 과학자들은 분자를 떨림에 의해, 진동에 의해, 다른 말로 운동에 의해 규정합니다. 사물들은 또는 분자들은 크게 보면 세 가지 상태에 있어요. 사물들과 분자들은 같은 것인데, 왜냐하면 사물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최소 단위가 분자거든요. 세 가지 상태는 기체, 액체, 고체입니다. 과학자들은 기체, 액체, 고체를 분자들의 운동으로, 떨림으로 설명합니다. 모든 분자들은 진동하고 있어요. 기체는, 이를테면, 이 방의 공기 같은 거죠. 기체는 상당히 자유롭게 운동하고 있습니다. 운동하는 이유는 열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건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분자의 운동이 열입니다. 반대로 고체는 떨림이 굉장히 제한된 상태입니다. 들뢰즈도 표현하듯, 고체는 자기 자리에서 움쭉달싹 못하고 약간만 떠는 상태, 진동이 최소화된 상태입니다. 가장 활발하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태가 기체고요. 그 중간 상태가 액체입니다. 그러니까 분자들의 진동, 떨림, 운동을 통해 사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체, 액체, 고체는 나름의 법칙을 따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칙이란 다른 뜻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의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거예요. 복잡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엄밀한 법칙입니다.
그래서 테이블, 즉 고체는 특정 상태의 운동, 분자들의 떨림입니다.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운동-이미지,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운동 중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형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 탁자와 이 책, 우리가 서로 구분되는 사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운동-이미지로서 서로 유형이 좀 다를 뿐입니다. 분자들, 즉 요소적 부분들 또는 면모들의 이합집산 운동이 서로 다를 것일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사물’이라는 고정된 실체로 불렀던 것은 서로 이런 식으로 다를 뿐입니다.
사물을 분자로 환원하고, 분자로 사물을 이해하고, 분자를 운동-이미지로 이해했으니 이제 ‘의식’이 무엇인지 검토할 차례입니다. 들뢰즈는 의식도 없다고 합니다. “사물들이 없는 것 못지않게 의식도 없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사물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모두가 예전에 알고 있던 식의 그건 아니라는 거죠. 의식도 운동-이미지라는 겁니다. “나의 의식은 운동-이미지요, 다른 이미지들 중의 한 이미지이다.” 의식은 어디에 소재하고 있죠? 보통 뇌에 있다고 합니다. 뇌는 몸의 기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몸도 이미지이고, 뇌도 역시 이미지예요. 나타나는 것에는 그 어떤 특권도 없습니다. 몸이나 뇌나 모두 운동-이미지입니다. 그러니까 운동 중에 있는, 나타나는 것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의식이란 말은 어려운 말인데, 아주 단순화시키면 자신에게 자각되는 게 의식입니다. 아, 내가 이렇구나, 하고 스스로 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어원을 보면 consciousness, 즉 ‘함께 아는 것’이죠. 내가 어떠한지(‘대상’의 측면)를 아는 것(‘주체’의 측면)이기 때문데 ‘두 나’가 등장해서 ‘함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각(self-conscious)’과 같은 뜻입니다. 자각된 것도 나타난 것 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과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거죠. 방식의 차이 또는 유형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의식 역시도 운동-이미지입니다. 그 운동-이미지도 그것을 규제하고 조절하는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또 서로 구별됩니다. 그래서 식에도 특권이 없고 사물에도 특권이 없어요. 현상학도 의식과 사물을 합치려고 했지만, 여전히 둘은 본성이 다르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 들뢰즈의 진단이고요.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이미지=운동”뿐 아니라 “운동=물질”도 제안했어요. “이미지=운동”이고 “운동=물질”이기 때문에 이미지=운동=물질의 “삼중의 동일성”이 성립합니다. 물질과 이미지가 아주 잘 융합하는 것은 “정의상 물질이 잠재성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죠. “물질 안에는 숨은 것이 전혀 없다.” 여기서 잠재성(virtualité)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손에게 잠재(le virtuel)란 현실/실재(réalité) 중에서 지금 나타난 것, 즉 현행(le actuel)이 아닌 것입니다. 잠재는 ‘숨은 것’이고요. 물질 안에는 숨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물질은 현행입니다. 현행은 생생하게 이 앞에 현재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현행은 자각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숨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으니까, 우리가 어떠한지 몰라요. 인식적으로 몰라요.
물질은 나타나는 것 전부, 그러니까 숨은 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설사 지금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미지라 할지라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미지와 본성의 차이,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어요. 다 이미지=운동=물질이죠. 우리 앞에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서의 이미지가 의식이예요. 이미지가 의식 속에 있다고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은 여러 이미지 중의 한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의식과 별개로 존재해요. 의식되지 않은, 의식이 아닌, 그런 이미지도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이미지들은 나타나고 또 다른 이미지들은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꼭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어요. 나름의 법칙은 있지만, 우연과 우발에 좌우되는 눈먼 법칙입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기저에는 우연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미지=운동=물질의 삼중의 동일성은 “보편적 변주의 무한한 우주(l’univers infini d’une universelle variation), 영속적인 이 작용들과 반작용들”과도 같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여기서 ‘보편적(universel)’이라는 말은 ‘우주(univers)’의 형용사예요. 그래서 우주 모든 곳에 다 퍼져 있다는 성격을 ‘유니버셜’(=보편적)이라고 했습니다. 우주 전체를 망라한다는 겁니다. 보편이란 말 자체보다 우주 전체에 관여한다는 의미를 먼저 떠올려야 해요. 영속적인 작용들과 반작용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운동-이미지의 이 우주”, “운동-이미지들의 일종의 찰랑거림”은 “상식의 관점”이라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베르그손도 말한 바 있습니다. 철학자의 관점은 의식과 사물을 서로 단절시키는 방식인 반면, 상식의 관점은 철학자들이 애써 구분하는 의식과 사물, ‘표상들’과 ‘사물들’의 이원성을 믿지 않아요.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 제7판 서문(19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우리에게는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기에 ‘이미지’란 관념론자들이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한,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덜한, 어떤 실존물이다. 그것은 ‘사물’과 ‘표상’의 중도(中道)에 위치한 실존물이다.” 들뢰즈의 말로 바꾸면, “상식은 우리에게 불투명한 사물들과 우리의 안에 있는 표상들의 중간 세계에 자리 잡고 있다. (…)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는, 이 운동-이미지의 우주는 결국 상식의 관점이다.” 상식적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 들뢰즈는 잠깐 물음을 던집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운동-이미지의 우주”는 “영화의 우주, 영화의 세계” 아니겠는냐, 그건 상식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카메라의 관점” 아니겠느냐고.
이것을 일종의 기계론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들뢰즈는 자문합니다. 만일 우주가 작용과 반작용에만 따른다면 기계론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주에는 합목적성(finalité)이 없습니다. 즉,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법칙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말합니다. “이 우주는 있는 대로요, 그것이 생산되는 대로요 그것이 나타나는 대로이다. 이 우주는 근거(raison)도 목표(but)도 없다. 왜 다른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런 이미지들일까? 그냥 그렇다. 그냥 그렇다.” 철학적으로 목적론과 대립되는 의미의 기계론, 둘 다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계론에는 굉장히 엄밀한 조건이 따라붙기 때문이라는 거죠. 베르그손에 따라 들뢰즈는 세 가지 조건을 말하는데, 이 부분은 건너뛰겠습니다.
이제 분자보다 작은 ‘원자’에 대한 베르그손의 견해를 보겠습니다. 보통 원자는 운동을 정지시켜 정지된 것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원자마저도 굉장히 풍요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원자는 항상 흐름과 뗄 수 없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원자는 항상 파동과, 그것이 수용하는 작용의 파동 및 그것이 방출하는 반작용의 파동과 뗄 수 없다. 베르그손은 원자를 결코 멈춰 자르기라고 착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그손은 원자를 “파동들과 근본적인 관계에 있는, 파동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미립자로, 또는 힘의 선들과 뗄 수 없는 중심으로” 착상합니다. 원자 역시 ‘운동을 멈춰 자르기’가 아닌 ‘운동-이미지’인 것입니다. 원자는 파동 혹은 힘과 관련된 무엇이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덩어리, 그 자체로 자족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베르그손은 운동을 멈춰서 생겨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이해되는 원자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표나 합목적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기계론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요?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다듬은 개념인 ‘기계(machine)’와 그 형용사형(machinique)을 언급합니다. 우주는 “기계론적(mécaniste, mécanique) 우주가 아니라 기계적(machinique) 우주”,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우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계론적’이지 않으며 ‘기계적’이라는 말은 많은 설명을 요합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기계란 ‘[흐름(flux)의] 절단(coupure) 시스템’이라고 정의됩니다(프랑스본 43쪽). 책 출간 직후의 인터뷰에서는 “흐름의 절단의 전 시스템”(ID 305)이라고도 했습니다. 절단은 기본적으로 흐름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흐름은 다른 말로 ‘물질’ 또는 ‘질료’, 휠레(hyle)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그 어떤 특성도 없는 재료 상태입니다. 절단은 흐름에 특성을 부여하는 작동입니다. 어떤 특성이 부여되었다고 해서 영속하지는 않습니다. 이내 다른 절단에 의해 흐름의 수준으로 물러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는 흐름과 절단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런 작용을 ‘기계’라고 부릅니다. 우주는 거대한 자기 재활용(recycle) 기계로서, 재료 수준과 특성 수준을 끊임없이 오갑니다. (기계 및 흐름과 절단에 대해서는 저의 박사학위논문 등 다른 곳에서의 설명을 참고하세요.)
들뢰즈는 ‘기계’가 ‘운동-이미지들의 우주’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기계적’은 ‘이미지=운동=물질’의 삼중 동일성을 아우르기 좋습니다. 들뢰즈는 “이 순간의 우주(l’univers à ce moment-là)를 더 정확하게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배치체(l’agencement machinique des images-mouvements)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치체’라는 개념은 «카프카»와 «천 개의 고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다른 곳에서 했습니다.) 배치체는 요소들이 특정하게 배치된 상태 혹은 집합체입니다. 기계적 배치체는 배치체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지금 이 순간의 우주’는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배치체’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우주뿐 아니라 그 어떤 순간의 우주도 마찬가지겠지요. 말하자면 우주는 매순간 ‘운동-이미지들의 배치체’입니다. 그러고나서 들뢰즈는 “영화는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배치체일까?” 하고 물음을 툭 던집니다. 뒤에서는 “운동-이미지들의 물질적 우주 또는 기계적 배치체”,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우주”, 그건 영화가 아닐까? 영화 말고 다른 뭐가 있을까? 이렇게 묻습니다.
베르그손은 이미지가 “물질적(matériel)인 동시에 역학적(dynamique)”이라고 밝힌, “진짜 운동(le vrai mouvement))은 물질”이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들뢰즈는 평가합니다. 즉, 이미지=물질=운동의 삼중 동일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운동-이미지의 영속적 변주와 진동‘, 즉 ‘물질적 우주의 운행과 떨림’은 곧 영화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전체를 요약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의식과 사물 또는 물체 사이에 질적 차이, 본성의 차이를 설정하는 전통 심리학이 위기에 처했고, 현상학과 베르그손이 이를 극복하려 시도했지만, 베르그손이 더 뛰어나다고 들뢰즈는 평가합니다. 왜냐? 베르그손은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되는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나타나는 것은 계속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운동 중에 있고, 나타나는 것을 요소의 측면에서 보면 작용-반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운동입니다. 이미지는 곧 운동입니다. 사물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분자는 운동 유형에 따라 액체, 고체, 액체, 기체로 구분되기 때문에 결국 운동-이미지입니다. 의식은 뇌에 있다고 하는데, 뇌는 몸의 일부고, 몸도 뇌도 여러 운동-이미지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특권이 없습니다. 모든 건 운동-이미지로 환원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이미지 말고도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은 이미지들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 합치면 물질입니다. 나타난 것들의 전체가 물질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이미지와 운동과 물질의 동일성을 성립합니다. 전통적인 유물론, 즉 의식과 물질의 구분 또는 의식의 폐기입니다. 그러니까 물질만 있고 의식은 물질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식의 견해도 폐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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