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입문 강의»(2018) 유감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가 쓴 «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입문 강의»(2018)를 조금 살펴봤는데, 기대에 못미친다. «들뢰즈+과타리 «천 개의 고원» 입문 강의»(2024)도 봤는데, 마찬가지다. 조금 나은 해석이 나왔나 했는데 실망이다.

두 대목을 통해 검토한다.

우선 1장 1절의 앞부분을 해설한 22~27쪽을 보자. 다음은 해당 대목 전체를 직접 번역한 것이다. 이를 내가 해석한 것과 비교해 보라. 다음에 제1장 5절의 앞부분을 해석한 73~75쪽을 보자. 역시 해당 대목 전체를 직접 번역했으니, 내 해석과 비교해 보라.

나의 «안티 오이디푸스» 해석(전체 강의를 참고하세요): 참고1 참고2

 

<자료1> 22~27쪽.

기계란? ‘제1장 제1절 욕망적 생산’을 읽는다.

처음 두 문장은 정신분석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처에서 작동하고 있다. 중단 없이, 혹은 간헐적으로. <그것>은 숨을 쉬고, 과열하고, 먹는다. <그것>은 배변하고 애무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에스das Es’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어의 <es>는 영어의 <it>, 프랑스어의 <ça>에 해당하는 ‘그것’이라는 뜻의 대명사인데, 이를 대문자화하여 명사로 만든 것으로 자아(Ich), 초자아(Über-Ich)와 함께 인간 마음의 세 가지 심급 중 하나를 구성합니다. 영어의 <it>도 독일어의 <es>도 날씨나 온도 등의 자연현상이나 막연한 현장의 상황 등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만, 그 연상으로 정신분석에서는 자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작용하고 있는 인격화되지 않은 무의식의 작용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 ‘에스’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욕구에 따라 우리는 호흡이나 식사, 배변이나 애무를 하는 것입니다. ‘배변’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발달 단계론의 ‘항문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무’는 리비도의 성적인 성격을 암시하는 것 같네요.

<그것>이라고 부른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도처에 기계가 있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스>가 아니라 ‘기계machine’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일부러 말하는 것인데, 처음부터 잘못 말할 리가 없죠. 이 말 바꾸기에는 제대로 된 의미가 있습니다. 정신분석에서 ‘에스’라고 불리는 것은 ‘……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기계’로 다시 보고 싶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굳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실수’, ‘착각’, ‘잘못 듣고’, ‘잘못 보는’ 등의 ‘착각 행위Fehlleistung’에는 무의식적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논의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잘못 쓴 척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착각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이나 «정신분석 입문»(1917)에 나옵니다. 프로이트 이론의 무의식 혹은 전의식적 차원의 주술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도 나도 모르게 착각하고 말았다, 라는 느낌일 것입니다.

‘에스’가 아니라 ‘기계’라는 것이 이 책 전체 논의의 초점입니다. 과타리에게는 ‹기계와 구조›(1969)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호세이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한 «정신분석과 횡단성»(197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지 제대로 설명한 느낌의 논문은 아니고 짧은 글이지만, 거기에서는 구조주의, 특히 라캉파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구조’가 아니라 ‘기계’라는 관점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라캉파의 구조주의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긴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일단 구조주의란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시작된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 인간의 행동이나 친족·씨족관계, 교환, 주거, 언어, 예술과 문화의 양식은 무의식적 차원의 ‘구조structure’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전제에 서는 방법론이다. 그 ‘구조’란 사물을 위/아래, 오른쪽/왼쪽, 남성/여성, 정신/물질… 등 사물을 분화하여 위치시키는 기호 체계입니다. 소쉬르(1857~1913)의 언어학이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라캉은 소쉬르→레비스트로스 유래의 구조주의를 정신분석에 적용하여 무의식 속에서 언어적 구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구조주의적으로 읽어내는 것, 즉 무의식을 기호체계로 파악하는 것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라캉에게 있어서 남근(Phallus)은 남성에게 실제로 붙어 있는 성기가 아니라 기호로 간주됩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는 평면화된 프로이트주의의 ‘에스’ 이해에서 상정되는 것처럼 생물로서의 인간에게 구비된 본능 같은 것이 아니고,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기호 체계로서 고정화된 ‘구조’도 아니지만, 인간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계’란 무엇일까요? 마지막까지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앞부분에서 ‘도처에 기계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또한 앞으로 읽다 보면 ‘욕망 기계’, ‘독신 기계’, ‘에너지 기계’ 등 다양한 종류의 ‘기계’가 등장합니다. 적어도 공장에서 가동되는 그런 기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기계’는 도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욕망’이나 ‘독신자’까지 만들어내지도 않습니다. 들뢰즈 등이 ‘기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당히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동적”으로 혹은 “자립적으로” 계속 운동하는 것 일반을 ‘기계’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시스템처럼 계속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는 것처럼 운동의 반복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운동체인 것 같습니다.

이 가와데문고(河出文庫) 번역본의 경우, 하권 마지막에 1973년 증보판에 추가된 ‘부록’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기계’와 ‘도구outil’의 차이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도구’를 인간의 신체의 연장선으로 보고, 연장선으로서의 ‘도구’가 진화하여 인간의 직접적인 동작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의 어느 시점에 ‘기계’가 등장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도구’인지 아닌지는 인간에게 쓸모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지만, ‘기계’는 그러한 인간에게 유용성 여부와 무관하게 계속 ‘순환’하는 것으로서 또 다른 범주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가 접촉하면 거기서 ‘기계’가 탄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만나면 이질적이기 때문에 바로 동화되지 않고 상호 작용하는 형태로 변화와 운동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증기와 금속을 접촉시키면 증기기관이 탄생한다거나, 회전차에 쥐를 넣어 회전운동하는 기계로 만든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주체와 합목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쓰임새가 정해져 있는 ‘도구’와 달리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으로 탄생하는 ‘기계’는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기계’라고 하면 왠지 공장의 정밀기계 같은 것을 표준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몸의 특정 영역이나 사회적 집합체 등을 ‘기계’라고 부르는 것은 은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은유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의미의 ‘기계’에 의해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물이 만들어지고, 그 일부가 좁은 의미의 ‘기계’로 현상한다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기계’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공장의 자동화 기계와 같은 금속성 이미지가 떠오르는데요. 그것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단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시각을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생물로서의 인간의 몸, 개인의 정신, 사회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고 각각이 하나의 완결된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저자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많은 사물과 사건들이 다양한 수준의 ‘기계’의 복잡한 연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셋 사이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것처럼 큰 단차(段差)가 없음을 시사합니다. 생물학이나 생리학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신체성의 수준, 정신분석이 문제 삼는 정신구조의 수준과 마르크스주의가 문제 삼는 하부구조의 수준은 단순히 평행한, 병렬적인 관계일 뿐만 아니라 경계선을 설정할 수 없이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관계입니다. ‘기계’의 연쇄로 보면 그것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연결과 접속을 수반하는 다양한 기계들의 기계가 있다. <기관 기계>가 <원천 기계>로 연결된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또 다른 기계는 흐름을 차단한다. 유방은 우유를 생산하는 기계이고, 입은 이 기계에 연결되는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하는 기계(천식 발작)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다. (…) <에너지 기계>에 대해 <기관 기계>가 있고, 항상 흐름과 단절이 있다.

<기관 기계machine-organe>는 일단 몸의 각 기관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몸 전체가 합목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각 기관이 각각 ‘기계’로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원천 기계machine-source>라는 것은 ‘욕망’이나 ‘리비도’, 혹은 생물학적 욕구 등을 발생시켜 그것을 각 기관에 보내는 ‘기계’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기계는 흐름을 발생시키고, 또 다른 기계는 흐름을 차단한다’는 것은 <원천 기계>와 <기관 기계>의 관계를 말합니다. 기관을 기반으로 고유한 운동을 하는 기계는 이전의 에너지 흐름을 일단 끊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을 일으킵니다. 유방이라는 ‘원천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우유, 혹은 우유에 포함된 에너지의 흐름을 입이라는 ‘기관 기계’가 끊고 독자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 ‘입’은 다양한 기계 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거식증이 되면 배설이나 천식 등의 운동도 합니다. 이것은 같은 기관이 상황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에너지 기계 machine-énergie’라는 것은 아마도 ‘원천 기계’와 거의 동의어일 텐데, 여기에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기계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몸의 각 기관이 다양한 운동의 가능성을 가진 기계로서 다른 기관과 연결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움직임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몸’이 하나의 원리에 의해 관통되는 통합체라는 관점을 흔들어 놓는 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입술기→항문기→남근기→잠복기→생식기 순으로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이트의 리비도에 의한 심리학적 발달론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리비도의 중심적 위치가 ‘기계’의 연쇄의 불안정성 때문에 자꾸만 이동하고 있고, 오히려 중심점이 어딘가에 정해져 있지 않다면, 프로이트의 발달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료2> 73~75쪽.

[절단-연결] ‘제1장 제5절 욕망 기계’ 읽기

‘제5절 욕망 기계’에서는 ‘욕망 기계’가 단순한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기계’라는 그들의 주장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72~73페이지에 걸쳐 “기계는 모두 연속적인 물질적 흐름(즉 질료)과 관련되어 있고, 기계는 이 흐름을 끊어내는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즉, 물질의 흐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서 이 흐름이 끊어지고 새로운 기계,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는 데 ‘부분 대상’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흐름이 향하는 목표로서의 ‘부분 대상’이 항문→장→→입, 이렇게 현실적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74쪽 가운데 ( )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부분 대상’에 주목한 것은 좋았지만, 그 사이의 흐름을 무시한 것은 좋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네요.

그러면서 자신이 기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이들을 분석한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1903~1990)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빈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혔으나 운 좋게 2차 대전 발발 전에 풀려나 미국에서 심리학자로 활동하며 지적장애아, 정서장애아, 자폐아를 치료했습니다. 프로이트에 관한 저술로도 유명합니다. 원래는 제대로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을 심리학자라고 사칭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Connecticut <Connecticut(연결해라) – I(나는) cut(잘라라)>라고 어린 조이는 외친다. 베텔하임은 이 소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모터, 리드선, 램프, 기화기, 프로펠러, 핸들 등을 갖춘 기계에 자신을 연결하지 않고서는 살 수도, 먹을 수도, 배설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전기 식사 기계, 자동 호흡 기계, 항문 광학 기계 등이 있다. 욕망적 생산의 체제와 양식이 이토록 정확하게 제시된 예는 많지 않다. 양식이란, 파탄이 작용 자체의 일부를 이루고 절단이 기계적 연결의 일부를 이루는 그러한 양식을 말한다.

조이는 바로 린드너의 ‘기계와 소년’을 살아내고 있는 입니다. 코네티컷(Connecticut)이라는 지명에서 ‘접속’과 ‘절단’이라는 마치 기계의 회로와 같은 의미를 읽어내고, 자신을 그런 회로에 연결된 기계의 일종으로 보고 있는 것이군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아이가 자신과 같은 생체와 기계와 같은 금속제 신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몸 또한 욕망의 흐름의 [절단접속] 관계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의 연쇄라는 것을 잘 통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흐름 속에 파탄이 발생하는 것은 새로운 ‘기계’의 탄생인 셈이다.

이후 욕망 기계의 다양한 특징이 열거되어 있네요. 각각의 기계가 정보 전달을 위한 고유한 코드를 가지고 있어 서로 이탈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절단의 잔여물로서 주체가 생겨나고 그 주체가 새로운 기계의 부품이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Comments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