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욕망 기계들
1절. 욕망적 생산
원서 7쪽입니다. 1장의 제목은 ‘욕망 기계들’입니다. 프랑스어로 machines désirantes(마신 데지랑트). 영어로 ‘desiring machines’라고 번역합니다. 한국에서는 ‘욕망하는 기계들’이라고 번역해 왔습니다. (어지간한 대목에서 단수형과 복수형은 특별한 대목이 아니면 구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말씀드렸는데,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프랑스어 ‘데지랑트(désirante)’, 영어의 desiring은 현재분사가 아니라 형용사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엄밀하게 보자면, 흔히 하는 번역으로 ‘욕망적인 기계’, ‘욕망적 기계’입니다. ‘욕망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그 말은 기계 안에 ‘욕망의 특성’이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기계’를 꾸며주는 수식어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어에도 desire의 형용사가 없어서 분사형 desiring으로 번역한 거죠. 영어까지는 그 번역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말에서 ‘욕망하는 기계’로 하면 앞뒤가 전도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계가 욕망하는 거예요. 욕망이 기계의 특성이라는 주장을 기계가 욕망의 주체가 된다고나 할까요. 이런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욕망적 기계. 나는 ‘욕망 기계’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자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과타리는 기계라는 말에 ‘소시알(sociales)’, ‘테크닉(techniqnes)’이라는 형용사를 붙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어로 social machines, technical machines. 그러면 당연히 desiring도 형용사로 보는 게 맞겠죠. ‘사회 기계, 기술 기계, 욕망 기계’, 이렇게 봐야지 표현법이 맞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기계’라는 말과 ‘욕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해명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가 그렇게 접근하면서 이해해야겠다는 말입니다. 1절의 제목도 접근법이 유사합니다. La production désirante이죠. 이것도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생산’이 아니라 ‘욕망적 생산’입니다. 즉, 생산이라는 게 욕망적 특성이 있다는 뜻이죠.
오늘은 1장의 제목 ‘욕망적 생산’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분열자의 산책
첫 문단, 아주 악명 높은 대목인데요. 두 문단에 걸쳐 ‘분열자의 산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두 문단을 볼 텐데, 앞 문단은 일반론,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요약에 해당하는 것을 담고 있고, 뒷 문단은 그에 대한 풀이입니다.
처음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첫 문단 전체가 다 난해해요.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원서에서는 여기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괄호 안에 ‘싸(ça)’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프랑스어에서 ‘싸(ça)’는 중성 지시대명사입니다. ‘이것, 그것, 저것’을 뜻하고, 영어 it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싸라는 말이 ‘싸 에 라(ça et là)’ 형태로 ‘여기저기’를 뜻하는 부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뭔가를 지칭하는 지시대명사와 부사적인 측면을 함께 노린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게 프로이트에게서 온 ‘이드’입니다(이드가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싸’는 ‘이드’를 전복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입니다. 아까 들뢰즈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무의식이 다양체라는 점을 첫 문장부터 드러내려고 ‘싸’로 시작한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 기능한다(function)는 것이 무의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책 제목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알 수 있듯이, 오이디푸스, 즉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첫 문장부터 정신분석의 용어들을 적절하게 뒤트는 작업을 합니다.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러니까 멈춤 없이 기능할 때도 있고, 멈추면서 기능할 때도 있고. 기능이라는 게 기계의 가장 중요한 작용입니다. 이때 ‘그것’의 기능이라는 게, 기계의 작용 또는 ‘싸’의 작용이라는 게, 때로는 멈추지 않고, 때로는 멈추면서, 라고 얘기된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기술 기계’, 좁은 의미의 기계죠, 그런 기술 기계의 작동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살짝 알게 해줍니다. 왜냐면, 기술기계는 멈추지 않으면서 작동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입니다. 뒤에서 자주 나오지만, 고장 나면서 기능하고, 고장남으로서만 기능한다는 점이, 들뢰즈·과타리가 얘기하는 기계의 특징입니다. 이 점이 첫 문장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죠. 너무 문헌 해석으로 치우칠 거 같으니까, 이 정도까지 하고 계속 가면.
다음에는 그 기능들을 열거합니다.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사람들이 열 내고 그러지요? 두 문장으로 다양한 기능을 열거했습니다. 단지 몇 개만 예를 든 거고, 기능은 무한이라고 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드(le ça)라고 불러 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이드’라고 번역한 말은 프랑스어 원문으로 정관사 ‘르(le)’와 방금 말씀드린 그 ‘싸(ça)’의 결합입니다. le는 남성정관사입니다. 원문이 이탤릭체로 강조되어 있고요. 영어로는 ‘르 싸(le ça)’가 잘 표현되지 않습니다. 굳이 영어로 하면 the 다음에 it이 오거든요. ‘the it’. 영어로는 표기가 불가능하죠. 그래서 영어 번역자들이 라틴어 이드(id)로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까지 오게 된 순서를 봐야 합니다. 프로이트는 3인칭 정관사 ‘다스(das)’와 3인칭 중성 인칭대명사 ‘에스(es)’를 명사로 만든 ‘에스(Es)’를 결합했습니다. es는 영어 it 정도쯤 됩니다. ‘다스 에스(das Es)’. 이게 프로이트가 썼던 독일어 원문 표기입니다. 이걸 프랑스 정신분석가들이 관례적으로 ‘르 싸(le ça)’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그 용어를 ‘the It’으로 변역하려니까 뭔가 말이 안 돼서, 이걸 통째로 묶어 ‘이드(id)’, 라틴어 3인칭 중성대명사 id로 번역한 겁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id가 프로이트의 das Es의 직역입니다.
그럼 우리말로는 뭐로 옮기면 좋을까요? 여러 제안이 많습니다. 이걸 ‘거시기’로, 또는 ‘그것’이 아니라 ‘그거’로 번역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나름 애환이 서린 번역어입니다. 나는 그런 고민은 존중하지만 딱 맞는 것 같지는 않아서 우리말로 통용되는 ‘이드’로 옮겼습니다. 최소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의 용어라는 점은 잘 드러난다고 봅니다.
여기 핵심은 정관사를 붙임으로써 생겨나는 제약입니다. 정관사는 영어로 definite article입니다. 딱 한정되어 버려요. 근데 바로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그것’, ‘싸’는 그런 제약이 없습니다. 도처에서 기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단일체(unité)가 아니라 다양체(mutiplicité), 모습을 바꿔가면서 도처에서 기능할 뿐, 어떤 기능을 하느냐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나 다른 정신분석가들처럼, 한정해서, le ça, id, das Es라고 부르는 것은 오류라는 겁니다.
바로 이어서.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인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사실, 아까 내가 ‘그것’이 ‘기계’라고, ‘기능한다’는 일차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말했는데, 이 문장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은유’, ‘메타포’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 사실 그렇습니다. 대체 이때 말하는 기계가 뭐냐? 욕망 기계입니다. 기술 기계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기계 개념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은 뒤에서 언급됩니다.
기술 기계의 특징이 뭘까요? 요약하면, 기술 기계는 외부의 에너지나 외부의 프로그램에 따라, 말 그대로, 기계론적으로, 메카닉(mechanic)하게, 다른 말로하면 인과적인 순서에 따라 기능합니다. 거기서 만약 고장이 생기면 작동을 멈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들뢰즈·과타리가 말하는 욕망 기계는 그런 기계하고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이어서 보면.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이 문장에서 ‘짝짓기’는 프랑스어 ‘couplage’, 영어 ‘coupling’, ‘커플링’입니다. 또 ‘연결’은 프랑스어 connexion, 영어 connection입니다. 사실상 이 두 말은 동의어로 쓰입니다. 들뢰즈·과타리는 ‘연결’이라는 말을 선호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커플링’이라는 말을 함께 씁니다. 또한 ‘기계들의 기계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뒤에 언급되듯, ‘모든 것이 기계’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기계는 없습니다. 어떤 기계의 기계, 기계의 기계, 이런 식으로 서로 그물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 자체는 어려울 수 있는데, 기계들의 기계들, 모든 게 기계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특정 기계를 특정할 때, 특정 기계도 다른 기계들의 기계들, 또는 다른 기계들과 연결되고 짝지어진 기계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기계를 두 측면으로 나눕니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가지를 뻗는다.” 가지를 뻗는다는 말은 프랑스어 branchée, 영어 branched입니다. ‘가지가 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가지를 뻗어 연결되는 관계입니다. 한편에 원천 기계(source machine)가, 다른 한편에 기관 기계(organ machine)가 있습니다. 이렇게 둘이 있는데, 이 둘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고, 이를 다른 기계가 절단한다.” 그러니까 원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는 기계고, 기관 기계는 방출된 그 흐름을 절단하는 기계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순서로 보면 방출이 1번이고, 절단이 2번입니다. 하지만 이건 관념적인순서에 불구합니다. 실제적으로 절단이 없으면, 흐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 ‘방출 다음에 절단’이라고 순서 매김을 했을 뿐입니다. 이 대목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절단’ 개념은 ‘기계’의 정의가 본격 다뤄지는 1장 5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