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한국어 판본을 읽기 어려운 이유 (2)

1편에 이은 글입니다.

Mais au lieu d’une chose qui se distingue d’autre chose, imaginons  quelque chose qui se distingue — et pourtant ce dont il se distingue ne se distingue pas de lui. L’éclair par exemple se distingue du ciel noir, mais doit le traîner avec lui, comme s’il se distinguait de ce qui ne se distingue pas.

그러나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사물 대신 이런 사물을 상상해보자. 이 사물은 자신을 어떤 사물과 구별하려고 하는데, 그 어떤 사물은 자신을 이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하지만, 결국 그 하늘을 같이 끌고 가야만 한다. 이는 마치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것과 같다.

새로운 제안은 이렇다. ‘하지만 다른 사물과 자신을 구별하는 사물 대신, 이런 사물을 상상해 보자. 이 사물은 분간되지만, 그것이 자신과 구별하는 사물은 그것과 분간되지 않는다.‘  표현이 혼동될 수 있으므로, 부호를 써서 구별해 보자. ‘이 사물(A)은 분간되지만, 그것(A)이 자신(A)과 구별하는 사물(B)은  그것(A)과 분간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들뢰즈는 바로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번개는 검은 하늘과 분간되지만, 검은 하늘을 자기 곁에 끌고 다닌다. 마치 번개가 분간되지 않는 것과 분간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검은 하늘이 있어야 번개가 분간될 수 있다. 검은 하늘이 없으면 번개도 인식될 수 없다. 번개는 검은 하늘을 늘 끌고 다지기 때문에 번개와 검은 하늘은 분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와중에 번개는 분간된다. 번개는 분간되지 않는 것(검은 하늘)과 분간된다.

이를 위해 근대 시기의 몇 가지 용어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각각 라틴어 obscura, clara, distincta, confusa이다(여성형 어미지만, 성 구별에 따라 어미를 바꾸면 혼동이 커지므로, 이 글에서는 성과 무관하게 일관되게 표기하겠다). 내가 전에 쓴 글의 한 대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obscura, clara, distincta, confusa를 한글로 옮기는 일은 참 어렵다. 나는 사진기의 비유를 통해 이 말을 설명하고 싶다. 우선 obscura는 어둡고 clara는 맑다(밝다). 일단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대상은 맑은데(clara), 어두우면(obscura) 아예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사진을 찍을 때 초점이 맞는 경우 대상의 요소들은 또렷하게(distincta) 알아볼 수 있는 반면, 초점이 맞지 않은 경우는 뒤섞여(confusa) 있다. 하지만 요소들이 뒤섞여 있더라도 나름 감상할 만한 사진이 나올 수 있는데, 이 경우 ‘완전함(perfectio)’에 이를 정도로 뒤섞여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나는 이 맥락에서 ‘어둡다’, ‘맑다’, ‘또렷하다’, ‘뒤섞여있다’는 말을 사용하겠다. (김재인, 바움가르텐으로 돌아가자_감(感)적 앎의 복권을 위한 한 시도 , 50쪽, 각주 28)

데카르트는 맑고(clara) 또렷한(distincta) 관념[이른바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질 때 최고 단계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맑다(밝다)는 것은 어찌됐건 간에 분간된다는 뜻이고, 또렷하다는 것은 다른 것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뜻이다. 라이프니츠는 맑지만 어두운(confusa) 관념도 낮은 단계지만 인식에 포함된다고 주장했고, 이를 계승한 바움가르텐이 그런 인식이 ‘미학(aesthetica)’의 대상이라고 여겨 미학을 창시했다.

위에서 해석한 구절들에서 들뢰즈가 하려는 시도도 이런 용어들의 맥락과 연관된다. 번개는 밝게 분간된다(clara). 검은 하늘은 어둡다(obscura). 동시에 번개는 검은 하늘과 분간되지 않는다. 즉, 분리 불가능하다. 밝음은 어둠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반면 어둠은 밝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진정한 차이를 설명하려는 맥락에서 ‘번개’의 예를 들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다음 문장으로 가보자.

On dirait que le fond monte à la surface, sans cesser d’être fond.

말하자면 바탕이 바탕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fond과 surface의 관계로 바꿔 묘사된다. 표면 아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바탕’이 아니라 ‘바닥’이다.

한국어 역자는 이 지점에서 《차이와 반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책 1장 1절인데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바탕’은 이렇게 풀이되고 있다. “1. 물체의 뼈대나 틀을 이루는 부분. 2.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 3. 타고난 성질이나 재질또는 체질. 4. 그림글씨(), 무늬 따위를 놓는 물체의 바닥.” 국어사전이 꼭 옳다는 법은 없지만, ‘바탕’을 대체로 이런 용법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바닥’은 이렇게 풀이되고 있다. “1. 평평하게 넓이를 이룬 부분. 2. 물체의 밑부분. 3. 지역이나 장소.” 들뢰즈의 문장에서 표면과 대립하는 것은 바닥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렇게 옮겨야 의미가 살아난다. ‘바닥이 여전히 바닥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표면으로 올라온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바닥은 물론 검은 하늘이다. 번개에 끈덕지게 내재해 있는 검은 하늘.

Il y a du cruel, et même du monstrueux, de part et d’autre, dans cette lutte contre un adversaire insaisissable, où le distingué s’oppose à quelque chose qui ne peut pas s’en distinguer, et qui continue d’épouser ce qui divorce avec lui.

포획할 수 없는 적에 대항하는 이 싸움에서는 잔혹한 면, 심지어는 괴물 같은 면이 양쪽 편에서 다같이 엿보인다. 이 싸움에서 구별되려는 쪽이 대립하고 있는 것, 그것은 본성상 자신을 그 항과 구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이혼하는 자와 자꾸만 결혼하는 자이다.

이어 들뢰즈는 ‘붙잡을 수 없는 적에 맞선 이 싸움’의 양쪽에 있는 ‘잔혹한 면모(cruel)’ 혹은 ‘괴물[기형] 같은 면모(monstreux)’를 말한다. 거기서 ‘분간된 것은 그것과 분간될 수 없는 그 무엇과 대립하며, 그 무엇은 이혼하는  자와 계속 결혼한다.’ 분간된 것(번개)는 그것과 분간될 수 없는 그 무엇(검은 하늘)과 대립하며, 그 무엇은 이혼하는 자(번개)와 계속 결혼한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잔혹한 면모 혹은 괴물 같은 면모가 있는 걸까? 한 쪽은 이혼하려 하는데, 다른 쪽은 계속 결혼하려 하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기 때문이리라. 번개가 달아나면 검은 하늘이 쫓아온다. 그렇다고 번개가 달아나길 멈추기라도 하면 더 이상 ‘둘’이 성립하지 않는다(검은 하늘만 남는다). ‘붙잡을 수 없는 적에 맞선 이 싸움에는, 이쪽과 저쪽에 잔인한 면모, 심지어 괴물 같은 면모가 있다. 이 싸움에서는, 분간된 것은 그것과  분간될 수 없는 그 무엇과 대립하며, 그 무엇은 이혼하는  자와 계속 결혼한다.

La différence est cet état de la détermination comme distinction unilatérale. De la différence, il faut donc dire qu’on la fait, ou qu’elle se fait, comme dans l’expression « faire la différence ». Cette différence, ou LA détermination, est aussi bien la cruauté.

차이는 일방향적인 구별에 해당하는 이런 규정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런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은 여전히 또한 잔혹성이다.

차이는 일방적 구별과도 같은 규정하기의 저 상태이다. 따라서,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에 있듯, 차이에 대해서는 차이를 만든다 혹은 차이가 만들어진다고 말해야 한다.‘ 두 번째 문장의 의미는 분명하다. 차이는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 앞 문장에서 ‘일방적 구별’의 의미는? 앞의 몇 줄에 걸쳐 했던 얘기가 그것이다. 일방적 구별은 검은 하늘을 뒤로 하면서 분간되는 번개, 만들어지는 번개이다. 번개가 만들어지는 것은 검은 하늘에 대해 일방적이다. 검은 하늘은 이혼하는 번개와 계속 결혼하며 따라다닌다. 차이란 그런 성격을 지니며, 그래서 또한 규정하기이다. 규정하기를 통해 차이가 발생한다. ‘이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하기는 잔혹이기도 하다.

문단 뒤쪽에서 언급되겠지만, 여기서의 ‘잔혹’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용어이다. 나중에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에서 자세히 설명하는데, ‘잔혹’은 재현의 잔혹이 아니라 감각의 잔혹, 감각의 폭력성이다. 즉 ‘잔혹’이라고 말할 때, 잔혹한 장면이 등장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감각 즉 신경계에 폭력적으로 작용이 가해진다는 의미이다. 힘이 거칠게 몰아치면, 사건이 발생한다. 차이가 만들어진다.

Les platoniciens disaient que le non-Un se distingue de l’Un, mais non pas l’inverse, puisque l’Un ne se dérobe pas à ce qui s’en dérobe : et à l’autre pôle, la forme se distingue de la matière ou du fond, mais non pas l’inverse, puisque la distinction même est une forme.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일자(者)가 아닌 것은 자신을 일자와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형상은 자신을 질료나 바탕과 구별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 자체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어 플라톤주의의 사례가 등장한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말한다. 비-일자는 일자와 분간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는 일자를 피하는 것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자는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어서, 일자를 피하는 것마저 포함한다. ‘한편 다른 극점에서 형상(形相)은 질료 혹은 바닥과 분간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 자체가 형상이기 때문이다.‘ 형상은 질료 혹은 바닥을 특정하게 구별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 점에서 질료 혹은 바닥은 형식-없음, 구별 없음, 순전한 카오스이다. 거기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형상이고 구별하기이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의 번역 수정을 모아보면 이렇다.

하지만 다른 사물과 자신을 구별하는 사물 대신, 이런 사물을 상상해 보자. 이 사물은 분간되지만, 그것이 자신과 구별하는 사물은 그것과 분간되지 않는다. 가령 번개는 검은 하늘과 분간되지만, 검은 하늘을 자기 곁에 끌고 다닌다. 마치 번개가 분간되지 않는 것과 분간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바닥이 여전히 바닥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표면으로 올라온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붙잡을 수 없는 적에 맞선 이 싸움에는, 이쪽과 저쪽에 잔인한 면모, 심지어 괴물 같은 면모가 있다. 이 싸움에서는, 분간된 것은 그것과  분간될 수 없는 그 무엇과 대립하며, 그 무엇은 이혼하는  자와 계속 결혼한다. 차이는 일방적 구별과도 같은 규정하기의 저 상태이다. 따라서,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에 있듯, 차이에 대해서는 차이를 만든다 혹은 차이가 만들어진다고 말해야 한다. 이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하기는 잔혹이기도 하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말한다. 비-일자는 일자와 분간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자는 일자를 피하는 것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극점에서 형상(形相)은 질료 혹은 바닥과 분간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별 자체가 형상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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