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한국어 판본을 읽기 어려운 이유 (1)

철학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전문성을 요하는지 예를 통해 살피기로 하자. 예제로 삼은 것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1장 첫 문단이다. 이 글 맨 뒤에 해당 부분의 이미지를 프랑스어, 영어, 한국어 순으로 첨부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서지 사항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생략한다. 이를 위해 한국어 판본과 프랑스 원문을 비교하고, 번역을 수정해서 제시할 것이다. 필요할 때는 영어 판본과 나의 해설을 덧붙일 것이다.

내가 이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철학 책 읽기가 얼마나 까다로운 훈련이 필요한지, 아무리 훈련해도 여전히 어려운지, 박사와 교수도 큰 오류(그저 오류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오독)를 범하는지, 등이다. 나아가 철학적 전문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지지와 격려, 나아가 후원까지 해주는 것이 왜 필요한지도 말하고 싶다.

《차이와 반복》 1장은 ‘차이 그 자체'(혹은 ‘즉자적 차이’)로 옮길 수 있다.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들뢰즈가 ‘차이’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첫 대목이기도 하다. ‘차이 그 자체’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파생적인 차이 혹은 대자적 차이(pour autre, for other, 다른 것에 대해)일 것이다. 즉,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이다.

이제 본문을 살필 차례다.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L’indifférence a deux aspects : l’abîme indifférencié, le néant noir, l’animal indéterminé dans lequel tout est dissout — mais aussi le néant blanc, la surface redevenue calme où flottent des déterminations non liées, comme des membres épars, tête sans cou, bras sans épaule, yeux sans front.

한국어 판본: 무차별성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쪽에서 보면 그것은 분화되지 않은 심연, 검은 무(無), 규정되지 않은 동물이다.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다. 다른 한쪽에서 보면 그것은 또한 흰 무(無), 다시 고요해진 표면이다. 여기서는 떨어져나간 사지(四肢), 목 없는 머리, 어깨 없는 팔, 이마 없는 눈 등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규정들이 떠다니고 있다.

첫 단어인 indifférence는 différence(차이)의 부정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 또는 ‘차이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의 의미이다. 나라면 ‘비차이’ 정도로 옮기겠다. 그러면 “L’indifférence a deux aspects”는 ‘비차이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이다.

이어 첫 번째 양상을 열거한다. “l’abîme indifférencié, le néant noir, l’animal indéterminé dans lequel tout est dissout”. 세 가지로 묘사하는데, 첫째는 ‘분화되어 있지 않은’ 즉 ‘미분화된’ ‘심연’, 둘째는 ‘검은 무(無)’, 셋째는 ‘규정되지 않은’ 즉 ‘미규정된’ ‘동물’이다. 관계절 이하는 dans lequel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셋째를 수식한다고 봐야 한다(모두 수식하면 lesquels이어야 함). 따라서 이 대목을 번역하면 ‘미분화된 심연, 검은 무(無),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미규정된 동물.’ 그러면 이렇게 묘사된 첫 번째 양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심연’은 서양 언어에서 ‘바닥이 없음’을 뜻한다. 프랑스어(abîme), 영어(abyss), 독일어(Abgrund), 라틴어(abyssus) 등 언어에서 이 말은 그리스어 abyssos로 거슬러가며, 이 단어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 a와 바닥(bottom)을 뜻하는 byssos가 합쳐진 말이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진다는 뜻으로, 바닥을 전제하는 한자어 심연(深淵)과는 뉘앙스가 많이 다르다(淵은 ‘못’이란 뜻). 이런 뜻의 ‘심연’에 미분화(未分化, indifférencié)가 수식어로 붙는다. 이 단어의 중심에 différence(차이)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in이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라는 점도 유의하자. 그렇게 읽으면, 아무런 차이도 없고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상황이 첫째 표현의 의미이다.

둘째 표현은 ‘검은 무’라고 되어 있다. 프랑스어에는 ‘무’를 뜻하는 단어가 둘이다. 첫째로 들뢰즈가 사용하고 있는 néant이 있고(사르트르의 저서 《존재와 무》의 ‘무’가 바로 이 단어임), 또 하나는 rien이 있다. 후자는 라틴어 res(=thing)에서 유래했다. 그러면 왜 ‘사물’ 혹은 ‘존재’가 ‘무’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진짜로 있는 것에 대한 평가가 수반했다고 추측된다. 말하자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은 진짜 있는 게 아니라 무와 다름없고, 진짜 있는 것은 가령 이 세계를 초월한 곳에 있다는 식. 반면 néant은 ‘있음’ 혹은 ‘존재’와 대립하는 무. 평가보다 기술(description) 차원의 표현이라고 추측된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바는 이렇지만, 이 표현들에 대해 직접 연구한 바는 없음.) 들뢰즈는 나중에도 ‘검은’을 ‘블랙홀’의 검음과 동일시하는데, 모든 빛을 흡수한 상태로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검은 무’는 ‘존재 수준에서조차 없음’,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없음’, ‘전혀 보이지 않는 없음’이다.

셋째 표현은 조금 길다. 먼저 ‘동물’이 나온다. 들뢰즈에게 동물은 자연사가 조프루아 생틸레르(Geoffroy Saint-Hilaire)와 연관된다. 생틸레르에게 ‘동물’은 ‘원형(原型) 생명체’ 혹은 ‘생명체의 원형’을 뜻한다. 모든 개별 생명체는 이것에서 비롯하며, 그래서 훗날 들뢰즈와 과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이를 ‘추상적인 동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물은 두 가지로 수식되는데, 먼저 ‘규정되지 않음’, 즉 ‘특정 생명체로 정해지지 않음, 분화되지 않음’이라는 특징과, 관계절로 진술한 ‘그 안에 모든 것이 녹아 있다’는 특징이 그것이다. 그래서 셋째 표현은 ‘그 안에 모든 것이 녹아 있는 미규정된 동물’이다. 역으로 보면, 언젠가 이 동물에서 모든 것이 파생된다. 마치 신플라톤주의의 ‘일자’와도 같다. 가령 플로티노스에게 만물은 일자의 파생이다.

따라서 ‘비차이’의 첫 번째 양상은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다. ‘미분화된 심연, 검은 무, 그 안에 모든 것이 녹아 있는 미규정된 동물‘.

두 번째 양상은 조금 더 길다. 하이픈 뒤에 ‘~ 같은 양상도 있다'(mais aussi)고 서술된다. 두 개의 표현이 있는데, 첫째는 ‘흰 무’다.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희다.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무엇인지(규정)는 모른다는 의미이다.

둘째 표현의 중심에는 ‘다시 고요해진 표면’이 있다. 이를 수식하는 표현이 ‘거기에서 [서로] 연계되지 않은 규정들이 떠다니고 있다’이다. 이어서, ‘이는 마치 흩어져 있는 사지 사지(四肢), 목 없는 머리, 어깨 없는 팔, 이마 없는 눈과도 같다.’ 이 표현은 다시 고요해지기 전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먼저 온전한 유기체가 있었고, 그 후에 그것의 ‘유기적 조직(organisation)’이 해체되는 시기가 있었고, 그 다음 고요함을 되찾아 유기체가 해체된 상태, 아르토가 말한 ‘기관 없는 몸(corps sans organes)’이다. 이를 모으면, ‘마치 흩어져 있는 사지 사지(四肢), 목 없는 머리, 어깨 없는 팔, 이마 없는 두 눈처럼 [서로] 연계되지 않은 규정들이 떠다니고 있는 다시 고요해진 표면‘.

이어서 보자.

L’indéterminé est tout à fait indifférent, mais des déterminations flottantes ne le sont pas moins les unes par rapport aux autres.

미규정자는 [분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지만 떠다니는 규정들도 [서로 무관심하다는 의미에서] 그에 못지않게 서로에 대해 차이가 없다.

L’indéterminé는 영어로는 The indeterminate이라 옮겼는데 더 정확하게 했다면 The indeterminated겠다. 그러니까 한국어로는 ‘규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 문장의 앞 대목은 ‘규정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규정해야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뒤에서 이 점이 더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문장의 뒷 대목은 ‘떠다니는 규정들도 그에 못지않게 서로 차이가 없다'(‘떠다닌다’는 표현은 앞 문장에 나온 바 있음)이다. 떠다니는 규정들은 서로 연계를 상실했기 때문에, 관련성 자체를 탈각했기 때문에, 차이건 그 무엇이건 어떤 관계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아무런 공통성(common)도 없으니, 전적인 ‘무관계'(a-rapport) 혹은 ‘비관계'(non-rapport) 상태다. 번역을 모으면 이렇게 된다. ‘규정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떠다니는 규정들도 그에 못지않게 서로 차이가 없다.

이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앞의 두 양상이 보완된다. 첫 번째 양상은 ‘규정되지 않은 것’과 관련되고, 두 번째 양상은 ‘떠다니는 규정들’과 관련된다. 두 경우 모두 ‘비차이’ 혹은 ‘차이 없음’이지만, 말 그대로 양상이 다르다. 전자에는 아예 규정이 없고, 후자에는 서로 관계를 맺니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파편처럼 떠다니는 규정들이 있다.

이제 ‘차이가 무엇인지?’ 질문이 나온다.

La différence est-elle intermédiaire entre ces deux extrêmes? Ou bien n’est-elle pas le seul extrême, le seul moment de la présence et de la précision?

차이는 이 두 극단의 중간자에 해당하는 것일까? 혹은 차이는 유일한 극단, 현전(前)과 정확성의 유일한 계기가 아닐까?

첫 번째 가능성. ‘차이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까?‘ 우선 두 극단이란 아예 규정이 없는 상태와 규정들이 떠다니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intermédiaire는 ‘중간자’가 아니라 양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걸 가리킨다. 두 번째 가능성. ‘아니면, 차이는 유일한 극단에만, 현전과 정확함이라는 유일한 계기에만 있는 건 아닐까?‘ ou bien은 양자택일 상황을 가리킨다. ~ 아니면 ~다. 여기서 말하는 ‘유일한 극단’, ‘유일한 계기’는 무엇을 지칭할까? 앞에서 언급한 두 극단이 아닌 ‘다른’ 극단이다. 이 극단은 ‘현전’과 ‘정확함’의 극단으로, 이 두 가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에서 언급된다.

이어서 차이가 정의된다.

La différence est cet état dans lequel on peut parler de LA détermination. La différence « entre » deux choses est seulement empirique, et les déterminations correspondantes, extrinsèques.

차이는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상태이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는 단지 경험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통의 규정들은 외생적 규정들에 불과하다.

차이를 정의하는 대목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우선 정관사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LA détermination이다. 영어는 의역해서 determination as such(직역했다면 THE  determination), 독일어는 직역해서 DER Bestimmung이다. 한국어가 강조체를 붙여 ‘본래적 규정’이라 한 것도 나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관건은 détermination을 명사로 보느냐 동사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동사로 본다는 말은 ‘규정’이라고 모호하게 가기보다 ‘규정하기’라고 명확하게 옮겨야 옳다는 의미이다. 내 생각이 옳다면 독일어는 DER Bestimmen이 되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로 ‘규정하기 자체‘로 옮기면 좋겠다. 관계절은 ‘그 안에서 LA détermination이라는 것이 얘기될 수 있는’ 정도의 뜻이다. ‘그 안’이라 함은 ‘특정한 상태’이다. 이걸 모으면, ‘차이란 그 안에서 규정하기 자체라는 것이 얘기될 수 있는 저 상태이다.’

내가 옮긴 문장의 가장 큰 특징은 ‘차이’를 ‘작용’ 혹은 ‘동사’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차이는 ‘정태적’이지 않다. 이 점은 다음 문장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정태적 차이, 즉 이미 있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래적이지 않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는 경험적일 뿐이다.’ 여기서 ‘경험적’이라는 표현은 차이 발생에 사후적(事後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다. 이어서 LA détermination에 대립되는 les déterminations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복수 정관사 les가 이탤릭으로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의 ‘규정들’은 물론 ‘명사’이며, 발생 작용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다. 그래서 이 대목을 이렇게 옮기면 적합하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 혹은 경험적 차이에] 대응하는 각개 규정들은 외래적이다.

다음 문장은 전혀 다른 상황에 대한 ‘상상’으로 시작하며, 들뢰즈 자신이 염두에 둔 ‘차이’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거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금까지 새로 옮긴 문장들을 모으면 아래와 같다.

비차이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미분화된 심연, 검은 무, 그 안에 모든 것이 녹아 있는 미규정된 동물. [다른 한편] 마치 흩어져 있는 사지(四肢), 목 없는 머리, 어깨 없는 팔, 이마 없는 두 눈처럼 [서로] 연계되지 않은 규정들이 떠다니고 있는 다시 고요해진 표면. 규정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떠다니는 규정들도 그에 못지않게 서로 차이가 없다. 차이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까? 아니면, 차이는 유일한 극단에만, 현전과 정확함이라는 유일한 계기에만 있는 건 아닐까? 차이란 그 안에서 규정하기 자체라는 것이 얘기될 수 있는 저 상태이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 혹은 경험적 차이에] 대응하는 각개 규정들은 외래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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