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한국어 판본을 읽기 어려운 이유 (3)

1편2편에 이은 글입니다.

A vrai dire, ce sont toutes les formes qui se dissipent, quand elles se réfléchissent dans ce fond qui remonte. Il a cessé lui-même d’être le pur indéterminé qui reste au fond, mais les formes aussi cessent d’être des déterminations coexistantes ou complémentaires. Le fond qui remonte n’est plus au fond, mais acquiert une existence autonome ; la forme qui se réfléchit dans ce fond n’est plus une forme, mais une ligne abstraite agissant directement sur l’âme.

사실 형상들은 재상승하는 이 바탕 안에 반영될 때 모조리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 바탕은 스스로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순수한 미규정자이기를 그쳤다. 하지만 형상들도 상호공존적이거나 상보적인 규정들로 머물러 있기를 그친다. 재상승하는 바탕은 더 이상 밑바닥에 남아 있지 않고 자율적인 실존을 얻는다. 이 바탕에 반영되는 형상은 더 이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어떤 추상적인 선이다.

이제 형상과 바닥이 본래의 성격을 바꾸기 시작한다. ‘실제로, 모든 형상들은 다시 올라오는 이 바닥에 비치면 흩어져버린다.‘ 앞 문장에서 형상이 구별한다고 했다면, 이제 바닥은 다시 형상을 흩어버린다. 형상이 수행한 구별이 무효가 된다. 바닥이 힘을 발휘했다. ‘바닥은 이제 바닥에 남아 있는 순수한 미규정이기를 그쳤다. 하지만 형상들도 [순수한 미규정과] 공존하는 혹은 [순수한 미규정을] 보완하는 규정들이길 그친다.‘ 바닥이 힘을 발휘하자, 바닥 자신과 형상도 성격이 바뀐다.

다시 올라오는 바닥은 더 이상 바닥에 없고, 자율적 실존을 획득한다. 이 바닥에 비친 형상은 이제는 형상이 아니라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다.’ 바닥은 자율적으로 실존하게 되었고, 여기에 형상이 비치면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 된다. 바닥은 어떻게 해서 다시 올라왔으며, 어떻게 자율적 실존을 획득했을까?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형상’과 어떻게 다른가?

Quand le fond monte à la surface, le visage humain se décompose dans ce miroir où l’indéterminé comme les déterminations viennent se confondre dans une seule détermination qui « fait » la différence. Pour produire un monstre, c’est une pauvre recette d’entasser des déterminations étéroclites ou de surdéterminer l’animal. Il vaut mieux faire monter le fond, et dissoudre la forme.

바탕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인간의 얼굴은 분해된다. 미규정자가 보통의 규정들과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규정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 — 안으로 혼융(混融)되어가는 그런 거울 안에서 분해되는 것이다.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이상야릇한 규정들을 집적하거나 동물을 중층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바탕을 상승하도록 만들고 형상을 와해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바닥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하기 속에서 규정들과 미규정 둘 모두가 뒤섞이게 되는 이 거울 안에서, 인간의 얼굴은 해체된다.‘ 우선 ‘인간의 얼굴’은 형상이다. 이 얼굴은 바닥이 표면에 올라옴으로써 해체된다. 바닥이 표면으로 올라온다는 것은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하기’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앞에서도 ‘차이란 그 안에서 규정하기 자체라는 것이 얘기될 수 있는 저 상태’라고 언급한 바 있다. 차이 만들기는 기존의 ‘형상’과 ‘바닥’을 뒤섞고 해체할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앞에서 그것은 ‘괴물/기형’을 만들며, ‘잔혹’이고 ‘폭력’이라고 얘기되었다.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 이상한 규정들을 쌓거나 동물을 겹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난한 방책이다.‘ 괴물을 만드는 통상적인 방법은 잘못되었다. 엉뚱한 규정들을 쌓는다고 해서, 이 동물 저 동물을 짜깁기한다고 해서, 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이는 것이 더 낫다.‘ 진정한 괴물은 형상을 녹여야 발생한다. 앞에서 말했듯, 형상은 바닥이 올라올 때, 차이를 만들 때, 규정하기가 실행될 때, 비로소 해체되고 녹는다.

Goya procédait par l’aquatinte et l’eau-forte, la grisaille  de l’une et la rigueur de l’autre. Odilon Redon, par le clair-obscur et la ligne abstraite. En renonçant au modelé, c’est-à-dire au symbole plastique de la forme, la ligne abstraite acquiert toute sa force, et participe au fond d’autant plus violemment qu’elle s’en distingue sans qu’il se distingue d’elle.(1)

고야의 기법은 아쿠아틴트[식각 요판(蝕刻凹版)]와 에칭[부식 동판], 전자의 그리자이유[단색 명암]와 후자의 엄밀함에 있다. 오딜롱 르동의 기법은 명암과 추상적인 선에 있다. 모델을 포기할 때, 다시 말해서 형상에 대한 조형적인 상징을 포기할 때 추상적인 선은 최상의 힘을 획득하고 또한 난폭하게 바탕에 참여한다. 추상적인 선은 자신과 결코 떨어지는 일이 없는 바탕에 대해 구별짓기를 행할수록 그만큼 점점 더 폭력적으로 바탕에 참여한다.

앞에 나온 표현들이 전거를 찾기 시작한다. ‘고야는 애쿼틴트와 에칭, 전자의 단색화와 후자의 엄밀함을 통해 작업했다.‘ 동판을 산에 담가 부식시키는 동판화 중에서 애쿼틴트는 면을 표현하는 기법이고 에칭은 선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ous)'(1799)가 사례이다(아래 그림). 배경과 책상 옆면은 애쿼틴트, 형상들은 에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ous)'(1799)

오딜롱 르동은 명암법과 추상적인 선을 통해 작업했다.‘ 명암법은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인데, 프랑스어로 ‘clair-obscur’, 영어로 ‘light-dark’로 각각 옮긴다. 여기서 프랑스어 표현이 흥미롭다. 앞에서 보았던 clara와 obscura가 결합해 회화 기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밝음-어두움’의 결합은 인식론보다 미학에서 끌어왔다고 보인다. 아래 그림은 르동의 작품 중 하나인 ‘알(L’oeuf)'(1885)이다.

오딜롱 르동, ‘알(L’oeuf)'(1885)

모델을, 즉 형상의 조형적 상징을 포기하면서, 추상적인 선은 자신의 모든 힘을 획득하며, 바닥이 추상적인 선과 분간되지 않으면서 추상적인 선이 바닥과 분간될수록 추상적인 선은 더 세차게 바닥에 참여한다.‘ 이 문장에서 ‘모델’이라 함은 플라톤의 ‘파라데이그마(paradeigma)’의 현대식 번역어이기도 하다. 파라데이그마는 ‘전범(典範)’ 혹은 ‘틀’이라는 뜻이다. 모델은 플라톤 철학의 ‘형상’ 혹은 ‘이데아’의 ‘조형적 상징’, 즉 ‘미술적 상징’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위의 그림 ‘알’을 보자. 여기에 등장한 형상(形象, figure)은 형상(形相, forme)이 아니다. 그것은 형상(形相) 또는 준거를 포기했으며,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다. 그것은 검은 하늘에서 솟아오른 번개와도 같다. 이 문장에서 ‘세차게’는 ‘violemment’ 즉 ‘폭력적으로’라고 어원을 살려 번역할 수 있다. 폭력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마지막 문장 다음에 붙은 르동의 일기 각주는 번역을 일단 생략한다.)

이상의 번역을 모으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모든 형상들은 다시 올라오는 이 바닥에 비치면 흩어져버린다. 바닥은 이제 바닥에 남아 있는 순수한 미규정이기를 그쳤다. 하지만 형상들도 [순수한 미규정과] 공존하는 혹은 [순수한 미규정을] 보완하는 규정들이길 그친다. 다시 올라오는 바닥은 더 이상 바닥에 없고, 자율적 실존을 획득한다. 이 바닥에 비친 형상은 이제는 형상이 아니라 영혼에 직접 작용하는 추상적인 선이다. 바닥이 표면으로 올라올 때,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규정하기 속에서 규정들과 미규정 둘 모두가 뒤섞이게 되는 이 거울 안에서, 인간의 얼굴은 해체된다. 괴물을 생산하기 위해 이상한 규정들을 쌓거나 동물을 겹으로 규정하는 것은 가난한 방책이다. 바닥을 올라오게 하고 형상을 녹이는 것이 더 낫다. 고야는 애쿼틴트와 에칭, 전자의 단색화와 후자의 엄밀함을 통해 작업했다. 오딜롱 르동은 명암법과 추상적인 선을 통해 작업했다. 모델을, 즉 형상의 조형적 상징을 포기하면서, 추상적인 선은 자신의 모든 힘을 획득하며, 바닥이 추상적인 선과 분간되지 않으면서 추상적인 선이 바닥과 분간될수록 추상적인 선은 더 세차게 바닥에 참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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