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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예술과 문화 "친절한 금자씨" 마음에 와 닿았던 영화평.

신승원(펌) 2005.09.09 02:41 조회 수 : 10262 추천:171

----- 누가 쓴 건진 확인 못했음.


친절한금자씨-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이 찾아낸 박찬욱식 변주

*이 글은 다수의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 바그너의 음악과 박찬욱 영화

바그너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의 사유에는 게르만 전승이 깔려있고 낭만주의로 덧씌워진 무대연출에 비중을 뒀다는 점에서 여느 독일의 음악가들과 궤를 달리한다. 영화가 없던 19세기의 블록버스터는 바그너의 그랜드 오페라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나치즘과 선동정치의 준거가 되고 히틀러에게 영감과 불씨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독일국민에게 껄끄러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한 때 바그너를 동경했다가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니체 역시도 바그너의 음악 뒤에 숨겨진 선동과 지나친 인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곤 했다. 무엇보다 바그너에게서 문제 삼았던 것은 ‘데카당스의 문제’였다. 즉 삶의 요소가 줄어들고 거대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헌신과 잔인함과 인위적인 순결함이 합치되는 현상에서 삶과 사랑의 에너지를 누르고 이념과 순결을 따라갔다는 점이다.

나는 박찬욱 영화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보았다. 비록 바그너와 같은 이념의 추구는 없을지라도 의도하지 않은 컬트화가 낳은 세몰이식의 마니아를 양산했다는 점은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그너의 음악은 음악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되고 도구가 된다. 동시에 작은 요소들로 디테일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나다. 극소 공간 안에 감각과 그림자, 색, 스러져가는 빛의 은밀함 등을 표현하는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에 있어 바그너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찬욱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소도구를 이용한 절묘한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디테일한 묘사와 테이크 간 연결기법은 정점에 오른 느낌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따라올 자가 없다는 자신감의 과잉은 종종 모든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는 바그너의 음악이 종결부 없이 무한선율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박찬욱 영화와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고 모티브들이 한데 섞이는 방식을 말한다. 전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는데 필요한 분절 없이 작은 단위들이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데카당스 양식의 특성이다. 박찬욱은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바그너의 음악양식과 닮아 있다.

바그너의 음악은 언뜻 보면 왕의 진수성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리한 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하는 경제적인 만찬일 뿐이다. 최소 비용으로 제후의 밥상을 모방하는 재주, 그것은 몇 번은 배가 부르겠으나 과시적인 메뉴는 식상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박찬욱의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자기복제를 피하고 관습과 형식미의 절제를 통한 적절한 변주만이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한국영화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제, 열광하는 지지자를 향해서 자신감의 과잉을 표출하고 있는 영화, 독특한 변주방식을 도입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나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소재인 ‘유괴와 납치’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그리고 ‘복수’와 ‘복수극’을 통해서 감독이 추구하는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점검할 것이고, 영화 속 변형된 남성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폭력이 준동하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불신과 냉소주의로 가득 찬 박찬욱의 3부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림은 아쉽지만 앞으로 그의 영화적 행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프닝 타이틀

영화가 시작되면 비발디의 칸탄타가 흐르면서 순백 화면에 가지와 잎 새가 뻗어나면서 오프닝 타이틀이 보여 진다. 욕망의 확대 재생산을 은유하는 동시에 피로 상징되는 시럽의 첨가로 물들여지는 붉은 색감을 통해서 복수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이 시퀀스를 시작으로 13년을 기다려온 복수극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려는 순간이다. 살결로 상징되는 흰색 생크림과 핏빛 딸기 무스의 조합은 장미문양을 그려내면서 순결한 영혼 속에 숨어있는 마성의 발현을 탐색하고 있다. 그리고 천사 혹은 마녀 이금자가 경주여자교도소의 철문을 열고 나온다. 마녀이며 천사이고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던 여자, 이금자의 복수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유괴 혹은 납치에 스며든 자본주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재는 ‘유괴와 납치’이다. 먼저 그리스 신화를 잠시 살펴보자. 추수의 여신 데메테르에게는 하나 뿐인 딸인 봄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있었다. 명부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칠흑처럼 검은 수레에 태워 지하세계로 데려간다. 데메테르가 아흐레 동안 슬피 울다가 태양을 만나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고 제우스의 도움을 빌어 간신히 딸을 지상으로 데려왔다. 이미 명부의 흙을 먹은 그녀는 1년 중 4개월은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 어둠을 이기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녀는 사람들에게 경외감 자체였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이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메타포의 시작은 유괴와 납치에서 비롯된다.

<친절한 금자씨>는 개인적 원한을 복수의 파노라마 속에서 펼쳐내는 영화이다. 그 사건의 발단은 유괴이다. 이금자는 박원모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으로 13년을 복역한다. 복수 3부작 속 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 복수나 이기적 욕망을 유괴와 납치 감금을 통해서 해소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마다 등장하는 유괴와 납치는 양태와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 <복수는 나의 것>속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원초적 불신과 악순환의 고리를 재촉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자신의 신장을 강탈당해 누나의 수술이 막연해진 노동자 빈곤계층이 유괴를 통해 수술비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은 영미의 입을 통해서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의 자기합리화를 가능케 한다. 이들의 행위 자체는 용서할 수 없으나 심정적으로 동정할 만한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유괴가 가져오는 공멸의 기운 속에서 양가성(兩價性)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류와 영미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반면에 <올드 보이>속 오대수의 납치 감금은 이우진의 경제력이 사적인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력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유괴의 동기가 되지만, <올드 보이>에 이르면 납치 감금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유괴는 애초에 백 선생이 아이들을 싫어했다는 금자의 설명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위한 동기 말고는 어떠한 이유로도 해석되기 힘들다. 이는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읽혀져야 하며, 배금주의의 병폐가 만연된 당대의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결국 <친절한 금자씨>속 유괴는 2편의 전작 중간쯤에 놓이는 안전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금자의 복수극을 통해서 무사히 안착하며 백 선생 납치 역시 ‘사필귀정’이라는 단어 안에서 어떠한 제제도 받지 않고 암묵적 동조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사회적 구조의 불신과 냉소주의

박찬욱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반사회 반인류적 대상의 공멸을 통한 사회냉소주의와 인간혐오주의를 내보여왔다. 그것은 차가운 냉소주의적 기류 속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불건전한 논리를 머리로만 인식하면서,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목도하게 만든다. 또한 B급 영화정신으로 무장된 그의 영화적 사유와 평론가 시절부터 보여준 주류영화계에 대한 미온적 태도와도 무관치 않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갈등을 드러냈고 장기밀매와 동진의 딸을 유괴하는 과정 속에서 거짓과 가식으로 얼룩진 온정주의가 아닌 진심이 담긴 온정주의적 인간의 실종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온정주의,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했던 감독이었다.

금자는 자신의 출소를 기다리던 전도사가 건네는 두부를 거절하며 냉소 가득한 톤으로 조롱한다. “너나 잘하세요.”라고. 이어서 우리는 전도사가 금자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되며 그 이면에 남성적 욕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종교를 빙자한 성직자의 성적욕망은 금자의 개종발언으로 잠시 수그러들지만 물질에의 탐욕으로 변질되면서 금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된다. 금자의 체포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담당형사는 미진한 부분을 포착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하게 된다. 결국 이 형사는 금자의 복수극에 동참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금자가 출소 후 허름한 미용실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복수를 준비하면서도 거룩한 얼굴로 참회기도를 하는 금자의 모습과 전도사의 왜곡된 욕망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인간의 이율배반적 본질과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감독은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성직자와 공적의무를 상실한 형사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법과 규범에 대한 조롱을 한껏 퍼붓고 있음이다.


복수 1. - 감사와 은덕의 Bella Vendetta

르네상스적 복수의 시각은 고민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행할 것이냐, 신의 섭리에 맡기고 울분을 참고 견딜 것이냐’의 고민이다. 근세가 도래하고 법과 규범이 등장할 때 까지는 그 역할은 제사장이나 성직자들이 대리해왔다. 복수의 심판주체가 인간이냐 신이냐의 문제는 결말의 확연한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이 심판하고 복수할 때 그것은 살인을 불러오며 그것으로 인해 자신 역시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복수의 연쇄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장기강탈과 유괴가 불러온 복수의 순환 고리는 인간의 복수가 갖는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복수란 대등한 관계에서 행해지는 사회적 갈등의 해소라는 차원에서 보면 현실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소극적일 수록 죽어서 복수하는 형태, 무속의 힘을 빌린 복수극은 흔히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올드 보이>에서는 심령술사를 동원해 오대수의 기억을 조작하는 복수의 단편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오랜 관습으로 자리한 복수방식은 <친절한 금자씨>를 분석하는데 일조한다. 금자는 13년 전 사건으로 13년간 복역했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동조자를 하나 둘 씩 만들면서 자신의 복수를 치밀하게 기획한다. 그녀가 간증하거나, 정상인은 이해하기 힘든 친절함으로 재소자를 감화시키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까지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다. 자기가 당한 부당함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 록 자기가 받은 은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금자의 대극적 이미지로 뚱뚱한 죄수 마녀를 배치함으로써 금자의 조력자에게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창녀와 꽃뱀과 은행 강도였던 이들이 하나 둘씩 금자의 복수극에 참여하는 것은 금자의 친절함과 대비되는 마녀의 폭력적 행동에 대한 반발심리이자 금자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한 금자의 친절과 베풂의 나날은 이탈리아인들의 복수 방식인 ‘벨라 벤데타 (Bella Vendetta)’를 연상시킨다.

금자라면 자신의 출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복수를 오래도록 미루는 이유는 좋은 복수(벨라 벤데타)란 오랫동안 기다려온 모든 상황들이 맞아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욕의 정당화를 위해선 이에 상응하는 감사와 미덕이 있음을 입증해야하는 영화적 스토리의 개연성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과연 복수 3부작의 완결판으로 적절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수 2. - <올드 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의 동질성

<친절한 금자씨>는 의외로 속임수가 많이 들어있는 영화이다. 그 속임수와 진의를 파악하려면 이 영화가 드러내는 기표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기의부터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이 영화가 복수극인가?’라는 것이다. 복수극의 역사는 길다. 그러면 우선 전통적인 복수극의 기초 문법부터 짚어 보겠다. 전통적인 복수극은 인생을 결정지을 만큼 매우 소중한 사람들, 예를 들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나 누이 등의 혈육, 또는 연인을 잃은 주인공이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견디며 재주를 연마한 끝에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을 찾아가 파멸시키고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근래 개봉된 <킬 빌>에 이르기까지 복수를 표방한 영화들 속에는 이러한 복수의 서사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일단 감독의 전작인 <올드 보이>의 복수서사부터 살펴보자.

<올드 보이>에서 서사의 대부분은 오대수가 자신을 15년 간 감금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찾아 헤매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므로 일종의 복수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누이를 잃은 이우진이 누이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려 누이를 자살로 이끈 장본인을 찾아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도 전통적인 복수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게다가 박찬욱 감독은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부터 ‘복수’가 매우 흥미로운 모티브임을 밝혀왔고 <올드 보이>는 많은 부분에서 전작을 연상시키곤 한다. <올드 보이>가 진정 전통적인 복수극이라면 마지막에 이우진이 오대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오대수가 이우진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복수의 마지막 문턱에서 오대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자르고, 누이를 잃은 동생은 그러한 오대수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를 죽인다. 여기에 이르러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게임이 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모래시계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마법사의 수중에 있는 자신의 연인인 공주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주는 마법사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지하 감옥으로 잠입해 들어가 그녀가 갇혀 있는 성의 맨 꼭대기까지 가려 한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성 꼭대기로부터 두세 단계 아래에 가면 왕자는 거울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그 거울을 통과하면 왕자의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에 힘센 장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나면 그 그림자가 왕자를 막아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왕자가 그 그림자를 찌르면 찌를수록 왕자 자신의 에너지가 줄어들어 간다. 결국 그림자가 죽으면 왕자도 따라서 쓰러진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왕자는 이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찌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림자를 만나자마자 칼집에 조용히 집어넣고 그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는다. 그러면 그림자와 왕자는 다시 합체되며 그 단계는 저절로 극복된다. 마지막은 생쥐의 도움으로 공주가 감금된 방을 열고 그녀와 상봉하는 것뿐이다.

이 게임은 단순한 격투기 게임에서 벗어나는 설정을 통해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기발한 재미를 준다. <올드 보이>도 이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거울을 마주보고 서 있는 형상과 같이 이우진과 오대수를 대비시킴으로써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지막에 이우진이 오대수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이우진과 오대수가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이 이미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는 다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음이다.

금자는 백 선생을 응징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한다. 따라서 백 선생에 대한 응징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응징과 상통한다. 다만, <올드 보이>의 이우진이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금자는 타자의 손을 빌려 행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영화가 함유한 구원의 문제와 연관지어져야 한다. 백 선생을 폐교에 가두는 것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며 백 선생을 죽이는 것은 금자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금자의 행위는 원모를 죽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기의 죄책감에 대한 일종의 마조히즘적 복수로 수렴된다. 또한 마조히즘적 복수는 지독한 자기애의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백 선생은 원수이자 금자 자신이다. 즉, 구원과 이해받고 싶었기에 백 선생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운명으로 끌어들여 복수를 실현함과 동시에,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올드 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드러난 복수의 서사는 동격이어로 받아들여야 맞다. 복수이면서 복수일 수 없는 훼손당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희구는 상처의 치유와 구원을 통해서 만 완성될 수 있다.


힘의 구도 재편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이 전작들에서 보여준 남성위주의 복수극에서 탈피해 여성의 복수극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이미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에서의 남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이었지만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로만 그려졌다. 류의 누나, 동진의 딸, 우진의 누나와 대수의 딸이 모두 피해자인 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근친의 집착을 통한 금기시된 사랑을 내포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벽을 넘어서려는 위험한 시도를 병행해왔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금자에 비해 그는 너무도 가냘프고 여성적인 모습의 남성과 만난다. 그것은 박찬욱 영화 속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던 남성의 모습이다. 비록 비열하고 내면적 열등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을지언정 감독의 영화 속 남성은 마초의 광포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폭력의 과잉으로 얼룩진 남성성의 허영을 조롱하는 도구로 여성성과 남성성의 역할변경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왜소하고 허약한 남성인 제과점 점원 근식을 상징적 인물로 설정하면서 시작된다.

포장마차에서 금자에게 말하던 근식의 결혼관은 “가능하면 일찍 가정을 꾸리고 싶고” “존경할 만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대체로 여성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남성인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근식은 금자와의 섹스 장면에서도 여전히 여성역할에 머물고 있다.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근식 앞에 걸터앉은 금자는 말한다. “좋았어? 난 좋았는데” 그리고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영미가 류에게 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다고 백 선생이 말했어.” 열쇠를 넘기고 집을 나가는 금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맹목적 섹스를 끝낸 후 갈 길로 가는 보편적 남성의 행동과 일치한다. 이 외에도 잘린 손가락을 집지 못한 원모의 아버지나, 금자를 만나고서야 확신을 갖고 제과점을 차린 사장이나 모두 나약한 남성시대의 표상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금자의 복수극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조력자가 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복수의 과정을 통한 여성성의 회복, 복수의 결말로 인한 모성의 회복까지로 영역을 확장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남성성의 거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총은 남성성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 옛날 거친 서부를 개척하던 카우보이들을 보호해주던 무기, 현대에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가장이 벽장 위 선반에 숨겨놓던 안전장치가 총이었다.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총이 금자의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의 총은 백 선생과 함께 영원히 유폐된다. 그것은 남성성의 매장이다.

출소 후 원모의 집에 찾아가 속죄하던 금자는 자신의 왼손 약지를 절단한다. 그녀의 행동은 속죄라기보다는 복수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이고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다. 또한 거세된 남근을 상징하기도 한다. 복수의 대상인 백 선생은 남성의 과잉과 허욕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식사 도중 아내와의 섹스 후 그 앞으로 쏠린 음식은 그의 욕망의 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료죄수를 괴롭히던 마녀의 변태적 성욕 역시 남성성이 대입된 기형적 인간상을 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여성 복수극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성캐릭터가 갖는 부족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 다수의 조력자를 동원했다는 점과는 달리, 그녀들의 역할 역시 금자의 복수극의 액세서리(공범) 수준에 머물며 전체적인 여성캐릭터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이제, 금자는 자신의 딸을 찾아야 하고, 백 선생에 대한 복수도 이루려하기 직전이다. 그녀는 치밀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며 결국 백 선생을 잡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녀의 복수극을 보는 동안 개인적 복수가 낳은 사회적 폭력의 실체를 통해서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과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 지던 공멸하는 인간군상의 모습과도 일치하며 <올드 보이> 속 이우진이 규정한 오대수의 살 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폭력의 준동과 이상적 복수의 완성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장기 판매업자들은 류를 속여 그 누이를 죽게 했기에 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류에게 신장을 먹힌다. 류와 영미는 유괴를 했기에 아이의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아비는 노동자를 학대한 자본가이기에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한다. 박찬욱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미시적으로는 무죄지만 거시적으로는 모두 유죄이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유죄가 될 수밖에 없다. <올드 보이>에서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나,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은 인간이 불가항력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박찬욱 영화 속 사회적 불신과 냉소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박찬욱은 그의 영화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인물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 숨쉰다. 그리고 그 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얽히고 충돌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 선의에서 비롯된 악행도 결과적으로 죄악이 될 수 있으며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올드 보이>의 오대수처럼 ‘악행의 자서전’을 대여섯 권 쓰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결국 완강하게도, 그리고 냉정하게도 박찬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만다.

금자는 백 선생을 어느 폐교에 가둔다. 그리고는 법과 인간의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유괴아동의 가족들을 불러내 동참하게 함으로써 성대한 복수의식을 치른다. 개인의 복수가 공공의 복수로, 사적 감정이 공적응징으로, 죄인에게 조차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존엄성이 짐승만도 못한 놈의 살 권리의 실종으로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준동하고 있다.

감독은 피해자 가족의 잔인한 응징이 연상되는 장면마다 시점의 전환을 통해 잔혹성의 논란을 피해가는 영리한 연출을 보여준다. 백 선생에 대한 유괴아동 가족들의 복수는 가해 장면의 직접적 표현을 배제한 채 결과만을 보여주며, 그 많은 응징을 당하고도 마지막 까지 백 선생을 살아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 이유는 영화적 시점의 차이 때문이다. 즉, 응징을 당하는 백 선생의 시점이 아닌, 가해자의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원한이 너무도 크기에 백 선생이 받는 고통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수밖에 없으며, 마지막 응징자가 들어갈 때 까지도 그의 목숨은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괴아동의 가족이 하나 둘씩 들어가 사적인 복수를 거행하는 동안 그들 손에 들려진 무기는 각양각색이지만, 이 부분에서도 응징도구를 통한 힘의 논리가 포착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칼을 들고 있던데 반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부부에게는 가장 큰 무기(도끼)를 들려줬고, 상대적으로 가장 부유해 보이지만 노쇠한 할머니에게는 작은 가위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백 선생을 절멸시키고 직접사인을 제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할머니의 가위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자본가 또는 부르주아의 모습에 나약한 육체를 가진 노파에게 최종응징을 허락한다는 점이다. 백 선생은 아이들의 몸값으로 받은 돈을 저축했고, 그것을 가족들에게 되돌려줄 것이라고 금자는 말한다. 백 선생은 전형적인 상류층의 모습이다. 따라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획득한 부의 종말은 같은 부유층인 할머니의 손에서 결말지어 져야 마땅하다. 빈곤층의 열등감과 분노가 과잉 표출된 응징의 결과로 백 선생이 죽었다면 아마도 이 장면은 참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감독은 자본가의 손으로 절멸시키는 자본가의 종말을 목도하게 하면서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사회적 불신과 B급 영화의 정신을 합일 시키고 있음이다.

참혹한 복수극의 종료 후 과자점에서의 자축연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서 감독은 다시 한번 인간의 욕망과 잔인성을 각인시키게 된다. 그들은 금자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그 맛에 탄복한다. 금자가 재소자 시절 한정된 재료로 만든 케이크를 맛보고 놀라던 제과점 사장의 느낌과는 다른 묘한 표정들이 드러나고 있음이다. 그 재료가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복수에 기꺼이 동참했고 공범이 돼버렸다. 모호한 공기가 흐를 때 즈음 감독은, 잔혹한 복수극에 동참하고도 유괴협상금을 돌려받기 위해 계좌번호를 적고, 태연하게 프랑스인의 유머를 논하며 눈 내리는 감상주의에 젖어있는 대중의 허위와 가식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나 금자가 행하는 복수극에 피해자의 가족을 동참시켰다는 점은 못내 꺼림직 하다. 그것은 인민재판의 축소판 같기도 하거니와 사회적 규범으로 이해되기 힘든 감정의 과잉이 엿보인다. 게다가 아이들의 절규하는 최후를 보여줌으로써 자칫 선정주의로 오인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범죄의 희화를 통한 대리복수극은 금자의 확인사살로 끝을 맺지만 감독은 여전히 할 말이 많이 남아있어 보인다.


금자씨 또는 이영애

이영애는 CF에서 보여준 청순한 순백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복수의 화신과 천사의 미소를 머금은 사악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메소우드 연기는 금자의 어눌한 발성과 함축된 대사를 통해서 완벽하게 빛을 발하며, 말이 많아 곤욕을 치른 오대수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무표정한 모습에서 뿜어내던 복수서린 광기는 눈물 글썽이며 백 선생을 응징하던 장면에서 정점에 달한다. <25시>의 엔딩 신에서 카메라를 보고 웃던 안소니 퀸의 만감이 교차하던 표정을 기억한다면, 백 선생을 앞에 둔 금자의 표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마녀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그녀 금자였음에 틀림없다.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이 찾아낸 독특한 변주

한국형 하드보일드 고어영화의 효시를 이룬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준 계급 간 갈등이 빚어낸 공멸하는 인간의 모습은 박찬욱식 냉소주의와 맞물려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올드 보이>는 대답과 함께 질문을 찾아야 하고, 반전의 속임수를 끊임없이 읽어내야 하며, 충돌과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를 분석해야 하는 영리한 영화였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표면적으로 현란해 보이는 구성, 구도, 장치, 심지어 화려한 소품에까지 <올드 보이>를 넘어서는 매우 기교적인 영화로 만들어졌다. 딸과 함께 접어든 골목길의 눈 내리는 장면 등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은 이명세 감독의 냄새가 역력하고, 일정한 무게감 없이 시퀀스마다 파편을 이어붙인 듯한 내러티브는 잔혹복수극을 기대한 관객 앞에 컬러풀한 블랙코미디를 내놓는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과 평단의 입맛을 맞출 줄 아는 영민한 감각과, 철저하게 기획된 소품과 세트가 주는 매력은 장르적 관습과 전작의 변주를 통해서 허허실실 구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콜라주에 가깝고 역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절한 것과는 거리를 달리한다.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서 부분은 뛰어나나 전체가 부분을 넘지 못하는 독특한 실험을 한 박찬욱의 영화적 행보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나가는 말 - <친절한 금자씨> 그 후

이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속임수가 많으면서도 그 저변은 단순하다. 단순하기에 속임수가 많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박찬욱의 난해하고 치밀한 고백 밑에는 금자가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고 보면 다소 허망하게도 질문 안에 이미 그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적 열정과 치열한 복수, 추리극적 반전이 혼융되며, 거시적으로는 치유와 구원의 희구를 말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허전함과 함께 허리우드 키드를 떠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서 진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고,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의 갈수록 성숙한 모습과 종교적 체험을 통한 영혼의 깊이를 지닌 균형 잡힌 복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우진이 실패한 길에서 절묘한 타협과 해결책을 찾은 이금자의 복수극이 <친절한 금자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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