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말하는 한국은 이제 무시하자

나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사안에 대해 논평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전에는 그런 발언을 ‘선진국 사례’로서 참고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세가 사대주의라고 본다.

내가 차별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오해할까 봐 설명을 덧붙이는데, 내가 규정하는 ‘외국인’은 ‘외국 거주자’를 가리킬 뿐, 그 외의 다른 뜻은 없다. 몸이 어디에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얼마를 거주하지 않으면 외국인으로 봐야 할까? 내 경험으로 2주만 한국을 떠나 있어도 현장감이 떨어진다. 요즘엔 통신이 발달해서 온라인으로 접속해 있으면 마치 한국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하는데, 강조하지만 발을 어디에 딛고 있는지, 누구와 밥을 먹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고, 태생도 한국계고,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그런데도 ‘외국인’이라고 규정하는 게 옳을까? 한국에 일정 기간 있었지만, 한국 국적도 아니고 한국어도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해야 맞을까? 내 규정에, 둘 다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내 구분의 취지가 ‘차별’에 있지 않고 ‘규정’에 있음에 주목했으면 한다.

(평소 ‘혈통’이니 ‘민족’이니 ‘국적’이니 이런 거 비판하던 사람이, 이런 규정 상황에 놓이면 꼭 그런 것들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아이러니다. ‘영토’는 땅을 기준으로 한 구별이며, 깃털 없는 두 발 동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땅을 딛고 살고 있으며, 영토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

특히 외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이 한국어로 한국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착각하기 쉽다. 그 사람이 거주하는 나라의 ‘멋진’ 사례와 비교하면서 말할 때 더 그렇다. ‘구체성’을 잃어버리면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한국인이 한국 땅의 구체성을 놓치는 많은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즉, 한국인이냐 외국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구체성을 붙잡고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한국인이면서 구체성을 놓치는 경우도 많지만, 외국인은 필히 구체성은 놓진다. 이 부분이 쟁점이다.

자기 거주지에 대해서는 아주 똑똑하게 소개하면서, 정작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핀트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외국인은 그래서 문제다. 이런 말은 결국 훈수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자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낮춰보며 보태는 훈수.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괜한 싸움을 일으키고 싶진 않기 때문에, 사례는 생략한다. 다만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 거주하며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영향력 있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몸이 매어 이도 저도 못하는 수많은 한국인이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싫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버티는 것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 좋은 곳 찾아 망명할 수 없는 사람들.

수많은 침략 전쟁의 결실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미국에서 뭔가 배울 게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리라. 뭔가 배울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배울 건 어디에나 있지만, 그걸 어떻게 써먹을지는 구체성 속에서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구체성은 항상 얽혀 있어서 뭔가 하기가 쉽지 않다.

(2021.4.30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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