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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2010) by 테드 창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2013)

 

잭스에게 키보드와 디스플레이 화면은 직접 그곳에 가 있는 행위의 비루한 대체물에 불과했다. 콩고에서 잡아 온 침팬지에게 밀림을 무대로 한 비디오게임으로 만족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19쪽)

 

"하지만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법인화 정관을 작성할 수 있어. 그러길 원한다면 말이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지? 네가 폴리토프 일에 대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잭스가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럴 경우 네가 잭스의 결단을 받아들이려면 뭐가 필요할까?"

애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마 내가 잭스의 결정을 경험에 의한 것이냐고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겠지. 잭스는 연애 관계를 맺거나 직장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 두 가지를 다 해야 해. 게다가 영원히 하게 될 가능성도 있고. 난 그런 식으로 일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잭스가 그 방면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았으면 해. 일단 그런 경험을 쌓은 뒤라면 내가 정말로 반대하긴 힘들어지겠지." (168-169쪽)

 

데릭은 예전에 애나가 조리 있게 정리한 주장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디지언트들은 연애나 직장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 판단으로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 말이다. 디지언트들을 인간 어린애와 같은 존재로 간주한다면 사리에 맞지만 동시에 그들이 데이터어스에 계속 갇혀 있는 한, 그들의 삶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격리된 상태로 있는 한, 이 정도로 중차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디지언트의 성숙함의 기준을 인간만큼 높이 설정하지는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마르코가 이번 결단을 내릴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을 수도 있다. 마르코는 자기 자신을 인간이 아닌 디지언트로 여기는 걸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한 제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데릭은 마르코가 실제로는 자신의 성질을 데릭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르코와 폴로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간주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대신 데릭의 기대에 억지로 부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마르코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를 인간처럼 대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과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런 철학적인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토론하자며 뒤로 미뤄 놓았겠지만, 이번만큼은 데릭이 당장 이 자리에서 내려야 하는 결단에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만약 데릭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애나는 폴리토프에 취직할 필요가 없어진다. 즉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마르코가 자기 뇌를 건드리는 쪽이 나을까, 아니면 애나가 자기 뇌를 건드리는 쪽이 나을까? (188-190쪽)

 

* 충분한 경험이란 무엇일까? 작가노트에서는 시행착오라는 의미로 사용한 걸로 되어 있는데, 그 용법을 포함하더라도 성숙했다는 걸 보장하기에 충분한 경험이 얼마만큼인지 미리 알기란 거의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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