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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니체 번역에 관한 몇가지 글들

신승원 2005.10.05 22:51 조회 수 : 4654 추천:19

혹시 읽어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퍼옵니다.
얼마전 번역 문제가 이곳에서 이슈가 되었는데
번역이란 문제가 그토록 힘든 일임에도
잘 된 번역은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과도 같은 일이란것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글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나는 사랑한다. 피로 쓰거라,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거니, 나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을 증오한다.

독자를 알고 있는 자는, 독자를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 세기의 독자도—그리고 정신 자체도 악취를 풍기리.

누구나 읽기를 배워도 된다는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사고까지도 망친다.

일찌기 정신은 신이었고, 이후 인간이 되었다가, 이제는 심지어 천민이 되기까지 하리.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자는, 자신의 글이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외어지기를 바란다.

산에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에 이르는 길이나, 그걸 위해서는 너의 두 다리가 길지 않으면 안된다. 잠언은 마땅히 봉우리이어야 하거니와, 잠언을 듣는 이들 역시 마땅히 키가 크고 우뚝 솟아오른 자들이어야 한다.

희박하고 갓맑으니 공기요, 가까우니 위험이요, 즐거운 악의로 가득하니 정신이라: 이들은 서로간에 몹시 잘 맞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권, “읽기와 쓰기에 관하여”에서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로 번역한 die lesenden Müßiggänger는 국내 번역서들이 대표적으로 오역하고 있는 낱말을 포함하고 있다. 니체의 저서 곳곳에서 등장하는 Müßiggänger는 라틴어 ōtium과 맥락이 닿고 있다. ōtium은 ‘의무, 업무에서 벗어난 상태’, ‘한가한 상태’, ‘사색하고 책 읽기 좋은 여유’를 의미한다. 즉 로마사회에서 로마시민이라면 마땅히 봉직해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잠시 혹은 상당 기간 한유로운 상태를 맞이한 경우를 가르킬 때 이 낱말을 쓴다. 그래서 이 낱말의 반대말 negōtium은 ‘직무’, ‘업무’, ‘일’을 뜻한다.

그런데 국내 번역서들은 한결같이 Müßiggänger를 “게으름뱅이”로 잘못 옮기고 있다. 니체가 주로 공박하는 대상이 그저 책만 읽는 학자들, 삶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하고 학문적 방법론에만 매몰된 자들, 한적하게 글만 파는 자들임을 국내 역자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니체가 말하는 Müßiggänger는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지독한 책벌레들이며,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다.

원문의 die lesende Müßiggänger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 혹은 “글만 읽는 한적한 자들” 쯤으로 옮겨야 한다. 이 Müßiggänger는 두 번째 «반시대적 고찰» 머리말에서도 등장한다. “지식의 정원에서 깐깐한 성격의 한적한 자(der verwöhnte Müßiggänger im Garten des Wissens)가 역사학이 필요한 방식”이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더욱 분명하게도 “지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적 장치까지 곁들여서 Müßiggänger를 설명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들은 다름아닌 지식인들, 성격이 깐깐한 병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목마저 “지식의 정원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버릇없는 게으름뱅이”(이진우), “지식의 정원에서 어슬렁대는 건방진 게으름뱅이”(임수길)로 번역하여 여간 원뜻을 훼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니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오역을 접하게 되면 정말이지 파르르 떨린다. 과연 이런 번역을 니체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잠언이 산봉우리라면 잠언을 듣는 이도 산봉우리여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법이며, 그래야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는 법이다.


니체는 독서(문자, 글)를 통하여 사고, 정신, 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피에서 정신, 사고, 글, 문자로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제시한다. “누구나 읽기를 배워도 된다는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사고까지도 망친다”는 말은, 그 흐름이 역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부패의 경고이다. 타인의 “피”를, “읽기”(문자, 글)를 통하여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니체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die lesende Müßiggänger)을 그래서 증오한다.

그런데도 글 읽는 자들(독자들)을 감안하고서 글을 쓰는 자는, 정신을 부패시키는 자이며 독자를 부패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독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 지위가 신에서 천민으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오직 자신의 피로 써야 하는 법이다. 자신의 피로 쓰는 자는 독자를 모른다.

그렇다면, 그 타인의 “피”를, 그 타인의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어떻게 가슴에 새길 수 (니체의 표현을 따르자면 “욀 수”) 있겠는가! 그 피의 높이, 그 정신의 높이에 나란히 도달해야 한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야 한다. 그러나 그곳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高山, 위험하고 외로워라. 선악이 없이 맑아라.




“비극의 탄생” 번역 서평



현재 우리나라는 니체 번역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본어 역본을 중역하던 시기, 청하출판사의 비전공자에 의한 번역(더러는 영어 역본의 중역) 시기를 지나, 이제 비로소 철학 전공자에 의한, 그것도 새로운 비평본인 KGA/KSA 전집판 번역의 시기를 맞았다. 책세상 출판사의 니체 전집 완역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니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글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들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은, 니체가 고전문헌학 전공자였다는 사실, 니체가 독일어를 너무 아름답게 구사한다는 사실, 그리고 니체가 단지 철학뿐 아니라 문학, 음악, 예술에 대하여, 심지어는 인간의 심층에 대하여 경이로울 정도의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세상 출판사의 번역 시리즈는 그저 철학박사 학위를 딴 학자에 의해서 번역되고 있을 뿐이다. 비관적으로 말해,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는 면허증 하나만으로는 니체 번역의 자격이 충분한 것이 결코 아님을, 본보기로 역설해 주고 있다. 이런 말 하기는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오역이 즐비한 번역본도 있다는 것은 책세상 번역 시리즈의 번역자 선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확신마저 갖게 된다. (물론 나는 책세상 번역 시리즈 전부를 다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두어 권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어권 중에서 하필 심각한 오역본인 책을 접했고, 더 이상 책세상의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물론 그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역서는 최소한 평균점은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이진우 교수의 손길에 의하여 «비극의 탄생»이 번역, 출판되었다. 나는 이 책을 기다렸다. 나는 «비극의 탄생»에 관심이 많았고, 독일어로도 꼼꼼하게 정독하였으며, 관련 해석서들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의 다른 글들도 번역한 이진우 교수의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가 이 번역본에 대해 줄 수 있는 점수는, 평균점, 혹은 평균점보다 약간 아래이다.

아다시피, «비극의 탄생»은 두 가지 문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1872년 초판의 서문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1886년 재판에 추가된 <자기비판의 시도>이다. 니체가 후자의 글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초판의 문체는 “서투르며,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으며 감정적이다.” 그 반면에,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는 물처럼, 때로는 격류가 되어 흐른다. 그 흐름의 와중에 육중한 문제 제기가 야전의 포성처럼 터진다. 그래서 그 흐름은 박진감이 넘치고, 앞 단락에서 뒷 단락으로 넘쳐 흐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번역본에서는 판본간 문체상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한편으로,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독일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감안하자면 이러한 문체의 생사는 그다지 타박할 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차라리 독일어의 절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진우 번역만의 문제점이 아니다. 소위 철학 전공자들 거의 전부의 문제점이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의 우리말 번역어 선택은 왜 그렇게 뻣뻣한가? 아마, 기본 소양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예술과 문학에 문외한인, 혹은 그쪽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철학 전공자들의 전형적인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의 정확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문체상으로 평가하자면, 책세상의 이진우 역본이 청하출판사 김대경의 역본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지나가는 김에 이야기하자면, 김대경 역본의 약점 중의 하나는 독일어의 접속법을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독일어 접속법의 뉘앙스를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 의아하기까지 하다. 접속법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은 이진우 역본도 마찬가지이다. 하기야 독일어 접속법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본이 과연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른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문체는 그렇다치고, 과연 이진우 역본은 김대경 역본의 번역 오류를 개선하기는 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아니다’이다. 오히려 오역에 있어서 난형난제라고 평하고 싶다.


<자기비판의 시도> 부분을 표본으로 삼아 번역의 문제점을 거론해 보겠다. “그는 전황이 근심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무관심하기도 했다”(9면). 원문에는 “전황”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역자의 해석이 개입된 셈인데, 특이하게도 김대경 역본과도 동일하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일단 원문에도 없는 낱말이거니와 니체가 전황을 염려했다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덜 명백한) 오류는 “당시 나의 젊은이다운 용기와 악의가 방출된 그 책”(11면)에서도 드러난다. 독일어 Argwohn을 “악의”라고 번역한 것인데, 이런 역어 선택은 100%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Argwohn”이 의처증과 같은 “의심”, “의혹”, “의구심”에 가까운 의미이기 때문에 오류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낱말은 13면의 “사람들은 악의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아마도 역자는 독일어 “arg”가 “악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보니까,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경 역본은 각각 “회의”, “불신”으로 옮겨 오히려 잘 된 편이다.)

이런 오류들은 독일어 뉘앙스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거나 독일어 감각이 잘못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이 독일문학 전공자들에 비해 어휘력이나 감각 면에서 뒤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의 다른 저서의 번역본들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본 지인들로부터 나는 책세상 번역본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딱히 듣지 못했다. 아마도 이러한 독일어 감각과 번역문의 문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18면의 “아름다움과 감성에 대한 두려움”(이진우 역본)과 “아름다움과 관능에 대한 두려움”(김대경 역본)의 차이를 낳았다. 물론 나는 후자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철학 전공자는 철학사에서 유구하게 논의되어온 “Sinnlichkeit”를 언제나 늘 “감성”으로 번역해서 읽었기 때문에 이진우 역본은 그러한 뻣뻣한 선택이 이루어졌을 게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경 역본이 더 잘 된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음악이라는 세례명을 받고”로 옮겨야 할 대목을 “음악에 몸을 바쳤고”(김대경 역), “음악의 세례를 받고”(이진우 역)로 각각 옮겼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김대경 역본은 의미가 빗나가면 확실하게 빗나가지만(빗나가는 것으로 모자라 정반대로 번역해 놓은 대목들도 있다), 이진우 역본은 애매모호하게 빗나간다고 할까. 애매모호하게 빗나가다 보니까 오역이 아닌 듯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한 오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오역의 특성이 두 책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느 역본이 더 낫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다만, 김대경 역본이 이진우 역본보다 ‘신명나게’ 읽힌다는 것만 언급해 두고 싶다.

설마 어떻게 정반대로 번역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니체의 글을 번역할 때에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니체의 문장이 워낙 문학적인데다가 낱말의 의미를 절묘하게 건드리면서 흐르기 때문에, 그리고 상궤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궤적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정반대의 번역을 하게 된다. 더구나 니체는 희랍어나 라틴어의 문체를 좋아하여, 생략할 수 있는 단어는 최대한 생략하는 버릇이 있다. 그만큼 니체의 번역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를 번역한 역자들치고 칭찬 한 번 제대로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니체의 책을 읽을 때만큼은 독한사전을 참고하지 않고 철저하게 독독사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기존에 기억되어 있던 독일어 감각을 지속적으로 재점검하는 한편으로 독한사전의 불비점을 보완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독의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니체의 문체로 인한 어려움은 그렇다치고, 또 니체가 다루는 분야가 워낙 방대하고 깊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역자들의 주위 학문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 곳들도 있다. 바로크 음악의 작곡기법에 대해 기본지식을 갖추지 못한 두 역자는, “여태까지 인류가 경청하기에 이르렀던 도덕적인 주제[선율]이 한껏 빗나가 전개된 음형으로서 기독교를 다루고 있다” 쯤으로 옮겨야 할 대목을, “도덕적 주제의 뻔뻔스러운 제안으로서의 기독교, 이것에 인류는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왔던 것이다”(김대경 역, 29면)와, “기독교를 이제까지 인류가 귀 기울여온 도덕적 주제의 극단적 구체화로서 다루고 있다”(이진우 역, 17면) 로 각각 잘못 옮기고 있다. 니체가 굳이 “경청하다”는 낱말을 썼는데도 이 구절이 음악적 은유라는 점을 역자들이 간과한 까닭은, 그만큼 음악에 무지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니체는 음악에 얼마나 정통했던가! “그대의 대위법적 발성술과 귀의 현혹술을 총동원하여, 분노와 파괴욕의 기저음이 이 책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김대경 역, 32면)와, “그대의 대위법에 기초한 음성 예술과 귀를 현혹하는 기술 밑에서는 분노와 파괴 욕망의 기본 저음이 울리고 있지 않은가?”(이진우 역, 21면)의 번역 대목에 이르면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이 대목은 “귀를 홀리는 당신의 모든 대위성부 기법의 저음부에서 분노와 소멸욕망의 통주저음이 웅장하게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로 옮겨야 한다.

<자기비판의 시도>에서만도 지금 언급한 것보다 심한 오역들이 더 있지만 이만 줄이겠다.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언급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하나만 언급하자. “모든 비극적인 것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독특하게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이진우 역, 19면)은 오역을 넘어 비문(非文)이다. 이런 대목을 쏙 끄집어내어 지적하는 것이 대단히 괴롭고 미안하지만, 이런 대목 하나가 번역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다. 서문을 넘어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고전문헌학과 희랍문학,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했을 오류들이 미리 생각나 마음만 답답하다.

“이런 번역비평을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네가 번역을 직접 해라”라는, 충분히 가능한 충고를 나는 달게 받아들이겠다. 위에서 언급한 번역의 과실보다는 이 소중한 책을 번역해 준 역자들의 공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비극의 탄생»의 번역은 이진우 역본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곳곳에서 오역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도 니체의 유고들을 번역하기도 했고 책세상의 니체번역 편집위원인 역자의 손에서 번역된 책이 이렇다는 것에 비애를 느낀다. 하지만 이 비애는, 근원적으로는, 나의 니체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생긴다.

이 책은 처음으로 번역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번역이 기존의 번역서들보다 눈에 띄게 뛰어나지도 않다. 기존 번역서의 연장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나 할까. «비극의 탄생»이 제대로 번역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독자들이 이 번역본에 만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니체의 다른 저서와는 달리 «비극의 탄생»은 니체 생존 당시에 이미 재판(Leipzig 판본)까지 간행된 터이므로, 니체의 독일어 텍스트를 최근에 전면적으로 새로 비평한 de Gruyter 출판사의 KGA/KSA 비평본의 우위가 특별히 부각되지도 않는다. (이 비평본의 우위는 유고집이나 소위 «권력에의 의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이 판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진우 역본에는 주석이 없다. 물론 청하출판사의 역본은 W.A. Kaufmann의 특출날 것 없는 영역본 주석을 그대로 베끼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기회가 닿은 김에 이야기하자면, 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청하출판사의 번역 시리즈의 편집자 서문들은 이 Kaufmann 영역본의 서문을 번역한 듯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청하출판사는 희한하게도 그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꽤 있다. 문제는 그 서문들이 더러는 이상한 내용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원래 자신의 저서에 주석을 달지 않았으므로, 독자의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번역할 때에도 주석을 달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고서도 주석은 충분히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세상 번역본이 참고한 KGA/KSA 비평본도 별도의 권으로 분리하여 간단하게나마 주석을 달아놓지 않았던가! 더구나 잠언 형식의 글도 아니고 «비극의 탄생» 과 같은 저서에는 국내 독자들을 위하여 당연히 주석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 하나 때문에 이진우 교수의 역량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라는 제도적 지위에 머물면서 번역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번역 자체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적한 오류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이 번역서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역자가 이 책의 번역에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니체를 번역해야 할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에 대해 잘 모르거나 니체를 사랑하지 않는 학자는 되도록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은 그렇다치고 문체가 조악하기 때문이다. 독문학 전공자도 좋고 철학 전공자도 좋은데, 제발 니체의 영혼을 사랑하는 학자가 번역했으면 좋겠다. 니체는 “학문” 자체를 문제거리로 파악한 영혼이므로, 학문적 방법론에만 익숙할 뿐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지식이 부족한 학자들은 부디 니체 번역을 피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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