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간은 공동 뇌다 … “미래 융합 교육에는 ‘확장된 인문학’이 답이다”

출처: 인간은 공동 뇌다 … “미래 융합 교육에는 ‘확장된 인문학’이 답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공동 뇌 프로젝트>는 이 물음에 답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아주 각별하다. 그 동안 나는 들뢰즈 철학, 인공지능, 코로나19와 뉴노멀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이번 책은 오래된 주제에 관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공동 뇌’(co-brain)가 그것이다.

인간은 공동 뇌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답하려 했다. 인간을 공동 뇌로 보는 접근은 인간을 ‘개인’ 중심으로 보았던 전통과 단절한다. 나아가 그것은 인간을 ‘사회’로 이해하는 관점도 극복한다. 사회란 여전히 ‘개인들의 집합 더하기 알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을 중시하건 사회를 강조하건, 모두 개체를 출발로 삼고 있다.

우선 인간은 출발에서부터 공동 존재다. 인류의 조상 사촌 종은 여럿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현생 인류만 살아남았다. 최신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80만 년 전 약 1,280 개체까지 줄었던 현생 인류는 ‘협동’을 통해 멸종 위기를 극복하고 80억 개체까지 성장했다. 협동을 가능하게 했던 소질은 유전자에 새겨져 있고, 인류는 모두 그 생존자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공동 존재다.

또한 인류는 새로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공유하면서 전승했다. 이것이 문명이고 ‘공동 기억’이다. 공동 기억은 인간이 생물학적 기억(즉 유전자)을 초월했다는 징표이며, 다른 동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다. 더욱이 공동 기억은 교육과 학습이라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점점 누적되었다. 인간이 문명적으로 공동 존재라는 근거다.

뉴턴의 말로 (잘못) 알려진 ‘거인의 어깨 위에’라는 말은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기대있다는 의미다. 개인이 태어나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유전적 소질, 즉 본능 덕분이다. 다른 모든 생물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인간만이 문명적 소질, 즉 공동 기억 덕분에 개인 경험을 초월해 학습한다. 그리하여 과거 인간이 축적하고 현재의 인간이 수집한 각종 지식과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내가 ‘개체 뇌’보다 ‘공동 뇌’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다. 개체 뇌는 유전적 소질이지만, 공동 뇌는 문명적 소질이다. 개체 뇌는 생물학적 특성이지만 공동 뇌는 인간적 특성이다. 개인은 태어나서 공동 뇌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비로소 인간이 되고, 운이 좋다면 살아가는 동안 공동 뇌에 약간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보탠다. 공동 뇌의 성장은 십시일반으로 이루어지며, 그 혜택은 모든 인간이 누린다.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시사점은, 특별히 더 뛰어난 개인은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이루어낸 특별한 성취는 전 인류의 공동 뇌에 기반한다. 즉, 특별한 성취를 근거로 새로 창출된 이윤을 다 갖겠다는 주장은 근거가 사라진다. 오늘날 초거대 부자가 내세우는 저 논리 말이다.

인간을 공동 뇌로 이해하면, 이른바 창의적 융합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지,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우리는 창의성의 중심에 예외적인 천재적 개인을 두어왔다. 창의적인 결과는 그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창의적인 결과는 홀로 등장한 적이 없다. 천재들은 한꺼번에 등장했다. 고대 아테네, 르네상스 피렌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기 에든버러, 19세기 후반 파리, 20세기 초반 빈. 과학과 철학과 예술을 넘나들며 천재들이 떼로 등장했던 장소와 시간을 꼽기란 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창의적 융합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토양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런 풍토에서는 천재들이 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른바 ‘창의 인재’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을 발굴하고 훈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몫은 크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회문화적 풍토다. 무엇보다 공동 뇌에 자유롭게 접근해서 활용할수록 창의적 융합이 더 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려면 경제적 여유와 더불어 사회의 자유도가 높아야 한다. 사회가 경직될수록 자유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유의할 점이 하나 있다. 전문적 깊이를 가지지 못하면 창의적 융합은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개인은 최대한 깊은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점에서 융합 인재를 기르겠다는 노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전문성을 갖춘 개인들의 협업이다. 말하자면, 전문가들이 조금 작은 규모의 공동 뇌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최대한 이질적인 전문성이 충돌하고 융합하면서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문가의 협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일까? 바로 소통 불가능이다. 전문가로 성장하려면 오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깊이는 주변과의 소통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한 우물을 파되 한눈을 팔지 말아야 전문가가 된다. 이렇게 길러진 전문가들은 소통이 어렵고, 따라서 협업도 어렵다. 그동안 창의적 융합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다.

소통 가능성을 높이려면 인생 초년에 소통을 위한 언어를 최대한 공유해야 한다. 가령 한국과 일본에 특이한 현상인 문과/이과의 구분은 양 진영의 소통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찰스 퍼시 스노가 ‘두 문화’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1959년이다. 말하자면 두 문화의 격리는 전 세계적 현상이며, 아직 해결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요컨대 두 문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뇌가 말랑말랑한 시기 동안 최대한 ‘공통 언어’를 습득시키는 수밖에 없다. 공통 언어는 이를 확장된 언어다. 타고나면서 배우는 자연어 말고도 수학, 과학, 기술, 디지털, 예술이 모두 ‘언어’다. 나는 자연어를 뺀 확장된 언어를 ‘인공어’라고 분류한다. 자연어와 인공어는 모두 세상을 읽고 쓰기 위해 필수이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모두 언어라고 이해된다. 이를 염두에 두면 ‘확장된 언어 교육’이라는 나의 주장은 이미 일부 실천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확장된 언어를 습득한 후에 전문가의 길을 밟으면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소통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해야 전문가의 협업이 비로소 성립한다. 창조적 융합은 그 결과물로서 파생될 것이다.

현실적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전 인구가 확장된 언어를 잘 습득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개인 차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할 필요성이 급증하고 있는 오늘날 성인 교육 혹은 평생 교육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학습력’이 중요한데, 그것의 바탕은 확장된 언어 능력이다. 이렇게 보면 어떻게 해서든 모든 인구의 확장된 언어력을 길러줄 방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한국만 놓고 보면, 초중등 교육의 대부분이 쓸데없는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입시 공부다. 오늘날 입시 공부를 많이 하고, 시험를 잘 치른다고 해서, 개개인의 역량이 증가할까? 대부분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교육에 시간을 쓰지 않고 역량 소모에 시간을 쓴다. 공부의 앞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잘 치르는 사람을 기르는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잘 입증되었다. 엘리트로 불리지만 사실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술자들 말이다.

따라서 공부할수록 역량이 길러지는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서의 역량은 지식과 기술을 갖추는 것만 아니라 사회성, 소통, 협업, 시민의식 같은 다양한 영역의 능력을 아우른다. 이를 위한 기초가 확장된 언어력이다. 자연어와 인공어를 포함해 언어는 사실 공동 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언어는 개인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해 개인에게 자양분을 주고 또 개인이 내용을 보태는 그 무엇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음성과 문자에 국한되지 않고 수학, 과학, 기술, 디지털, 예술을 모두 포괄한다. 그것이 공동 뇌이다.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과학관 등이 공동 뇌다.

공동 뇌는 개인이 성립하기 위해 인류가 만든 유전적, 문명적 유산이다. 그것은 뒤집힌 원뿔 모양의 나선형으로 누적되어 왔다. 맨 밑에는 생물학적 기초가 있지만 위로 갈수록 문명의 역사가 새겨 있다.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최소한 다음 세대로 공동 뇌가 잘 전수되지 못하면 인류는 얼마 가지 못해 금세 무너질 것이다. 아니면, 공동 뇌를 잘 전수받은 사람이 인류의 나머지를 지배하는 끔찍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공부하는 이유는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http://www.uni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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