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드와 공통의 것

타르드의 위대함은 ‘공통의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시야를 주었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좁고 예민한 시각(근시)은 공통의 것보다 차이에 꽂히는 경향이 있다. 몇 년 전의 사례를 들면, 촛불 시위대와 태극기 부대. 현장에 가깝게 있으면 차이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인지상정이다. 더 나아가 차이에 따른 내 편 네 편의 구별도 그러하다.

일찍이 데이비드 흄이 관찰한 바 있듯, 그런 성향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nature) 중 하나인 ‘편파성(partiality)’의 발현이다. 이 편파성이 ‘공감(sympathy)’에서 온다는 흄의 비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감이 사회 문제의 치유책이 되기 어려운 건 더 가까운 것에 더 깊게 공감하는 인간 본성 때문이다. 공감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사람은 생각이 짧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 사이에 차이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건 지당하다. 부족, 연맹, 지역, 국가 등으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생물학적, 지리적, 언어적, 역사적, 관습적 공통점에 주목하면 겉보기보다 공통된 것의 비율이 높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 차이로 느끼는 많은 부분은 사실 공통된 것을 생략했을 때 드러나는 ‘미세한 차이’인 경우가 많다. 성별 차이만 놓고 보더라도, 차이에 앞서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생물학적으로 98.5% 정도 공통되며, 인간 남녀는 98% 이상 같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생물학적 공통점은 문화적 차이(후천적 차이)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같은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차이의 강조는 언론이 주도하는 측면이 크다. 공통의 것을 말한들 아무도 클릭하지 않는다. 별로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클릭을 위해서라도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먹고사니즘). 그리하여 대중의 관념에는 차이가 실제보다 훨씬(얼마나 훨씬인지는 실증 조사가 필요하다) 크게 각인된다. 더 큰 차이만이 대중의 관념을 자극할 수 있으니, 점점 차이는 확대될 운명이다. 소셜미디어 환경은 언론이 최초 강조한 차이를 더 증폭하고 가두리 양식한다.

사회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공통의 것이 얼마나 되며, 공통의 것을 구심점으로 얼마나 구심력이 작동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구심력이 작동할 것인지, 연구되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런 연구는 비판적 연구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떤’ 공통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러라고 사회학이 있는 것 아니던가? 사회학자는 무릇 그런 일을 해야 마땅하다. 타르드가 종래의 사회학 그리고 뒤크켐의 사회학을 비평한 것도 같은 취지였다.

나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공통의 것과 중요한 차이들이 양적으로 잘 측정되어야 비로소 뭔가 사회적 개입과 행동의 출발점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끄적여 본 거다. 평등을 항한 열망도 공통의 것에 대한 무의식적 인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저 사람과 내가 공통인 부분이 많다면 분배도 공통의 몫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공통성의 강조가 집단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 권역주의 등으로 이어진 불길한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공통의 것이 없다면 오늘날 연대와 연결이 어떻게 가능하지 막막하다. 공통의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사회 진보를 향한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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