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플랫폼과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증진

이 글은 아래 문서 중 “AI와 인간의 협업가능성과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김재인, 2020)의 일부입니다.

《문화다양성협약 국내 이행을 위한 논의 – 유튜브에서 AI까지, 21세기 한국에서의 문 화다양성》


4.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문제 – 디지털, 인터넷, 인공지능, 플랫폼은 창작과 표현의 다양성을 가속화했고, 차별적 취향을 가진 소비자의 편익을 증대시켰다

(물음) 3.2 디지털, 인터넷, 플랫폼은 쟁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3.3 ‘창작 – 생산 – 유통 – 접근’이라는 항목 구별은 오늘날 적절한가?; 3.4 ‘~의 홍수’ 속에서 홍보라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젠다와 관련해서, 인공지능이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증진시킨다는 점은 이미 충분히 논증한 것 같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을 가능케 하는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지원 방안이 있다면, 창작자에게 좋은 개인용 및 클라우드 컴퓨터를 보급하고, 소프트웨어 교육을 시키고, 개인이 구비할 수 없는 ‘인공지능 창작센터’ 같은 공간을 주고, 협업을 위한 미디어와 채널을 열어주는 일일 것이다. 나머지는 창작자가 알아서 하게 두면 된다.

이제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남은 물음들에 답해 보자. 디지털과 인터넷이 창작, 유통, 접근에 모두 긍정적이라는 점은 반박이 어렵다. 나는 이 논점에 대해서는 ‘디지털 르네상스’라는 연구의 결과로 논의를 대신하겠다.

“인터넷의 무한한 서고 공간에 의해 발생하는 전통적 롱테일의 편익은 상당히 크다. 이것은 특히나 다른 사람들과 차별적인 선호를 가진 소비자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효과는 훨씬 더 크다. 아마, 디지털화의 가장 중요한 편익(디지털 르네상스의 추진력)은 많은 창작자에게 시장에서의 기회를 제공하고, 많은 좋고 새로운 상품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디지털화가 해온 새로운 작업과는 별개의 다른 의미에서 디지털화의 편익을 볼 수도 있다. 공간 혹은 시간에 의해 한때 소비가 제한받았지만, 이제는 그런 제약이 없다. (…)

디지털화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비를 해방시켰다. 음악의 소비자들은 물리적 상품을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한 번에 12 곡을 사야 하거나 다루기 힘든 장비 옆에 있어야 할 필요도 사라졌다. 넷플릭스와 스포티파이 같은 뷔페식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추가적인 영화와 노래를 이용하는 데에 추가적인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접근 방식이 보고, 듣고, 읽기에 최적의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디지털 르네상스에 살고 있고, 새로운 상품과 편의로부터 얻는 소비자 편익은 엄청나게 크다.” (주석: 조엘 월드포겔, 『디지털 르네상스 : 데이터와 경제학이 보여주는 대중문화의 미래』, 임정수 옮김, 한울아카데미, 2020, pp. 210~211. (원서: Joel Waldfogen, Digital Renaissance : What Data and Economics Tell Us about the Future of Popular Culture, Princeton UP, 2018.) 강조는 모두 인용자.)

디지털과 인터넷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 않지만, 플랫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유튜브, 넷플릭스, 페이스북 등 글로벌 플랫폼의 독점적 지위가 문제시된다. 이 점은 <유네스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협약 제1차 국내 전문가 회의 – 디지털 플랫폼과의 협력을 통한 2005년 협약의 이행>(주석: 유네스코한국위원회 11층 대회의장, 2020년 5월 22일(금) 14:00 – 18:00. 발제는 이동연,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의 부상과 문화다양성」과 이광석, 「디지털 환경의 미래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이었다.)에서도 집중적으로 토의되었다.

나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지만, 2005년의 유네스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과 관련해서 미디어 플랫폼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의 논거는 대단히 빈약하며, 오히려 미디어 플랫폼의 긍정성을 살리는 논의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점을 논하기에 앞서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문화다양성협약 글로벌 리포트 : 문화정책의 (재)구성>(2017)에 언급된 ‘창작 – 생산 – 유통 – 접근’이라는 도식(주석: 옥타비오 쿨레스, 「제3장 플랫폼 시대의 문화정책」,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 글로벌 리포 트: 문화정책의 (재)구성』, 이구표 옮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2018, 72쪽.)이 매우 부정확하며 시대 착오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도식은 “디지털 기술이 문화가치사슬을 변화시켰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이 네 항을 분리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네 항의 구분은 ‘피지컬’에 어울리는 것이지만, 현재의 ‘디지털 네트워크’에서는 무엇보다 동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창작과 생산은 매체가 분리되었을 때 가능한 구별이며(가령 시나리오와 영화), 유통과 접근은 물리적 간격이 존재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거대 배급사의 매개).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모든 것은 ‘미디어’이며, 매체와 매개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주석: 사실 영어 medium의 여러 번역어 중 하나가 ‘매체’와 ‘매개’이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주석: 한국에서만 부당하게 SNS라고 불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디어이다. 이를 둘러싼 난맥상에 대해서는, 김재인, 「한국언론은 왜 ‘소셜미디어’가 아니라 ‘SNS’를 주로 쓰나」, 뉴스톱, 2018 년 12월 5일 칼럼을 참조.)이다. 최소한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소셜미디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따라서 위의 도식은 개념 설계부터 다시 해야 한다. 재설계에서 관건은 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망, 입력장치(키보드, 마우스, 카메라, 마이크, 센서 등), 출력장치(모니터, 스피커, 3D프린터, 로봇, VR-AR장비 등)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나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용한 ‘생산 – 분배 – 소비’라는 도식이 여기에도 들어맞을 것으로 짐작한다.(주석: 질 들뢰즈 &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김재인 옮김, 민음 사, 1장 참조. (원서 :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3.)

이제 플랫폼을 살펴보자.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플랫폼이 등장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아직까지 그 성격이 명확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이견이 없는 점은, 1) 그 안에서 수십억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교류할 정도로 ‘집중적· 독점적’이고, 2) 콘텐츠의 생산(업로드) – 분배(검색, 추천, 공유) – 소비(읽기, 보기, 듣기)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으며, 3) 어떤 콘텐츠가 전 지구적으로 ‘대박’을 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정도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된다.

먼저 이동연의 논의부터 검토하겠다. 논지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플랫폼의 지배력이 너무 강해질 경우에는 콘텐츠 창작자들의 권리가 축소되고, 콘텐츠의 플랫폼 쏠림현상이 심화될 우려를 낳고 있다. 이는 문화다양성의 관점에서 충분히 우려되는 지점이고, 많은 논쟁지점들을 낳는다.”(주석: 이동연, 같은 글, 7~8쪽.) 물론 나는 창작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특히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주석: 이 점에서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이 콘텐츠 창작자들의 창작물들을 플랫폼 서비스에 연결하면서 받아가는 비율이 너무 많고, 창작자들과 소비자들이 문제제기 하지 않는 이상, 이 거래의 방식들은 전적으로 플랫폼 서비스 업자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이동연, 17쪽)기 때문에, 꼭 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디지털’과 ‘글로벌’이 엮여 작동하는 시대의 난점을 모조리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주석: 국경 없이 넘나드는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건 그렇다 해도 이와는 별도로 ‘콘텐츠의 플랫폼 쏠림현상’이 우려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플랫폼이 중립적인 놀이터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각 주체별로 나눠서 생각해보면, 플랫폼은 모두에게 이익이다. 콘텐츠 생산자는 가장 많은 기회와 잠재 고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당연하고, 소비자는 가장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곳으로 가려 할 것이며, 광고주는 가장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타겟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플랫폼 기업의 이익이 천문학적이라고 해서, 단지 그 자체만으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이동연은 “넷플릭스가 제작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콘텐츠의 잠재력보다는 자신이 보유한 고객의 시청 습관과 잠재 고객의 수요를 분석한 데이터의 힘”(주석: 이동연, 11쪽.)이라고 말하는데(이는 많은 비판자와 동일한 어조이다), 이 구절에서 ‘콘텐츠의 잠재력’과 ‘데이터의 힘’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 데이터만 잘 분석하면, 아무 콘텐츠라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사실 인공지능이 분석해서 제시하는 넷플릭스의 추천 알고리즘은 기업의 핵심 노하우이다. 심지어 알고리즘을 공개하면 더 큰 오남용이 유발된다. 자신의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하려는 이가 반드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넷플릭스와 유튜브에 대한 비판을 좀 더 경청하자. 생산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동연은 말한다. “유튜브 같은 미디어 플랫폼을 제국의 플랫폼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모든 행위들이 플랫폼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 제3세계 저항의 영상들은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순간 문화 콘텐츠의 자산으로 전환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일반인이 구루(guru)가 되고, 놀이가 엔터테인먼트가 되며, 저항이 상품 형식으로 전환되는 것은 플랫폼 제국의 숙명이다. 유튜브 안에 존재하는 수백억 개의 동영상은 훈육되지는 않겠지만, 통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 그것은 문화다양성의 실현이기보다는 문화적 미국화의 진화된 형태다. 문화적 미국화는 문화적 다양성을 거대하고 강력한 플랫폼으로 흡수한다.”(주석: 이동연, 15쪽.) 한편 같은 맥락에서 소비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광석은 “이용자들이 알고리즘 분석과 취향 예측에 최적화된 기형의 문화 소비 주체가 되는 일은 시간 문제”라면서, “가령, 맞춤형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은, 이용자의 문화적 관심을 분할하고 최적화된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세분화된 취향을 구분해내지만, 동시에 우리 취향을 한 곳에 가두면서 점점 ‘납작하게’ 만들고 정해진 알고리즘 회로 안에서만 각자의 문화 소비를 행하도록 가둘 확률 또한 높”이며, 그 결과 “소비나 이용의 장르적 널뛰기가 서로 이뤄지기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빅데이터 기술문화는 이미 존재하는 문화적 선호와 편견을 더 단단히 만드는 반면,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대중의 접촉면을 현저히 낮춘다는 점에서 대단히 문화 보수적”이며, “소셜미디어 가입자는 공급자의 설계가 강요하는 닷컴 감정과 정서 패턴의 소모라는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의식의 소통 회로 방식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주석: 이광석, 같은 글, 23~24쪽.)

이런 비판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중문화 비판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영화와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mass media)와 페이스북,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social media)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전자가 ‘일대다’의 구도라면 후자는 ‘다대다’의 구도이다. 즉 후자는 생산과 소비의 조합을 바꾸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산의 측면부터 보자. 이동연은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위상이 변했다고 정확히 말한다. “제도화된 문화자본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적 취향에 기반해 동영상을 올리기도 하고, 자신이 관심 있는 여러 분야에 자신의 경험적인 노하우를 유튜브 이용자들과 공유하고 싶어 올리기도 한다.”(주석: 이동연, 14쪽.) 이광석도 비슷하게 말한다. “표준화된 자본주의 순환 체제에서 벗어나 문화 소비나 향유의 민주화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든 문화 제작과 표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문화적 수단에 대한 접근의 대중화와 데이터 생산과 소비의 다양화가 이뤄지고 있다. 적어도 기술 여건에서만 보자면, 오늘날 누구든 원하면 데이터 생산과 유통의 주체들로 나설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소비 측면을 주목하면, “빅데이터 알고리즘 예측은 콘텐츠 소비자들 각자 지닌 특정 취향의 독특한 문화 소비의 다양한 결들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이며, “질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히 이용자의 콘텐츠 제작 참여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들 스스로 문화 시장 내 지분을 획득하면서, 대중문화의 생산과 제작, 소비에 있어 질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때론 주류 대중문화와 색다른 언더그라운드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를 확대 생산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주석: 이광석, 21~22쪽.)

이처럼 대부분의 비판자까지도 생산과 분배와 소비에서 일어난 긍정적 변화를 잘 알고 또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판자는 생산과 소비 면에서 한편으로는 ‘플랫폼 형식에 맞추는 생산의 종속’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 ‘취향이 납작해지면서 다양한 문화 소비가 축소’된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런 비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플랫폼이 없었더라면 생산 – 분배 – 소비되지 않았을 극도로 다양한 콘텐츠가 생겨났기 때문에 플랫폼은 문화 표현의 다양성뿐 아니라 문화 향유의 다양성까지도 가능케 했다. 이러한 활동이 플랫폼 기업의 배를 불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문화 다양성과 관련해서 대부분의 플랫폼 비판자가 ‘다양성의 조건 확보’와 ‘이윤 극대화 및 독점’이라는 서로 별개인 두 문제를 섞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이윤 독점이 문제라면 경쟁법 차원에서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고 실행함으로써 해결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글로벌 플랫폼 기업을 어떻게 일국 정부가 규제할 수 있을지의 문제도 풀어가야 한다. 이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문제까지 소환하는 쉽지 않은 문제이리라.

문제를 잘못 설정하면 해법도 엉뚱한 법이다. 이동연은 시민사회 관점에서 문화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대안을 제안하고 있으나, 제시한 대안은 영화 배급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디지털 네트워크에 들어맞지 않는다. 즉 대상의 존재 조건이 너무 달라 쉽게 적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디지털 네트워크는 국내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이광석 역시 ‘플랫폼 협동주의’를 제안하면서, “대안 공정문화 시장을 만들기 위한 플랫폼 커먼즈 조합”이라고 규정한다. 생산자에게는 정당한 이익을, 소비자에게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자는 취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협동조합 운동이 실패한 것은 자생력이 있기 위해 필요한 적절하게 큰 규모를 확보하기 전에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 내가 생산자라도 기회와 잠재 고객이 많은 곳을 먼저 노릴 것이고, 내가 소비자라도 콘텐츠 품종이 더 많은 곳부터 기웃거리리라. 따라서 조합을 통한 문제 해결은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인공지능 추천 알고리즘이 취향을 좁히고 다양성을 줄인다는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화 콘텐츠와 관련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루하고 재미없으면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 수가 제한되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할 때는 금세 다른 대안을 찾아간다. 추천 알고리즘이 문제라는 지적은 사태를 너무 좁게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적절한 추천을 언제나 환영한다. 미술관, 박물관, 음악회는 모두 추천, 즉 큐레이션에 의해 작동한다.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콘텐츠에는 사실 관심을 가질 시간 여유가 없다. 스스로 애써가며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전문가의 안목으로 잘 고른 콘텐츠를 원한다. 취향의 강요는 폭력이지만, 우리는 취향의 유도를 자발적으로 원한다. 삶과 시간의 가성비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추천하지 못하란 법도 없으며, 때로는 그게 더 잘 맞아떨어진다.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것은 패턴 분석, 분류, 예측, 이 세 가지이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소수 및 개인 취향까지도 분석해서 추천하는 놀라움 덕에 호응을 얻었으며, 이는 아마존이 도서 추천을 통해 초기의 성과를 올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소수의 취향을 가려내고 알려주기 위해 애쓰는 인간 큐레이터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홍보 또는 광고가 다수의 취향 분석과 함께 가는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 인공지능 추천을 가볍게 보는 건 아직 너무 인간주의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빠르고 강력하게 진행되는 디지털, 인공지능, 플랫폼은 문화예술 창작과 분배와 소비에 긍적적인 방향으로 기여하고 있다. 조건의 변화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배제한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며, 오히려 다양성 증진에 이바지하고 있다. 요컨대 문화예술 영역에서 전에는 하기 어려웠던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많은 부정적 현상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극소수 기업의 이윤 독점은 큰 문제다. 모든 영역에서 다양성이 축소되고 있으며, 심지어 멸종하는 것들도 있다. 관건은 이런 현상들이 ‘디지털, 인공지능, 플랫폼’ 때문에 생겨나는지, 아니면 다른 경향 때문에 생겨나는지 잘 분별 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다양성을 보존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 중 하나가 ‘디지털, 인공지능, 플랫폼’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세계에서는 일단 존재한 것이 사라지는 일은 쉽지 않기에, 원하면 언제라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온라인 탑골공원’처럼 말이다.

이상 118~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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