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다. (200자 원고지 145매)
제목: 공동 뇌와 집단 창의성 (Co-Brain and Collective Creativity)
초록: 생성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마음을 다시 돌아볼 좋은 기회다. 철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다. 마음은 1인칭적·주관적이어서 객관적·실증적으로 입증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음 현상에 대한 주관적 보고에 상당수의 사람이 동의한다면 그것은 신경과학을 통한 측정 자료와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된다. 나아가 이 증거가 고고학, 고인류학, 인류학, 사회학이 주장했던 바와 합치하면 더 큰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개인 내면에 있다는 오랜 통념을 넘어 마음은 개인들 사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개인 뇌를 넘어 공동 뇌가 존재한다. ‘공동 뇌’에 상응하는 많은 표현이 이미 있었다. 집단 기억, 공동 기억, 사회 기억, 집단 지능, 공동 지능, 상징 유전, 사회 전통 등이 그것이며, 오랫동안 집단, 공동체, 사회, 문명 혹은 문화라고 불렸다. 공동 뇌의 작동은 창의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통찰을 준다. 창의성은 개인의 사안이기를 넘어 집단 안에서 발현되고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성립한다. 개인 창의성이 아닌 집단 창의성인 셈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인류가 함께 형성한 공동 뇌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다른 한편 우리는 힘을 합쳐 공동 뇌를 조금씩 확장하고 개선한다. 모두가 이 작업에 종사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몇몇은 확장하고 보태어 점점 공동 뇌의 덩치를 키운다. 대다수는 공동 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거인의 어깨’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대다수 인간이다.
여기에 대해 세 명의 심사위원이 의견을 보냈다. 결론은 게재 불가. 논문 게재 불가가 나오는 일은 흔하다. 심사위원진의 입장이 나와 다를 수 있다. 수긍한다. 하지만 심사위원의 지적사항이 과도하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1(게재불가)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려면, 논문을 서너 편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는 현행 학술지 구조상 불가능하다. 내가 투고한 학술지는 200자 원고지 140매 기준이며, 여기서 많이 초과할 수 없다. 나는 기준 원고 범위에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발견된 사항을 소개하고 시론적으로 종합하려 했다. 심사위원1의 요구는 그 후에나 성립할 수 있다.
심사위원2(수정 후 게재)의 지적 중 3, 4, 8은 부적절한데, 4와 관련해 자기 연구를 참조할 때는 투고시 삭제하라고 되어 있고, 3, 8은 인용 안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학술 논문의 형식적 측면에서 어긋났다는 지적은 학술 논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으로 본다.
심사위원3(수정 후 게재)의 지적에서 최근의 논의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대목은 일견 수긍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논하는 것 역시 논문의 범위 바깥에 있다. ‘뇌’에 대한 표준적 논의에서 벗어났다는 점과 ‘체화된 인지’를 논하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나는 표준적 ‘뇌’ 개념과 ‘체화된 인지’ 자체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전제하며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에 추후 논쟁의 대상일 수는 있겠지만, 내 논문은 논쟁점 직전까지만 평가받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논문에서 개념을 정밀하게 다듬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동 뇌’는 매력적인 개념이라고 본다. 앞으로 당분간 이 주제를 발전시킬 예정인데, 내가 아는 한 이 주제를 명시적으로 다룬 학자는 없지 않은가 한다(아마 베르그손, 샤르뎅, 들뢰즈는 암시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현행 KCI 학술지 제도 아래에서 이 주제를 발전시키고 평가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래는 심사평이다.
심사위원1
1, ‘공동 뇌’가 단순한 은유인지 실체적 개념인지가 불분명합니다. 기존의 ‘집단 지성’, ‘문화적 기억’ 등의 개념과의 차별성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고, 생물학적 뇌와 ‘공동 뇌’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창의성과 집단 창의성의 경계가 모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창의성의 발현 과정에서 개인과 집단의 역학 관계가 충분히 분석되지 않았습니다. ‘공동 뇌’가 어떻게 집단 창의성을 가능하게 하는지의 메커니즘 설명이 부족합니다. 창의성의 발현과 전승 과정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뇌과학, 인류학, 철학 등 각 분야의 연구 방법론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설명이 부족합니다. 각 분야의 증거들이 동등한 무게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뇌 동기화 연구 결과를 ‘공동 뇌’ 개념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례와 현대 실험 연구 결과를 연결하는 논리적 고리가 약합니다.
반론 검토의 부족 –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검토가 불충분합니다. 집단주의가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합니다.
현대 기술 환경에서 ‘공동 뇌’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합니다. 즉, 인공지능 시대의 집단 창의성에 대한 구체적 함의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연구 결과가 교육, 조직, 정책 등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요약하면, 현대 사회의 문제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합니다.
특정 이론이나 연구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비판적 관점의 선행연구들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습니다.
결론에서 제시된 도서관-학교-개개인 모델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근거가 부족합니다.
심사위원2
이 논문은 집단 창의성의 토대로서 공동 뇌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문헌을 제시하고 있으며, 비록 아주 새로운 주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공동 뇌’라는 그리 흔하지 않은 개념을 소개하고 그 존재를 주장하려는 듯합니다. 무엇의 존재에 관한 주장은 소위 증명의 책임을 갖게 되는데, 2절에서 시인들의 통찰에 관한 이야기는 이러한 증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오히려 이 논문의 학술적 논문으로서의 자격을 약화하는 듯합니다.
3절은 저자의 논지와 관련된 신경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이 절의 본문 대부분이 인용이거나 참고문헌의 요지를 그대로 가져온 내용입니다. 적어도 그 성과들의 취지를 자기 나름의 방식과 문장으로 정리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학술적 논문에서는 이렇게 많은 인용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인용문의 번역에서 다소 어색하거나 일반적인 번역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논문 곳곳에서 다른 글에서 가져온 문구인 듯한데, 각주 처리를 하지 않은 부분도 보입니다. 그리고 각주 8번과 22번에는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볼 때, 이 논문은 아직 미완성된 상태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4절의 내용도 여기에서 다룬 주요 학자들, 즉 르루아구랑, 푸엔테스, 타르드의 주장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입니다. 학술적 논문에서 물론 학자들은 다른 여러 학자의 견해들을 참고하고,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그 견해들을 재구성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재구성 자체는 적어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요약하는 작업을 수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이 논문은 다소 아쉽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집단 창의성의 토대로서 집단 기억과 공동 뇌의 존재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듯한데, 이러한 주장 자체가 사실 저자 본인의 엄밀한 추론이든가 아니면 독창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학자의 견해를 그대로 가져온 것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자신의 독창적 추론과 견해가 어디부터 시작되는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소 사소하지만, 각주 10번의 경우, 학술적 논문에서 ‘모 대학 교수’라는 식으로 출처가 불분명한 것은 제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다소 사소하지만, 저자는 uberbrain을 ‘초뇌’라고 번역하는 듯한데, 이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도 않을뿐더러 저자가 의미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도 않는 듯합니다. 아무런 인용도 없이 ‘한 연구자’라고만 말하는 것으도 학술적 논문의 형식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심사자저자가 이 논문의 본문을 전반적으로 자기 나름의 표현으로 정리하고 자신의 독창적 추론 과정을 정확히 밝히는 방식으로 다시 작성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심사위원3
이 논문은 인류 문화 및 문명의 원동력을 기억과 그것에 바탕을 둔 공동 기억(공동 뇌)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지의 범위가 몸의 경계로 넘어 외부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 뇌를 기반으로 인류 문명을 분석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수정 보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논문의 핵심어는 ‘공동 뇌’인데 그것이 정확히 정의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필자에 따르면 공동 뇌 = 문화, 문명(기억의 산물) / 공동 뇌 = 집단 기억, 사회 기억 / 공동 뇌 = 사회(기억 소유자들의 집합). 위의 등식들은 매우 다른 ‘뇌’와 관련하여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는 문제를 낳는다. 필자는 ‘공동 뇌’나 ‘초뇌’ 개념이 과학적 기반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것들은 ‘세계정신’처럼 철학적 또는 문학적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팔자가 논의한 것처럼 공동 뇌는 ‘잘 커플링 되고 동기화된 집단 기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뇌는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이므로 ‘뇌 = 기억’이라는 주장은 표준적인 언어 용법에 맞지 않는다.
둘째, 필자의 논의는 문명에 대한 사회 인류학적 분석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인지에 대한 최근의 인지과학 연구를 간과하고 있다. 필자가 논의한 분산인지와 사회인지는 인지과학에서 체화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인지는 뇌만이 아니라 몸-뇌-세계 간 역동적 관계의 산물이다. 공동 뇌에 기반한, 문화 및 문명에 관한 필자의 논의는 사회인지가 오로지 ‘뇌’라는 장소에 저장되는 것으로 보는 뇌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는 문화 및 문명에 대한 필자의 다른 분석과 상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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