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심리학자 김경희(《미래의 교육》, 손성화 역, 예문아카이브, 2019)는 ‘교육’의 관점에서 ‘창의력(creativity)’을 기르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가 creativity를 ‘창의성’이 아니라 ‘창의력’이라고 옮긴 까닭은, 그것이 교육을 통해 충분히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김경희는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구에서 시집살이를 한 이력이 있는데, 주지하듯 이 지역은 수구적인 유교주의의 본산으로 온갖 여성 차별을 겪었으며,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 생활을 했다. 책에는 쓰라린 일화가 군데군데 소개되어 있으며, 이런 경험이 ‘창의력’ 연구를 이끈 동력이기도 하다. 한편 이런 경험은 김경희의 연구에 일정한 편향을 유발해서 유교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대 교육을 핑크빛으로 평가했다고 보이기도 한다.
김경희는 동양 학생들이 ‘시험의 틀에 박힌 답안지처럼 틀에 박힌 생각을 하도록 교육받음’으로써 결국 ‘인간 분재’로 전락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미국 역시 그 길을 걷고 있다고 탄식한다. 미국의 장점이었던 ‘창의력 교육’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력이란 무엇인가?
김경희에 따르면, “창의력은 유용하면서 독특한 것을 만들거나 행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창의적 성공인 혁신(innovation)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혁신은 예술, 과학, 수학, 공학, 의학, 사업, 리더십, 육아, 교육,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생길 수 있다.”(52쪽) 더 나아가 혁신은 ‘창의적 풍토(Climate)’를 조성하고, ‘창의적 태도(Attitude)’를 기르고, ‘창의적 사고(Thinking skill)’를 창의과정에 적용하는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와 달리 김경희는창작물이나 창작자보다 ‘창의적 풍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풍토는 부모와 교육자가 손쓸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경’이라는 용어 대신 ‘풍토’를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풍토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관계, 장소, 시간 등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환경 및 상태를 모두 아우른다. 풍토는 개인의 정서적·심리적 건강을 촉진하는 창의적 잠재력을 살리는 것을 비롯해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 최종 창작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평가도 풍토에 포함되는데, 이를 통해 창작물의 가치 여부가 결정된다. 사회가 그 창작물을 인정하고 가치 있다고 여길 때에만 그것이 혁신’으로 간주된다.”(56쪽) 요컨대 개인보다 풍토가 창의력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정작 본론에 이르면 ‘풍토’에 대한 강조는 개인의 ‘태도’라는 물결에 휩쓸리며 희석되고 만다. 그가 창의력을 발휘한 대문자 I 혁신의 사례로 기업가 스티브 잡스, 인권 운동가 넬슨 만델라,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미술가 조지아 오키프라는 네 명의 인물을 자세히 분석하는 지점에서 태도에 대한 강조는 정점에 이른다. 그가 ‘틀안(Inbox)·틀밖(Outbox)·새틀(Newbox) 사고력’이라고 명명한 ION 사고력에 대해 진술한 다음 언급에서 개인 태도의 역할은 절정에 이른다.
“틀안 사고력은 범위가 한정된 틀 안에서 심도 있게 오랫동안 집중해서 지식·기술을 얻거나 평가하는 것이다. 틀밖 상상력은 그 틀을 초월해서 한곳에 집중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즉흥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새틀 통합력은 틀안 사고력과 틀밖 상상력의 여러 요소를 결합해서 새로운 과정이나 새로운 틀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 ION 사고력이 혁신을 이루기 위한 창의과정에 필수조건이다. 즉, 혁신가는 틀안에서 깊은 전문성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는 틀밖에서 넓게 여러 가지 착상들을 하고 나중에 그 착상들을 | 다시 틀안에서 평가한 다음 서로 무관했던 착상들을 새틀로 결합한다. 그러고 나서 결합된 착상을 정교화와 간결화라는 두 과정을 통해서 정제하면서 점차 유용하면서도 독특한 창작물로 만든다. 이 창작물의 유용성과 독특성을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홍보하면 그때서야 혁신으로 인정받게 된다.”(367)
이 서술에 따르면 ION 사고력을 발휘하는 것은 결국 개인인 셈이다. 이는 미국의 ‘창의성/창의력’ 연구가 대체로 개인을 강조하는 데로 귀결된다는 앞서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한다.
다만 김경희의 주장은 전문가의 협업도 일부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주장을 지지한다. 그는 혁신이 성공하려면 ‘자가수분’이 아니라 ‘교차수분’이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교차수분은 자기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가져와 암술에 수분하는 자가수분과 달리 다른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가져와 수분한다. 마찬가지로 “독창적인 착상을 만들어내는 혁신가의 착상 창출력 단계에서도 전문성 교류 착상은 매우 중요하다. 전문성 교류 착상은 다른 전문가들과 다양한 지식, 기술, 경험을 같이 나누고, 만들어내고, 결합하고, 조정하고, 확장한다.”(380쪽) 이 점은 브레인스토밍은 낮은 효과를 낳는 반면, 전문성 교류 착상은 효과가 높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연구에 따르면 전문성 교류 착상은 “가벼운 만남, 전문가 모임, 자문 상대, 협업, 선의의 경쟁 등과 같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오며, 개인 착상을 최대한 진행한 후 이루어지면 집단 사고가 개인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덜하기 때문에 더 독창적인 착상이 나온다. “이미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들과 전문성 교류 착상을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서로의 착상이나 창작물을 개선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전문가의 지식·기술 및 경험에서 나온 지름길과 같은 방법을 접할 수 있고, 다른 전문성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보거나 깨달은 통찰력으로 자신의 전문성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387)
그러나 아쉽게도 김경희가 전문가의 협업을 강조하는 비율은 1/8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나는 전문가의 협업이야말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을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협업이 발생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과 과정을 만드는 것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경고를 반복하지 않으면 개인주의의 굴레에 거듭 갇히고 마는 것이 현재의 이론 지형이다.
개인을 강조하는 예를 하나만 더 들자면, 김경희는 교차수분과 전문성 교류 착상을 강조하면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상상력을 확대하려면 여러 가지 방대한 자료를 쉽게 바로 꺼낼 수 있도록 전문 지식·기술을 가득 담은 저장소가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 틀밖 상상력은 광각 렌즈처럼 작동해서 혁신가가 문제나 기회를 폭넓은 시야로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독창적인 수많은 해법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 전문성 교류 착상을 더 효과적으로 하려면 남에게 항상 배우려는 개방적 태도, 멘토를 얻는 태도, 수완적 태도가 필요하다.”(381, 387쪽) 저장소는 개인의 머리이고, 상상은 개인의 머리에서 일어나며, 태도는 개인의 태도이다.
이런 접근의 유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중 하나로 들뢰즈가 데카르트의 ‘방법’을 비판하는 대목에 주목할 수 있다. 들뢰즈는 ‘생각에 대한 독단적 상(image dogmatique de la penseé)’을 비판하는데, 그 대표 주자는 데카르트다. 그런 상은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생각의 올바른 본성, 보편적으로 할당된 양식(良)으로 인해 생각은 ‘참(le vrai)’ 또는 ‘진실(vérité)’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갖는다. 생각은 자연스레 진실을 추구하며 진실에 도달한다. 둘째, 우리가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각에 낯선 여러 힘(몸, 정념, 감각적 관심) 때문이며, 이런 힘 때문에 생각은 ‘오류’에 빠져든다. 셋째, 따라서 참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있기만 하면 된다. 방법을 통해 우리는 오류를 몰아낸다. “(김재인, 들뢰즈: 생각에 대한 새로운 상과 예술가적 배움, 《이성과 반이성의 계보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동녘, 2021, 325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란 착상이다. 이 말의 어원은 ‘길(rhodos)’과 ‘나중(meta)’으로 분해될 수 있다. 즉, 방법이란 길이 이미 있고 그걸 따라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길이 이미 있는 걸까? 창의성/창의력을 계발할 방법이 이미 있는 걸까? 오히려 그것은 온갖 실험의 결과로 나중에 오고, 나중에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창의성에 대한 연구가 별다른 실천적 결과를 낳지 못한 것은 발상이 애초부터 잘못되었기 때문 아닐까? 즉, 커다란 혁신이 천재를 통해 도둑처럼 닥치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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