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화와 문명은 거대한 기억 덩어리다. 처음 돌도끼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사건은 이후 전개된 모든 발견과 발명의 징후다. ‘발견과 발명’ → ‘집단이 기억’ → ‘더 큰 집단으로 확산’ → ‘다음 세대로 전승’ → ‘새로운 발견과 발명의 추가’. 이 과정의 반복을 통해 현재의 인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돌도끼를 만든 능력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으로 이어진 출발점이었다. 인류는 초기 이주 과정에서 작은 집단들으로 쪼개졌다. 역사는 인류가 다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충돌과 갈등, 분쟁과 전쟁도 있었고, 교류와 융합, 협력과 협업도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분명한 것 하나는, 한 명의 천재를 길러낸 천재 집단의 역할이다.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은 ‘창조, 천재, 영감, 자유, 독창성, 상상력’ 등에 찬사를 보냈다. 오늘날 천재적 개인에 대한 미신과 신화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이에 대한 지나친 폄하는 나의 시각에서는 온당치 않아 보인다. 낭만주의가 열광한 저 특징들은 인간의 중요한 역량 하나를 확인한 데 대한 놀라움과 신기함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개인을 너무 강조하면 보통 사람의 역할이 축소되리라는 이른바 ‘반민주적’ 경향을 우려할 수는 있겠으나, 천재적 개인의 역할을 얼마간은 인정해야 마땅하다.
이 점은 미시사회학의 창시자 프랑스의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가 잘 밝힌 바 있다. 타르드는 《모방의 법칙》(1890/1895)에서 인간 사회를 ‘모방’과 ‘발명’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명한다(이하 쪽수는 한글본에서). 타르드는 발명과 모방을 구분한다. 발명은 무엇보다 개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발명은 “개인적인 모든 창의”(9) 혹은 “아이디어의 출현”(30)이라고 요약된다. 먼저 생각되어야, 그다음에 모방되고 전파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방은 강이고 발명은 [그 원류가 있는] 산이다.”(31) 달리 말하면, 발명이 미래를 열지 않으면 모방할 것도 없다. 그래서 “발명의 진보가 시간적으로 선행한다”(418).
타르드는 발명과 더불어 ‘발견’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사전적인 의미로 발명이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활동이라면 발견은 있었지만 아직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 활동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 혹은 ‘관념’이 새롭게 출현한다는 맥락에서 보면 발명과 발견은 혼용할 수 있다. 어떤 발견이나 발명은 과거의 것을 “대체”한 것에 불과한 반면, 또 어떤 발견이나 발명은 “축적”될 수 있다(204).
모방은 발명을 뒤따른다. 물론 발명되었다고 다 모방된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발명은 소멸한다. 하지만 일단 모방이 일어나면, 설사 단 두 명 사이에서 생각의 동화작용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그로부터 사회가 형성된다. 그래서 타르드는 사회는 이미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방한 날부터 존재”(60)했다고 말한다. 개인을 제외하면 사회적인 것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타르드의 사회 명목론은 사회가 개인 바깥에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에밀 뒤르켐의 사회 실재론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타르드는 사회는 개인에서 출발해서 개인에서 끝난다는 전제 아래, 개인의 뇌 안의 아이디어(관념)에 주목하고 아이디어의 표현들(언어, 법, 정치, 종교, 산업, 도덕, 예술 등)에 대한 통계학을 사회학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들뢰즈가 그를 ‘미시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칭송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 표현에서 ‘미시’란 아이디어 발명의 원천으로서 개인의 뇌를 가리킨다. 들뢰즈는 뇌를 감각과 운동 사이의 미규정의 중심이라고 정의하곤 하는데, 이 미규정성 덕분에 새로움의 출현이 가능하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진술은 쉽게 이해된다. “발명의 법칙은 본질적으로 개인 논리에 속하며, 모방의 법칙은 부분적으로 사회 논리에 속한다.”(462) 발명은 개인의 사안이지만 모방은 사회의 사안이며, 사회학은 모방의 법칙을 발견해야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존에 누군가의 뇌에서 시작한 아이디어들의 연합과 결합에서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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