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 전인 2018년 5월 7일의 글이지만, 유효한 내용입니다.
나는 손석희 사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손석희가 언론 대기업 사장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손석희는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이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 너무 많은 ‘위조사실(fake fact)’을 생산했다. 특히 ‘앵커브리핑’은 평소 내가 정말 싫어하는 코너인데, 촛불혁명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봤지만(이 당시 공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 수혜도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는 쎔쎔이다), MBC가 정상화된 그날부터 그 코너는 물론 ‘뉴스룸’도 볼 일이 없게 됐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벌어지던 지난 2016년 3월 9일 자 ‘앵커브리핑’을 보자. 3분 10초 짜리이니 시간이 아깝진 않다. 사실 이번 편은 시청자 호응이 많았기도 했다. 소감이 어떠신가?
이번 편은 손석희 사장 특유의 ‘브리핑’ 방식이 농축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뭔가 문학적인 수사(修辭)가 잔뜩 묻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는 사실 자체가 틀린, 뭐 그런 식. 손석희는 마지막 남은 인간다움으로서 ‘낭만’을 들고 있는데, 그 설명이 정말 가관이다. ‘낭만’이라는 낱말을 구성하는 글자 하나하나를 손석희는 이렇게 풀고 있다. “浪 물결 랑, 漫 흩어질 만. 미묘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파동. 언어로는 쉬이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감정, 바로 낭만입니다.” 나는 당일 생방송으로 이 브리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욕이 튀어나왔다. “저런~ 무식한!”
사실 ‘낭만’이라는 말은 서양어 romanticism의 번역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이 말의 어근 부분인 roman(로만, 로망)을 ろうまん(네이버 사전에서 긁어 붙여 발음을 들어보셈)이라고 음차(音借)했으며, 그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浪漫일 뿐이었던 것. (맨날 ‘로망’이란 말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이 사실 모르는 사람 많다!) 즉, 발음을 흉내내서 표기한 것일 뿐이며, 낱낱의 한자는 아무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낭만’은 서양 개념이 한자 문화권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음차'(발음 빌려쓰기)의 한 사례이다. function의 음차 ‘함수(函數)’, geometry의 음차 ‘기하(幾何)’ 등 많은 사례가 있다. 이걸 ‘函數’니까 ‘수를 담는 상자’라고 풀이하거나, ‘幾何’니까 ”얼마’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풀이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그런데 손석희 사장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물론 작가를 탓해야 맞겠지만, 손 사장이 저 작가를 고용했고, 또 오래 살피건대 그게 손 사장의 취향이라는 점에서, 궁극적 책임은 손 사장에게 있다.)
학술 용어는 대부분 서양어의 번역어라서 원어와 어원을 밝히는 게 더 유익해요. 동양의 학술어는 대부분 한 글자였고(仁, 義, 誠, 知 등), 두 글자가 넘어가면 문장이 됩니다. 심지어는 자연(自然)이라는 개념도 서양어 nature의 번역어예요. 노자의 『도덕경』에 ‘자연’이라는 말이 딱 한 번 등장하는데,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의 문장이에요. 따라서 번역어만 갖고 한자로 뜻풀이하면서 논쟁하는 건 무익한 말꼬리 잡기로 가기 십상입니다. 논의를 시작할 때 지금처럼 뜻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공유하는 게 꼭 필요해요.
—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 107쪽.
내가 이번 포스팅에서 강조하려는 점은 딱 하나이다.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의 상당수는 서양에서의 용법에 맞게 풀이해야, 그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다는 것. 번역어를 아무리 뜯어봐도 본디 의미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 이 일은 부디 철학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입된 ‘학문 전반’에 모두 해당한다. 그런데 손석희 사장뿐 아니라 많은 얼치기들이 이런 식으로 개념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논의를 시작할 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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