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쓸모’와 ‘지원’을 둘러싼 담론에 보태

  • 지금 쓰고 있는 책의 일부를 미리 공유합니다.

인문학의 두 부류와 확장된 인문학 : 개념 정리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을 거론하게 되면 항상 헷갈리는 두 가지가 있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혼동이 관찰된다. 요컨대 지금 시대에 인문학은 단일하게 이해되지 않고 항상 섞여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인문학을 둘러싼 이미지를 세분할 필요가 있다. 유래를 거슬러 가보면 인문학이 형성된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서양의 역사를 보면 인문학에는 크게 두 개의 흐름이 있다.

1)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 우선, 라틴어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부르는 활동이 있다. 영어로 표현하면 ‘휴먼 스터디(Human Study)’다. 말 그대로 연구 주제 자체가 인간이다. 이 전통은 인간을 둘러싼 주제와 그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가령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이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 여기에 속한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학문 연구를 하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의 인문학이다. 인간의 언어 속에 담긴 내용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것, 그리고 철학, 역사, 문학, 예술이 담당했던 것이 그것이다.

2) 아르테스 리베랄레스: 두 번째로, 인문학은 교육의 단위다. 즉 교육을 위해서 필요한 과목들을 묶어놓은 것도 인문학이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영어로는 ‘리버럴아츠(Liberal Arts)’라고 부른다. 리버럴 아츠 전통은 교육을 위한 교과목들의 묶음이었다. 특히 유럽 중세에 이런 방식이 많이 유행했다. 서양 중세 대학에서 상급 학부인 의학, 법학,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기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즉 당시의 최고 엘리트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기반 역량을 갖춰야 했다. 이들이 꼭 배워야 하는, 보통 7개로 묶인 과목을 리버럴아츠라고 불렀다. 리버럴아츠 과목의 조합은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꼭 7개가 다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과목이 추가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는데, 어쨌건 7개의 과목이 기본 축이었다. 대학은 아르테스 리베랄레스 교육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와 ‘아르테스 리베랄레스’가 다 인문학이라는 말로 포괄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에서 주로 교수들이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 둘이 혼동되고 있지만, 역사를 보면 한편으로는 연구이고 한편으로는 교육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명료하게 분절해야 의미의 재구성에 도움이 된다. 삶의 의미, 가치를 살피고 재미와 놀이와 비전을 주는 것은 전자(‘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이고, 교육을 위해 알아야 하고 익혀야 할 것을 정교하게 만든 것이 후자(‘아르테스 리베랄레스’)이다. 확장된 인문학에서의 ‘인문학’은 후자에 더 집중되어 있다. 확장된 인문학은 확장된 문해력을 가르치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교육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7개의 리버럴아츠의 흥미로운 지점은 삼학사과(三學四科)라고 부르는 세부 구분이다. 삼학(Trivium)은 문법, 논리학, 수사학으로, 첫 번째 의미의 인문학인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와 상당히 가깝다. 이것은 언어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다. 언어로 된 고전들은 첫 번째 의미의 인문학과 관련된다. 한편 교과목 중 뒷부분인 사과(Quadrivium)는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인문학 혹은 첫 번째 의미의 인문학이라고 하기엔 이질적이다. 수학, 과학, 예술, 이런 것들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중세 유럽에서는 수학이나 과학을 의대생 말고 법대생이나 신학대생한테도 가르쳤다는 점이다. 그 당시 대학의 체제를 보면 이공계열 학생들한테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가르치고 인문사회계열 학생들한테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을 가르쳤는데, 그것도 필수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최고 엘리트가 되기 위해 이 일곱 과목을 다 묶어서 꼭 알아야 할 것으로 교육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독특한 지점이고,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장된 언어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날 세상을 읽고 쓰기 위해서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 같은 자연어 말고도 수학, 자연과학, 기술, 예술, 디지털 등 다양한 것들이 언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언어’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들 언어를 모르면 우리가 세상을 알 수 없고 또 세상에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확장된 언어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그동안 인문학 연구(스투디아 리베랄레스)에 집중했던 분들이 자연어만 고집했다. 그래서 현실 부적응에 빠졌다. 사회에서 인문학이 별 효용이 없다고 느껴지게 만든 가장 핵심 원인이다.

인문학 위기와 극복 : ‘교육으로 기여한 후 연구를 누리자

사실 스투디아 리베랄레스로서의 인문학에 집중하게 되면 당장 한계에 빠진다. 그건 인간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전문 연구자들이 하는 작업인데, 사회에서는 그걸 높게 쳐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연구하는 사람이야 자기가 재밌어서 하는데, 그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잘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가 《더 체어(The Chair)》라는 작품이다. 2021년 코로나 기간 중에 개봉했는데, 미국의 영문과에 처음으로 학과장이 된 주인공(산드라 오 분)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에는 망해가는 영문과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식으로 하면 망해가는 국문과 이야기다. 1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용 중에 기억나는 한 대목이 있다. 학생들은 태블릿과 노트북을 펴놓고 껄렁껄렁 있고, 시인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를 가르치는 노(老) 교수가,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Love is blind).’라는 어구를 만든 사람이 근대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서고, 오늘날 사용되는 일상적 이미지와 관용구의 아주 많은 구절이 1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놀랄 것이라고, 감동스런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학생들은 무표정한 표정이다. 문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전혀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니 인문대학이 망할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외국 교수들의 증언들에 따르면, 전 세계 인문대학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인정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후원받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초서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 중요한데, 그것만으로는 지금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을 읽어도 수학 그래프, 도표 몇 개, 과학과 기술 얘기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마는 일이 계속되면서, 자기 힘으로 세상을 읽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현실의 데이터 분석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 인문학을 오래 공부한 분들의 얘기는 현실적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래서 확장된 언어를 다룰 능력을 누구나 갖춰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확장된 언어 능력은 오늘날 ‘핵심 공통 역량’이다. ‘핵심’은 그것을 꼭 알아야 한다는 뜻이고, ‘공통’은 누구나, 예술을 하건 공학을 하건 문학을 하건 모든 시민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미래 세대 누구나가 꼭 알아야 되는 역량이 확장된 문해력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실제로 확장된 언어를 배우고 있다. 교과목으로 수학이나 과학은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될지는 몰라도, 사실 수학이나 과학은 세상을 읽어내는 눈을 길러준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초등교육은 무의식적 차원에서나마 어느 정도 확장된 언어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확장된 언어 능력을 ‘학습 도구어’ 혹은 ‘사고 도구어’라는 말로 표현하며 언어의 폭을 넓혀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등과정 교과목이 대학의 전공 과목의 하위 혹은 예비 단계로 이해되는 경향은 여전하다. 달나라도 가고 인공지능도 만들고 유전자도 재조립하는 시절에 누구라도 수학, 과학을 모르면 안 된다.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되는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시대에 누구나 그것은 알아야 한다는 점만큼은 명백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두 번째 의미의 인문학(아르테스 리베랄레스로)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대학은, 또한 인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먼저 지적할 점은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교차로 장면,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리버럴아츠(Liberal Arts)’ 이야기할 때, 이 리버럴 아츠는 아르테스 리베랄레스의 3학4과를 다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걸 그냥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서 ‘인문학도 중요하다. 스티브 잡스가 얘기했다.’고 많이 써먹었는데, 순전한 거짓말이다. 실제로 잡스는 산술, 기하, 음악, 천문학에 해당하는 것까지를 포괄하는 전통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곱 교과목과 기술이 합쳐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리버럴 아츠로서의 인문학은 현재성을 갖고 있다. 즉, 사회가 필요로하고 사회에 효능감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주제 연구에 속하는 인문학(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과 교육을 위한 과목의 모임에 속하는 인문학(아르테스 리베랄레스)을 구별하고, 교육 부분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 교육에서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은 문해력, 리터러시다. 이 부분은 과거 인문학이 주로 담당했던 영역이다. 예전에는 자연어를 잘 알면 인간과 세상을 잘 알 수 있었다. 즉, 세상과 인간을 읽고 쓰는 능력이 인문학을 통해서 구현됐던 ‘좋았던 옛 시절’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오늘날 전통적인 언어, 좁은 의미의 언어, 자연어만 알면 세상을 읽고 쓸 수 없다. 확장된 언어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다. 이걸 모르면 세상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까, 언어다. 이 확장된 언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인 확장된 문해력이 핵심 공통 역량이다. (이 주제는 별도로 글을 쓴 바 있다. 《AI 빅뱅》 5, 6장 참조.)

그걸 가르치는 것이 확장된 인문학 교육이라고 본다면, 할 일이 사실은 굉장히 많다. 그리고 인문학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이 전통적인 인문학자 연구자만이 아니라,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디지털을 다루는 분들까지 일정 부분 역할을 같이 할 수 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 교육뿐 아니라 전 세계 교육이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 혹은 지원과 관련한 논의에서 ‘연구’가 중심에 놓여서는 해법을 찾기 힘들다. 기껏해야 ‘쓸모’를 입증하고 ‘지원 당위성’을 설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그건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교육이다. 인문학은 ‘교육’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그에 합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으면 된다. 그 후에 자기 하고 싶은 연구도 병행하면 된다. 기초 연구니 사상의 토대니 문화 콘텐츠의 원천이니, 아무리 주장해도 소용없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돈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구걸하는 데 실패하면, 돈을 스스로 벌어야 한다. 운이 좋다면 시민들이 돈을 퍼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 그런 일은 생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집중해왔다.

인문학의 두 부류와 확장된 인문학 : 두 가지 기대 효과

미래 세대가 확장된 문해력 교육, 핵심 역량 교육을 받으면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1) 교육과 재교육 혁명: 첫 번째 기대 효과로 교육과 재교육의 혁명을 기대할 수 있다. 즉, 학습 능력 자체가 길러진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보통 기초적이고 핵심이 되는 역량 교육은 대학교까지 거의 끝나는데, 그때가 20대 초반이다. 100세 시대에 앞으로 지금 세대는 인생에서 8~10번 정도 직업이 바뀔 것이라는 어떤 미래학자(토머스 프레이)의 주장이 있다. 미래학자는 뻥이 좀 심하니까 완화해서 받아들이면, 다섯 번쯤 직업을 바꾸고 새로운 업무를 익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평생에 걸쳐 재교육이 계속 필요하다는 얘기다. 일정 기간 연수를 받고 재교육을 받고, 그다음에 직업을 바꾸고, 이걸 계속해야 한다. 만약 젊었을 때 기초 학습을 포기했다면 그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른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여태까지 받은 식의 교육으로는 안 된다. 중2 때 ‘수포자’는 문과 가고 ‘언어맹’은 이과 가는 식이면 폭넓은 재교육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재교육 가능 분야가 굉장히 제한된다. 따라서 언제든 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성인이 되기 전에 학습 역량을 길러줘야 한다.

재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에 해당하는 핵심 공통 역량이 필요하다. 사라지는 직업에 대해서 사후적으로 기본 소득으로 보전해주느니 하는 얘기도 있지만, 어렸을 때 이 역량을 더 적극적으로 키워놓으면 나중에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할 때 충분히 배울 역량을 갖추게 될 것이다. 성취도는 개인차가 나겠지만, 공교육에서는 개인별 눈높이를 잘 맞춰주는 것이 필수가 아니겠는가. 어렸을 때 악기를 배우면 몇십 년 동안 연주를 안 하다가도 나중에 금방 배운다. 핵심 공통 역량 교육도 이와 비슷하다. 뭔가를 몸에 배게끔 습득할 수 있는 나이, 학습이 가능한 시기가 있고 나이가 있고(보통 뇌 성장이 이루어지는 25세까지라고 한다), 그다음에 뭘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시기가 있는데, 학습이 잘 되는 시기까지는 최대한 익힐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다. 지금의 주장은 당연히 입시라는 현실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입시는 다르게 접근해서 풀어야 할 문제다(정치적 해법 말고 답이 없어 보인다). 어쨌건 그런 역량을 키워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성장이 멈추는 것이 25세 정도, 그러니까 대학교 나이 정도까지는 핵심 공통 역량을 습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때 충분히 습득을 시켜놓으면 한참 뒤에도 재교육이 가능하다. 최소한 새로 등장한 것에 대해 겁내지 않고 뛰어들어 볼 용기가 생긴다.

2) 융합 작업의 토양 마련: 두 번째 기대 효과로 교육 현장에서 늘 얘기하는 융합 작업이 가능해진다. 우리 시대의 화두인 융합 인재를 기를 수 있게 된다. 잡스의 아이폰 말고 융합의 성공 사례를 잘 떠올리기 힘드는데, 그 이유는 융합에 대한 접근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융합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대체로 우리 세대는 체계적인 측면에서 융합 교육을 배워본 적이 없고, 개인적인 연수는 좀 받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연수를 진행하는 강사까지 포함해서 대부분은 융합 교육을 배워본 적이 없고 그래서 잘 해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나아가 융합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것도 거의 그냥 말장난이다. 자기도 못하는데 어떻게 가르치나. 한국에는 2005년부터 ‘통섭’이 유행했으니 대략 20년 됐다. 그때부터 통섭이니 어쩌니 계속 얘기했는데, 성공 사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가 뭐냐?

무엇보다도 정의를 잘해야 한다. 융합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최고 전문가들의 협업이다.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이 만나야 새로운 불똥이 튈 수 있다. ‘협업’이 아니면, 자기 생각 안에 갇힌 채 머물게 된다. ‘최고 수준의 전문가’가 만나지 않으면, 그저 고만고만한 자잘한 결과밖에 안 나온다. 융합은 개인 활동이 협업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누가 협업해야 할까? 자기 전문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 깊이 있는 전문가의 협업이어야 한다. 영역이 다른, 분야가 다른 전문가들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평생 생각도 안 해봤던 것을 상대방이 줄 수 있다. 서로 그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불꽃, 이것이 융합의 출발점이다. 만약에 그 수준이 되지 않았는데 만나서 협업하면, 만나서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결과물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대한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시도는 정말 많이 해봤다. 그런데 왜 성공을 못했느냐? 말이 안 통했다. 이건 아주 정확한 얘기다.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했다. 아마 해본 분들은 잘 알 것이다. 기업에서도 정부에서도 대학에서도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을 어떻게든 수소문해서 한데 모아놓긴 했는데, 이 안에서 말이 안 통했다. 살면서 서로 너무 오랫동안 다른 언어로 말해왔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해서 기회가 만들어져 강제로 만나긴 했는데, 서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사용하는 용어가 완전 다르고 말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 맨날 골프 얘기하고 주식 얘기하고 부동산 얘기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할 수 있는 얘기가 그것밖에 없다. 이런 증언도 많이 들었다. 3~5년의 협업 프로젝트 끝나고 나서 뒷풀이 자리에서, “당신이 그때 했던 얘기가 그런 뜻이었냐?” 하면서, 겨우 이해했다는. 물론 프로젝트는 실패한 후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풀이됐다. 그러니까 융합 프로젝트를 해도 대부분이 실패한 이유가 그런 데 있다. 그러니까 결국 제대로 된 본격적인 융합 실험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이 만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확장된 언어 능력으로서의 인문학이 바탕에 있어야 융합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잡스는 좀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한 20살까지 공통 핵심 언어를 익혀놓고 나면, 그 후에 10~15년 전문가의 길을 가다가도 다시 만났을 때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융합 인재를 기르는 것도 아니고 융합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어떻게?), 토양을 만들고 씨를 뿌리는 정도까지다. 이런 여건을 만들어주면 다음 세대, 미래 세대는 여기저기서 융합 작업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확장된 언어 능력이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런 실험이 성공할 수 있게끔 토대를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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