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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들뢰즈, 이진경, 탈주의 철학? (펌)

avid 2005.10.06 01:24 조회 수 : 4598 추천:29

http://sesk.net/board_up_bookreview/content.asp?num=14&RC=&page=1&block=들뢰즈, 이진경, 탈주의 철학? /오길영 | 책읽기 2005/08/29 11:29  

http://blog.naver.com/stupa84/100016649963

1.

나는 요즘은 별로 철학이나 이론에 관심이 없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굳이 예전처럼 새롭게 등장하여 나를 현혹하는 유행이론들을 뒤따라 배우는 데 예전보다 시들해졌다는 게 맞겠다.

물론 대학에서 주로 비평이론과목을 가르치는 문학선생으로서 철학이나 이론에 관심이 없어서야 안되겠지만 솔직한 내 심정은 그렇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물론 일차적으로야 내가 게으른 탓이다. 그러나 과연 내 게으름이 모든 이유일까?

얼마 전에 나는 여기에 올린 어느 잡글에서 한국의 (진보)학계에서 이루어지는 (서양)이론수용 모습을 6개월마다 반짝 등장했다 사라지는 한국의 댄스뮤직가수들과 비유한 적 있다. 물론 매우 냉소적인 표현이다. 그걸 나도 알고 쓴거다.

왜 그런 험한 말을 나는 했을까? 자문해본다. 거기에는 내 마음의 어떤 불편함이 있다. 80년대부터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루어져온 이땅의 천박한 지적 상업주의에 대한 불편함.

이론상품 판매의 대상은 물론 계속 바뀌어왔다. 80년대는 맑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으로 포장된 교조적 스탈린주의), 루카치, 벤야민 등의 맑스주의 미학가 득세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초에 인기를 얻었던 알뛰쎄와 발리바르의 전화된 맑스주의가 생각난다.

그러더니 90년대 초부터는 주로 프랑스 이론가들이 들먹여졌다. 데리다. 푸코, 부르디외 등. 요즘은 라캉이, 그리고 누구보다 들뢰즈/가타리의 '탈주의 철학' 그리고 네그리 등의 이른바 자율적 맑스주의가 잘 팔리는 상품인가 보다. 그런데 이들 새 상품의 유행은 또 얼마나 갈까? 이들이 상품판매대에서 사라지면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새 상품이 이 나라의 지식판매대를 장식하며 손님을 호객할 것인가?

오해없기를. 나는 여기서 무슨 이론무용론, 혹은 이론적 허무주의를 말하는게 아니다. 나름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론이라면 그것은 일단 공부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일게다. 그리고 이론은 공부할 거면 철저히 해야 한다. 그 의미와 한계까지 포함해서. 이미 유행에서 지나간 모든 이론들이 그랬듯이 지금 잘 팔리는 들뢰즈나 네그리도 그 나름의 이론적 유효성을 지니고 있을게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이니.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런 이론들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지나치게 진지하다. 혹은 지나치게 경박하다. 마치 새로운 이론이 현실을 모두 설명해주기나 할 듯이.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론은 현실에서 즐겁게 갖고 노는 장난감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 위해 갖고 노는 함부로 다뤄서는 귀중한 장난감이다. 지나치게 진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잠깐 갖다 놀고 버려서도 안되는 장난감.

그러나 이제는 철지난 이론들이나 지금 잘 팔리는 이론들을 대하는 이곳 학계의 지식인들의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물론 그 지식인들의 명단에는 나같이 대학에서 (비평)이론을 가르치는 사람도 당근 포함된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지지 않은 태도인가? 잠깐의 열광과 곧 찾아오는 환멸. 마치 댄스음악 유행처럼. 진중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자신이 매혹된 이론을 찬찬히 뜯어보는 노력의 부족.

그래서 잠깐 즐겼다 싫증나면 버리는 댄스음악처럼 이론은 소비된다. 어떤 깊이있는 논의도 없이. 우리 나름의 비판적인 연구작업도 없이. 이제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되어버린 숱한 이론들이 그렇게 소비되었다. 그 소비의 운명에서 들뢰즈나 네그리라고 과연 다를까?

2.

나는 그것을 들뢰즈의 주저라는 <천개의 고원>의 해설서를 자임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읽으면서 다시 느낀다. 이진경같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들뢰즈에 열광하는 들뢰즈주의자들에게 들뢰즈의 말들은 거의 '성경'처럼 읽힌다. 나같은 회의주의자가 보기에는 조금 웃기는 일이다.

어떤 이론도 현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들뢰즈든 누구의 이론이든. 그 평범한 진실을 잊고 마치 들뢰즈의 '탈주의 철학'이면 이 새로운 시대의 현실을 풍요롭게 설명할 수 있다는 당찬 자신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들뢰즈의 저서가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마치 성경을 해설하듯이 주석을 달만한 완벽한 책인가? 의심스럽다. 물론 내 주관적 판단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적 성향이 다분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어떤 경우에나 회의주의자여야 된다고 믿는다. 그 회의주의의 대상이 현실이든 어떤 '쌈빡'해보이는 이론이든. "저 이론이 과연 얼마니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회의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 아는 얘기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내 마음이 편치는 않다. 왜냐면 나는 들뢰즈의 이론적 유효성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맑스가 그랬던가.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번도 없다"고. 그러니 나도 들뢰즈를 온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내 "무지"를 벗어야겠다. 그래서 큰맘먹고 엄청 두꺼운 책,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읽었다. 끙끙대면서 무려 상,하권 1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소감? 우선 어떤 사상가에 대해 이 정도의 소개서를 쓰는 저자의 능력은 대단하다. 아니 전부터 나는 이진경의 '천재성'에 감탄해왔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은 들뢰즈의 그 난삽한 이론들을 거의 '성경'처럼 읽으면서 주해를 다는 그의 태도에서 나온다. 이쯤되면 들뢰즈교 '성도'라고 해야 하나.

물론 변명도 가능하다. 이진경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슨 비판적 소개가 아니라 일단 들뢰즈의 어려운 책인 <천개의 고원>을 대중에게 제대로 해설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게 이 책의 기본적 관점에 대한 변명이 될까? 과연 <천개의 고원>이 무슨 그냥 믿고 따라야 할 이론의 '성경'에 해당하는 대단한 책일까? 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론에 마냥 빠져서 현실의 모른 일을 들뢰즈의 이론으로 재단하려는 태도가 온당한 것인지 나는 여전히 삐딱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하는, 그리고 들뢰즈를 따라 (몇몇 영미연 회원들을 비롯해서) 이 땅의 들뢰즈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탈주의 철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이제 철지난 이론들이 보여주지 못한 어떤 공백지점을 과연 제대로 포착하고 있는가? 남는 질문들이다.

3.

철학이니 이론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철학의 역할은 별게 아니다. 대중들이 현실에서 경험적으로 겪고있으며 그들이 막연히 알고는 있으나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대상에 명료한 표현을 주는 것. 그런 점에서 철학은 개념의 발명이라는 들뢰즈의 발언은 내가 보기에 옳다. 철학의 개념들은 현실의 명료한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난삽한 철학개념들도 이 전제 위에서만 그 난삽함이 용서된다.

그러나 <노마디즘>에서 이진경은 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그는 들뢰즈의 현란하나 난삽한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의 평범한 예를 제시한다. 어렵고 불명료한 철학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의 쉬운 예들이 동원된다. 이쯤 되면 드는 의문. 철학이 현실을 위해 있는 건가. 아니면 현실이 철학을 위해 있는 건가. 헷갈린다. 하나의 예.

"몰적 선분성 안에서 정의된 바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겐 안정과 출세를 위한 규범이나 척도로 보이겠지만, 그러한 방식의 성공과 실패에 무관심하거나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자신의 삶을 절단하여 바치게 되는 파괴의 과정"(<노마디즘> 상권 621).

이게 아마 들뢰즈주의자들이 말하는 탈주의 삶이리라. 자본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미학'을 실천하는 '자유'로운 혹은 '자율'적인 삶을 사는 것. 그러나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난삽한 "몰적 선분성"이니 "자신의 삶을 절단"이니 하는 생경하고 알 듯 모를듯한 개념이 필요한가.

이진경같은 들뢰즈주의자들은 그게 다 현실의 명료한 설명을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게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억압하지 않고 '자유'로운 살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대중도 몸으로 안다. 문제는 거기서 '탈주'하는 것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걸 다루지 않고 그냥 탈주의 삶이니 탈주의 철학이니 하며 탈주의 가치를 되뇌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폼나는 일일지 모르나 '객관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자족주의가 되기 쉽다. 내가 탈주의 철학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냉소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대중이 뻔히 아는 문제를 새롭고 의미 있게 제기하는 데 이런 난삽한 개념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심스럽다. 이게 여전히 내가 무식해서 그런건가? 그리고 과연 그렇게 사는 '자율'적 삶은 얼마나 가능한가?

<노마디즘>에는 들뢰즈가 구사하는 숱한 생경한 개념들이 소개된다. 탈주, (재)영토화, 탈영토화, 공리계, 리좀, 유목주의, 자율주의, 기계, 탈지층화, 지층, 몰적 선분, 선분적 삶, 탈주선 등. 꼼꼼히 이진경의 설명을 따라 가다보면 대충은 무슨 개념인지 이해는 간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렇게 기존 이론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을 제시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가지만 보자. 이른바 탈주에 대해. 어디로부터 무엇을 위한 탈주인가?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로부터의 탈주? 아마 그런가 싶다. "소수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분쇄고 사회주의의 재정의 ...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하여 계급적 운동과 계급혁명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대중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에 기초하여 당이나 당적 운동을 재정의 하는 것" (상권 703).

이게 들뢰즈가 말하는 탈주의 철학이다. 그리고 좋은 말들이다. 그러면 묻자.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계급혁명의 재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대중의 욕망에 기초한 "당이나 당적 운동의 재정의"는 가능한가. 주장은 있되 설명은 없다.

4.

들뢰즈주의자 이진경의 설명에 따르면, 그런 욕망을 지닌 대중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소수자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존재미학'을 실천하는 소수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상이나 이론, 예술, 과학은 물론, 운동과 삶의 방식에서 국가주의적이고 다수적인 방식과, 그에 반하는 소수적이고 생성적인 방식, 그래서 고착과 고체가 아닌 흐름과 액체, 변환과 변이를 통한 방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권 465)

좋은 말이다. 그러나 역시 모호하다. "소수적이고 생성적인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기존 동양철학의 수신이나 도의 철학, 불교가 가르치는 무아의 철학과 다른 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개인적인 수신의 철학이나 소수자들의 미약한 연대가 과연 어떻게 기존의 "국가주의적이고 다수적인 방식"을 개혁할 수 있는가? 남는 질문이다.

5.

자율적 삶? 듣기 좋은 말이다. "자신의 삶과 운동, 사유와 연구에서 유목주의를 실행하는 것" (하권,466)? 역시 듣기 좋은 말이다. 누가 이 강력한 자본주의의 삶,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탈주'하여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살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유목민처럼 여기저기 자유롭게 떠돌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대중은 그런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그렇게 못산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를 설명해야 한다. 개인적인 차원의 새로운 '삶의 윤리'를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대단하다는 들뢰즈의 철학이 기껏 수신의 철학은 아니지 않겠는가.

맑스가 예리하게 분석했듯이 우리시대의 매트릭스인 자본주의의 힘은 몇몇 각성한, 혹은 탈주한 개인의 주관적인 각성이나 자족적인 '연구자 공동체'의 소수자적 삶의 실천으로 깨지지 않는다. 이걸 잊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를 물로 보지 말란 것. 그게 여전히 유요한 맑스의 통찰이다.

자율주의에 대한 설명을 보자.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고,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풀어가고자 하는 것, 공동의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그것으로써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을, 그런 삶의 지대를 만들어가는 운동을 자율주의라고 정의" (하권 599).

역시 멋진 표현들이다. 그러나 그런 "자본주의적 공리계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소수자들이 이루는 "공동의 규율"에 따른 집단--예컨대 이진경이 속해 있고 듣자 하니 거기속한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공동체가 무슨 '코뮌'이라고 자부한다는 집단--은 과연 이 막강한 자본주의적 공리계의 해체를 위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런 집단이 그들만의 자족적인 연구자 '코뮌'이 되지 말란 법은 과연 없는가? 자율이라는 말 함부로 쓸게 아니다.

주관적으로 '자율적인' 삶을 살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자족적인' 연구자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가능하다. 그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

그런 자족적인 '코뮌'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공리계"를 대체할 힘을 갖고 있느냐는 점. 이 사실을 잊을 때 그런 "공동의 규율"은 그들만의 자족적 공동체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막강한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매우 무기력한 집단이 되기 쉽다.

나는 이점에서는 이진경의 코뮌주의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이 원칙적으로 옳다고 본다. 이른바 이진경이나 그가 속한 모연구자 공동체, 더 나아가 이땅의 들뢰즈주의자, 혹은 자율주의들이 말하는 "코뮌적 삶"의 문제.

그들이 꿈꾸는 '코뮌'은 과연 "사상의 공동성에 근거한 인텔리의 연구공동체"인가? 혹은 "그 이전에 그의 '코뮌주의'는 사회 전체의 개조를 위한 매크로 기획인가? 아니면 거기서 빠져나온 몇몇 '탈주자'들을 위한 마이크로 기획인가"(<폭력과 상스러움> 113)

언제나 그렇듯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엄정한 자기성찰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론이 설사 정신 못차리고 푹 빠질 정도로 매혹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힘과 견주어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냉철하게 평가할 줄 아는 능력. 그게 들뢰즈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어떤 이론에 대해서든 그것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언제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신과 현실을 성찰하는 능력. 나는 80년대 탁월한 '리얼리스트'중 한 명이었던 이진경이 점점 자족적인 "인텔리의 연구공동체"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6.

한참 전에 내가 모선배와 같이 번역했던, 루카치의 자전적 대담을 모은 책에서 읽은 루카치의 비유 하나가 생각난다.

"맑스주의는 철학적 개념의 히말라야 산맥이지만 히말라야에서 뛰어 노는 꼬마 토끼가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을 "계곡의 코끼리"보다 더 크다고 믿는 꼬마토끼, 진보토끼, 들뢰즈주의자 토끼. 그 토끼가 실은 나 혹은 내가 속한 학문공동체, '꼬뮌'이 아닌지 성찰 하는게 필요하다. (여기서 영미연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자신(들)이 진보적이고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단체)일수록 "히말라야에서 뛰어 노는 꼬마 토끼"가 되기 쉽다.

그러나 그 히말라야 밖에는 방대한 현실의 세계가 있다. 따라서 주제 파악 못하는 "꼬마 토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뛰어 노는 곳, 내가 갖고 노는 이론이라는 장난감의 힘을 항상 객관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그 장난감이 들뢰즈, 네그리, 맑스, 데리다, 푸꼬, 라캉, 혹은 노자, 장자, 그밖에 무엇이던지 마찬가지다. 그 장난감을 토끼가 맞서 싸워야 할 "계곡의 코끼리"가 지닌 막강한 힘과 항상 견주어야 한다. 이 말을 무슨 패배주의를 조장하는 말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단지, 현실의 힘과 논리를 제대로 인식하는 '리얼리스트'의 자세를 말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점은 명색이 '삐딱이' 지식인을 지향하는 나 자신에게 우선 하는 말이다. 진부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공감이 가는 어귀 하나가 떠오른다. 이론의 회색성을 언제나 푸르른 현실의 풍요로움과 견주었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리스의 독백. (진보)학계에서 들뢰즈주의가 잠시 유행인 이 시점에서 잊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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