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대략 640개의 골격근이 있다고 한다. 골격근이란 뼈를 움직이는 근육이다. 그밖에도 심장을 뛰게 하는 심근이나, 내장을 움직이는 민무늬근(평활근)도 있다. 이 많은 근육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동작한다. 손가락을 움직인다 치자. 11개의 근육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움직이지만, 우리는 근육 하나하나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근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점에서 근육 운동은 무의식적이다.
근육 중 어떤 것의 어떤 부위에 문제가 생겨야 우리는 비로소 ‘통증’의 형태로 근육의 존재를 의식한다. 존재가 손상을 통해 비로소 느껴진다고나 할까. 최근에 필라테스를 하면서 깨닫게 된 건데, 이런 종류의 운동은 근육의 존재를 직접 자각하게 한다. 통증이 수반되기도 하지만(처음엔 너무 아프다), 시간이 지나며 통증과 무관하게 근 섬유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이런 무의식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무의식은 탐구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접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의식의 존재는 일상의 틈을 통해 표출된다. 혹은 실험적 조작(experimental operation)을 통해 측정된다. 프로이트가 실수나 꿈을 통해 무의식의 존재를 알아챈 건 이런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무의식은 여기에 국한하지 않는다. 또한 프로이트가 했듯, 그리고 라캉이 뒤를 이었듯, 무의식이 언어 진술을 통해 탐구될 수 있다고 단언해서도 안 된다. 그건 무의식의 종류와 범위를 좁히는 일이자, 무의식을 왜곡하고 가두는 일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에 반대하는 사조는 주되게는 들뢰즈·과타리에서 빛을 발하지만, 들뢰즈・과타리가 참조한 많은 선행자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많은 이들이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다른 길을 간 이들. 대표적으로 과타리 본인이 그러하다. 빌헬름 라이히, 멜라니 클라인, 브루노 베텔하임, 로널드 랭, 프란츠 파농, 데이비드 쿠퍼, 에리히 프롬, 칼 야스퍼스, 칼 융, 모 마노니, 허버트 마르쿠제 등도 그러하다. 무엇보다 프로이트보다 앞선 맑스와 니체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제 나름으로 무의식을 탐구했으며, 그 성과를 다시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이들을 꼼꼼하게 참조한 들뢰즈·과타리를 읽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무의식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로, 무의식은 자기도 모르게 의식을 규정하는 힘 혹은 요인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근육도 이에 속하며(니체는 무엇보다 내장 상태를 꼽았다), 206개에 이르는 성인의 뼈도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개인과 집단의 과거의 경험(특히 잊힌 경험), 건강, 기후 조건(온도, 습도, 기압, 조도 등), 지정학, 경제 상태, 과학기술, 제도 등도 무의식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주어진 조건이기도 하지만 만들고 구성할 수 있는 여건이기도 하다. 들뢰즈·과타리는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을 확장하고 해방했으며, 나아가 구성 가능한 여건으로 제시한다.
들뢰즈는 역사와 생성을 구분하곤 했다. 역사란 주어진 조건인 반면, 생성은 그 제약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무의식에 대한 착상에서도 같은 얘기가 가능하다. 무의식은 (개인의) 역사에 의해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사회가) 실천을 통해 구성하는 여건이다. 그래서 들뢰즈·과타리한테는 ‘무의식을 생산하라’라는 구호가 성립한다(참고: 김재인, “무의식을 생산하라: 들뢰즈의 정치철학”, 철학, 혁명을 말하다: 68혁명 50주년 [이학사]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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