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多讀)은 쓸모없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생각’을 신뢰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무엇보다 ‘왜 읽는가?’라는 문제부터 답해야 한다.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자극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에는 정보, 지식, 기술 같은 것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것들이 생각의 땔감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땔감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있다. 역사, 과학, 지리, 기술 같은 것은 많이 알수록 좋은가? 많이 알 수만 있다면야 다다익선이다. 하지만 기억의 왕 푸네스처럼 정보가 쌓이다 보면 그것을 처리할 시간이 반비례해서 줄어든다. 즉, 멈추어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 한 권을 읽고서 얼마의 시간 동안 생각해야 책에서 얻은 자양분을 충분히 체화할 수 있을까? 책이 주는 자극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책은 며칠을 생각에 잠기게 할 텐데, 만약 이런 책을 읽고서도 생각에 시간을 내어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책을 집어든다면, 책을 읽는 효용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어쩌면 이런 태도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기 위해 읽기(lire pour lire ; reading for reading’s sake)’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리라.

더욱이 어떤 주제에 대한 정보가 일정 높이에 이른 상태에서라면, 그 높이를 채우려 노력하는 것은 부질없게 된다. 가령, 대표적으로 역사나 교양 과학이 그럴 것이다. 물론 읽을 책은 너무 많고 더욱이 계속 쌓여간다. 그렇다고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개론 수준의 정보를 더 쌓을 필요는 없다. 철학을 오래 공부해온 내가 시중의 교양 철학책을 거의 읽을 필요가 없는 것과 거의 같은 이치다.

왜 읽는가? 일정 수준의 정보를 얻은 후에는 자극제가 될 책만 읽어도 충분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다독가가 우를 범한다. 다독가 중에 훌륭한 분이 많지만, 의외로 생각의 깊이가 얕은 이도 많다. 그 많은 책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우다. 사실의 나열, 끝없는 나열,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하는 경우. 혹은 자신의 얕은 생각 혹은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짜깁기 식으로 정보를 활용하는 경우. 보통 사람은 지식의 양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초거대 언어모델(LLM) 인공지능에 대한 경탄도 다독가 앞에서의 위축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많이 알아서 뭐 어쩔 건대? 어쩌라고?

정보의 양은 생각의 깊이와 폭을 결정하지 않는다.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또 예리해지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충격, 공포, 절망, 놀람, 기쁨 등 다른 독서 경험, 혹은 다른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날것의 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책 안으로 도망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어떤 원치 않는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건 나쁜 경험을 양분으로 삼아 자기를 성숙시키는 엄청난 활동이다. 독서는 일부러 날것 속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실천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안전하지 않는 체험을 기꺼이 마주하려는 실천. 니체가 자주 묘사하듯, 모든 용감한 자들, 미지의 것을 동경하는 항해자들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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