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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들뢰즈 커넥션.... 아직 안 사길 잘한 건가.......???

뻘건망또 차차 2005.09.07 21:19 조회 수 : 4383 추천:58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을 읽기 시작한 지 좀 됐지만,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건 내가 따로 전공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죽죽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뢰즈 철학 전반에 대한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수준높은 개관을 제공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편하게 읽히는 내용은 아니며 번역 또한 그러하다. 책에 대한 리뷰와 함께 번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보기로 한 바 있지만, 그게 예상보다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몇 차례 나누어서 다루어야 할 듯하다. 당장에 다룰 건 제5장 '삶'이다. 한동안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게 된 장이기도 하지만(그래서 기억이 용이하다), 번역에서 가장 문제적인 '실수'를 포함하고 있기에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어서이기도 하다.  

역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이지만, 아쉽게도 이 번역서는 그의 '명성'에 그닥 도움이 될 듯하지 않다. 독자적인 번역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자유/권리이겠지만, 그러한  자유/권리가 다른 역자의 사례이지만 '존 라이크만'의 또다른 책, <건설들(Constructions)>을 '존 라흐망' 의 <들루즈건축>(접힘펼침, 2004)으로 옮기는 수준이 되면(<들뢰즈 커넥션>의 22쪽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그 책이다), 그러니까 비유컨대, '들뢰즈'를 '들루즈'로 옮기는 식이 되면, 문외한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들뢰즈 철학이 '들뢰즈'라는 고유명사가 함축하는 '인격'이나 '주체'에 대해서 심히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그런 들뢰즈의 정신에 충실하자면, 우리는 그를, 들뢰즈라는 다양체를 '들뢰즈' '들루즈' '들러즈' '들레즈' '델레우즈' 등으로 매번 다르게 호칭해야 될지도 모른다).

역자의 '실력'을 십분 인정한다고 할 때(그렇게 쉬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뢰즈 커넥션>은 출간 이후 계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있는데, 거기엔 역자에 대한 '신뢰'와 입문서에 대한 '기대'가 반영돼 있을 것이다).다), 이 책의 후반부 작업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그건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를 읽으면서 느꼈던 바이기도 하다).  가령, 145쪽에서 '기존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inattributable)'에 병기된 영어 단어는 'unattributable'의 오타이다. 이게 발견일 것도 없는 것이 152쪽에 '설명할 수 없고'란 말이 다시 나오면서 이번엔 'unattributable'로 병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대세의 차이는 없더라도 '귀속시킬 수 없는' 정도의 뜻 아닌가 싶다.  

언어학의 '화용론(pragmatics)'를 '화행론'으로 일관되게 옮겨주는 것은 역자의 고집이자 권리일 테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걸 때로 '실천학'이라고 옮기는 것도 '실천(praxis)'이란 말에 '아주 약한' 철학자/지식인들의 편향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들뢰즈의 '실천주의'라고 부르는 것도(이상은 24쪽 역자주). 하지만, 이런 식의 '자유'가 통용/허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데서 뭔가 '제 실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세심함이나 치밀함 같은 것 말이다. 한데, 153쪽에서 '비인칭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례로 들고 있는 "it is dyng."이란 문장을 '그것이 죽어간다'라고 옮긴 것은 눈을 의심하게 한다. 바로 뒷페이지에서 '말하고 있다(it is talking)'이나 '이야기하고 있다(it is saying)'로 옮겨진 문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it's raining.'에서와 마찬가지로) 'it is dying.'의 'it'은 비인칭 주어인데 말이다.

물론 어떤 번역이 무오류적으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만, 뭔가 과감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번역이라면 좀더 꼼꼼하게 재검토/교정 작업을 진행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소 성의가 부족해보이는 이 번역서에서 결국이 '사건'이 터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161쪽에서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 앞에는 '그런 가족주의'에 해당하는 내용이 뭉텅으로 누락돼 있다. 오이디푸스 비판과 관련한 대목이어서 유심히 원서를 읽고 대조해보기 위해 번역문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두 줄도 아니고, 어떻게 열줄이나 누락될 수 있는 건지 신기했지만, 하여간에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실수일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최종교정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빠진 대목은 이렇다: "The problem with psychoanalysis is that having discovered such presubjective 'powers,' such complicating impersonal 'virtualities' of our libidinal bodies and their 'vicissitudes' in our lives, it enclosed them with a new system of 'personalizing' identification - that of the family and the 'images' of familial persons, as if the unconscious were only a kind of deficient identification within the family order."(90쪽)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우리의 리비도적 몸체의 복잡한 비인칭적 '잠재성'과 우리 삶에서의 그 '변화과정' 같은 주체 이전의(=前주체적) '역량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량들을 새롭게 '인칭화하는' 동일시 체계로 덮어버린 데 있다. 즉, 가족의 체계, 가족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들'의 체계로 말이다. 마치 무의식이란 게 단지 가족 질서 내에서의 일종의 불완전한 동일시 정도밖에는 아니라는 것처럼."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라는 건 거기에 이어져야 한다.

제5장에서 저자는 제4장에서 다룬 다양체/다양성(multiplicity)의 문제를 이어받아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들뢰즈/가타리의 강령적 선언을 풀이하면서 시작한다. 즉 '다양의 실천학'(=다양성의 화용론)에 의해 제기되는 물음은 차라리 "우리의 뇌는 새로운 비표준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도록 항상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이러한 소수언어의 화행론(=화용론)은 들뢰즈에게서 더 넓은 (범주의)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에 속한다. 왜냐하면, "다양체들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개인으로서의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

다시 말해, "다양체들은 사회가 우리를 나누어놓는 그램분자적 방식보다 앞서며, '인격들'이나 '주체들'이라는 우리의 바로 그 관념들보다 앞선다."(144쪽) '그램분자'라는 건 흔히 '몰'로 번역돼왔던 것이며, 나에겐 몰이란 표현이 익숙하다. 그러니까 화학에서 '분자/몰'의 대립구도를 들뢰즈는 '다양체/인격들 혹은 주체들'이란 구도로 변주하고 있는 것. 분자들이 보여서 몰을 구성하듯이, 인격들(혹은 주체들)을 구성하는 건 다양체들이다(여기서 분자운동과 다양체들의 복잡화, 곧 주름운동은 등가적이다). 해서, 중요한 것은 "동일성보다는 다양체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양체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인격, 행위, 믿음 등 실천적 개념들의 폭(=범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재고한다는 것이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왜? 그것들은 다양체의 사태와 운동을 설명하기는 부적합한 너무 큰 범위의 개념들이기 때문이다(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휘두르는 격이다)

"우리가 자신과 서로서로를 '다양'하다고, 또는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분명한 동일성들이나 자아들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다."(145쪽)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 개념으로써 개인과 사회, 공동체(=공동사회)와 사회(=이익사회), 현대성과 전통 등의 구분에 기반한 사회학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새롭게 도입되는 것이 '군중(crowds)'을 대신하는 '무리(packs)'이다.  '무리'라고 옮겨져 있는데, 한팩 두팩할 때의 'pack'은 패거리'나 '떼거리'란 뜻이며, 군중이라는 몰(그램분자)에 비하면 분자적 수준의 단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미시정치니 분자정치/분자혁명은 바로 이런 단위의 차원, 하위주체적이고 하위집단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사고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와 다양체의 시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도시의 문제, 즉 뇌와 도시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도시'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전통적 관념 속의 '국가'와 대립시킨다."(148쪽) 들뢰즈식의 대립구도가 여기서 하나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도시/국가'라는 구도이다. 다양체적 포텐셜의 계열체를 구성하는 분자, 무리, 도시 등은 모두 현실의 배아, 곧 잠재성의 영역이고, 들뢰즈는 모든 문제를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현실(화)의 이전 단계에서 다시 사고하고자 하는 것. 그러한 수준/단계의 이름이 그것이 '삶(the life)'에 대립하는  '하나의 삶(a life)'이다. 거기서 부정관사 a는 이 삶의 불확정성, 불완료성을 지시하는바, 그것은 개별적인 삶으로 숙성/완숙되기 이전의 포텐셜로서의 삶이고 잠재성으로서의 삶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그러한 '하나의 삶'이 갖고 있는 역량을 예찬하며 이를 적극 보존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의 빌미를 들뢰즈는 흄에게서 가져온다("들뢰즈에게는 이러한 점이 흄이 정식화한 '정체성의 문제'가 갖고 있는 힘이다"). 즉, "우리의 자아나 '정체성'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며,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라는 바로 그 관념이 일종의 철학적 허구인 것이다."(150쪽) 알다시피, 들뢰즈의 첫 철학서는 흄 연구서인 <경험론과 주체성>(1953; 씌어진 건 1947년)이며, 라이크만을 읽으며 내가 새삼 깨달은 바는 들뢰즈에게서 '경험론'이 갖는 의의인바 나는 흄의 경험론을 통한 들뢰즈 읽기가 들뢰즈 철학의 가장 쉬운 입구이지 않나라고 생각한다(이게 내 '경험론'이다). <들뢰즈 커넥션>의 제2장 '실험'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들뢰즈의 경험론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정리해둘 예정이다). 여하튼, 그러한 아이디어에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해준 건 들뢰즈에게선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이었고, 영화였다.

영화에서의 시간-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체는, 혹은 '하나의 삶'은 '개체 이전의' 또는 '개체 이하의' '독자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이것은 영어에서 'it's raining.'의 'it'처럼 비인칭적인 '판'에서 다른 독자성들과 연결된다. "다양체는 항상 구성된 자아나 의식적 인격으로서의 우리를 능가하며, 바로 그것들과 그것들의 다른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타인이나 타자(autrui)라고 표현하는 것이다."(151쪽)

이어지는 대목에서 '서술(predications)'이란 역어는 흔히 'narrative'를 연상시키므로 좀 부적합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들에서 '술어'로 옮겨진 것이 이 대목에서만 '서술'의 뜻을 갖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는 첫페이지(21쪽)에서 'predication'을 '말의 풀이'라고 옮겼는데,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통일되었어야 하지 않않을까? 손을 덜 보았다는 것은 같은 같은 페이지의 '확인(identification)'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후에 'identification'은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모두 '동일시'로 옮겨졌으며, 첫 대목만 '확인'의 뜻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물론 뜻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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