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장점들, 1980년대의 것은 아닐까
본격서평 :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 지음, 그린비 刊, 2004, 512쪽)
2004년 06월 03일 강신준 동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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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 동아대·경제학
'자본'의 번역이 우리나라에서 햇빛을 본지 16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다지 짧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이 기간동안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자본'에 대한 변변한 연구서가 출간된 적이 거의 없었다. 명색 맑스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았던 학자들의 학회가 있고 '자본'의 번역본도 그 동안 수 십만부가 판매됐는데도 말이다. 맑스가 시대의 뒤안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에 대한 연구가 부르주아 진영에서 완전히 철시했는지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끄러운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반가운 책이 한 권 출판됐다. 1980년대에도 이미 중요한 화두를 던진 바 있던 이진경 선생이 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구조는 맑스의 '자본'을 따라가면서 개괄적으로 해설하는 형태로 돼 있지만, 막상 그 해설이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정리하고 있는 논지에 따라 일관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설서를 넘어서 논저로 분류돼도 좋을 듯하다.
'외부를 통한 사유'와 '코뮨주의'
그렇다면 저자의 그 논지란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을 '자본'에서 수행되고 있는 방법으로 정리하고 '외부를 통한 사유'라는 개념으로 압축하고 있다. 이 논지에 따라 저자는 '자본'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정치경제학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외부'를 찾아내는 작업으로 평가한다. 정치경제학은 자본(혹은 계급적으로 부르주아)의 논리를 대변하며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외부'란 자본의 논리가 한계에 부딪친 바로 그곳에 위치한다. 그래서 '외부'가 존재한다는 발견은 현존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는 대안의 발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런 자본주의의 대안은 지금까지 "올 것이다"라는 소식으로만 존재하면서 영원히 미래의 시제에만 머물렀던 '공산주의'가 아니라,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것을 '코뮨주의'로 부르고 있고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수유 + 너머'의 연구공간을 그런 코뮨의 현재시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추정되기도 한다.
논지의 개념이 본질적으로 방법론적인 것이란 점에서 이 책은 역시 사회과학보다는 철학의 범주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있는 논저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본문은 경제학적 쟁점들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내용들이 심도있게 다뤄지고 있어서 저자의 논지가 단지 앙상한 뼈대만 있는 논리적 결정체라기보다는 풍부한 살이 채워진 유기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폐의 발생에서 유통수단과 지불수단의 기능을 독립적인 것으로 본다든지, 전형문제를 잘못 설정된 문제의식이라고 정리한 부분,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을 제기한 부분, 그리고 지대를 초과이윤에 대한 일반적 해석으로 확대한 부분 등은 경제학에서 좀더 깊이 검토해볼만한 흥미로운 얘기들로 생각된다.
정보혁명과 '자본'의 관계 설명
게다가 '자본'의 해석을 현재시제로 파악하고자 저자는 '자본'의 각 범주에 현재시제를 적용시켜 설명하고자 하고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브레이버맨의 문제의식과 포드주의 축적체계 개념이 도입되고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과 자본의 재생산에서는 최근의 디지털 혁명과 신자유주의적 현상 등이 함께 설명되고 있다. 또한 흥미를 끄는 갖가지 그림들을 본문 속에 삽입한 것도 역시 실천을 현재시제 위에 놓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에 '자본'을 읽는데 도움이 될 책들을 소개한 부분은 저자의 친절한 배려를 짐작케 하는데 여기에서는 기존의 맑스와 '자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책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을 중심으로 안내되고 있다.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경제학적 근거와 결합해 있으며 현재시제를 끝까지 잃지 않으려 한 갖가지 노력들, 게다가 독자들을 배려한 자료안내까지 이들 모든 점들은 이 책의 좋은 점으로 손꼽을 수 있는 점들이다.
그런데 이런 장점들을 보고서도 나중에 책을 덮으면서 느끼는 감회에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 이런 아쉬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장점들이 모두 1980년대에나 유효한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1980년대와 지금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시간의 두께만이 아니고 운동조건의 변화라는 부분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에서 읽어내야 할 점은 저자가 지향하는 실천운동(코뮨주의)이 소수의 운동에서 이미 다수 대중의 운동으로 변화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운동의 핵심 과제가 '무엇'(목표)을 지향할 것인가에서 '어떻게'(수단) 수행할 것이냐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 이행담론 필요하다
저자가 지향하는 코뮨주의는 자본주의의 외부, 즉 '무엇'에 대한 해답으로서 1980년대 우리 운동에게는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시민권을 획득하고 다수대중의 민주적 실천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운동에게는 유효성이 떨어지는 해답이라고 생각된다. 운동의 주체가 대중으로 변화한 곳에서는 대중을 운동에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가 핵심문제로 된다. 이행전술에 해당하는 이 문제는 실제로 19세기 말 맑스주의가 소수의 이론에서 다수대중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고 맑스주의를 두 개로 갈라서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대중이 스스로 운동의 미래(바로 그 '무엇'이다)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의식화된 소수가, 이미 결정돼 있는 운동의 미래로 대중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대중운동으로 넘어가버린 우리 운동을 고려할 때 저자가 추구해야 할 현재시제는 '무엇'으로서의 코뮨주의보다는 '어떻게'로서의 이행전술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두 가지 희망을 발견한다. 하나는 자본의 포위망 속에서 대안을 찾는 동지가 한 사람 더 있다는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장점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저자의 탁월한 재능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서운함보다는 기대감 어린 감정을 더 많이 느낀다. 단지 저자의 재능이 올바른 시제와 만나기를 한껏 기대할 뿐이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농업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IMF경제위기 이후 노동과정의 변화', '4.19혁명시기 노동운동과 노동쟁의의 성격', '맑스 혁명주의의 실천적 유산' 등이 논문이 있고, '자본론의 세계',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 등의 저서가 있다.
©2004 Kyosu.net
----->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둘러싸고 역시 많은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적인 서평 뿐만 아니라, 긍정적 입장의 서평 또한 필요할 것 같아서 여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