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right)를 주장하면서 ‘옳음’(right)을 외면하는 건 부당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옳음’을 외면하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그런데 도대체 권리란 무엇인가? 그 말은 right의 번역어다(네덜란드어 recht). right는 일차적으로 ‘옳음’을 뜻한다.

이 말이 메이지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될 때, 지식인들은 많은 고통과 혼란을 겪었다. 일본 사회에 그 낱말에 해당하는 현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1879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고민 끝에 ‘통의(通義)’라는 번역어를 택했지만, 이 말이 “실은 번역된 글자를 가지고는 원래의 뜻을 다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한편 니시 아마네는 1868년 그 낱말을 ‘권(權)’으로 옮긴 이래 ‘권리(權利)’로 옮겼고, 그 후 이 말이 공식으로 통용된다. “일본인들에게 비교적 쉽게 이해됐던 ‘권’은 right라기보다는 오히려 힘이라는 뜻이었다”고 야나부 아키라는 논평한다(<번역어 성립사정> 중 ‘권리’ 장).

어쩌면 이런 일그러진 수용사를 회고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어떤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왜 권리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궁극에서는 그것이 왜 ‘옳은’지 입증해야 한다. 이런 일은 사실 철학적 작업의 영역에 속한다. 일반인에게 요구하기엔 지나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담론 생산자라면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정치철학 관점에서 ‘의무론’ 윤리설(옳으니 따르라)과 ‘공리주의’ 윤리설(좋으니 따르라) 간의 대립은 ‘옳음’(right)과 ‘좋음’(good)의 대립으로 되풀이된다. ‘좋음’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사람들의 욕망’ 운운하는 글은 모두 ‘좋음’과 관련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인정하자는 요지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답하지 않으면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는 공리주의적 주장만 내놓는다면 곤란하다. 물론 모든 선거는 이겨야 한다. 하지만 왜 이겨야 하는가? 저들과는 다르니까 이겨야 한다고? 이거야말로 전형적인 ‘부정 변증법’이다. 그런데 부정 변증법은 저들이 가장 잘 구사하는 수법이다.

적어도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깃발’은 보여주어야 한다. 정도(正道)를 제시해야 한다. 긍정의 길을 뚫어야 한다. ‘옳지’는 않지만, 욕심 때문에 ‘좋은’ 걸 좇았노라고 양심이 고백할 수 있도록.

누구나 욕심이 있다. 동시에 누구나 양심이 있다. 이 욕망의 시대에 양심을 운위하는 게 착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정치인이라면 사람이 자신의 양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옳음’이라는 잣대 하나만큼은 꺾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에게 무엇보다 철학이 필요한 시절이다.

 

(202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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