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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자본주의와 분열증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

김재인 2004.06.20 15:34 조회 수 : 2885 추천:32

다음 인용문은 <천 개의 고원> 529-532의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읽고 몇 년 동안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신앙의 기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그것은 어떤 삶일까요? 니체가 좋아한다는, 가장 맛있는 사과를 골라주기 위해 애쓰는 저 노파(EH참조)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노파는 마녀였을까요? 마녀가 어느 순간 노파로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내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지적 허영심입니다. 그것은 삶에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속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삶은 위장입니다만, 지적 허영은 아름답지 않은 위장이요 미적 취향의 저열함을 나타내는 징표일 뿐입니다. 형형색색 깃털을 자기 몸에 꼽고서 도취하고 도취되다가 (죽기도 전에) 망신을 당한 저 우화 속의 새가 바로 그런 꼴 아닐까요. '신앙의 기사'는 저 새와 정반대입니다. 어쩌면 이런 삶은 현대적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램분자적 유행(mode)과 이런 분자적 삶의 방식(mode) 사이에는 아주 큰 거리(distance)가 있습니다('거리'에 대해서는 <천 개의 고원> 921 이하 참조).

樹慾靜以風不止라는 싯구가 떠오르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일요일 오후입니다.

우선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기>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의 기사”, 즉 생성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 기사를 관찰해도 무엇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이 없다. 한 사람의 부르주아일 뿐, 그저 한 사람의 부르주아일 뿐. 이것은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것이기도 하다. 참된 단절을 경험한 후에는 …… 참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있게 되는 것이다. 주목을 끌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는 것, 심지어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집 사람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것.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있는 것이 그토록 곤란한 까닭은 이것이 생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처럼 되고,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생성을 만드는 것은 결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다. 많은 금욕, 절제, 창조적 역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영국식 우아함, 영국식 직물, 벽과 잘 어울리기, 너무 잘 지각되는 것과 누구나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을 없애버리기. “소진되고 죽고 남아도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 불평과 불만, 충족되지 않은 욕망, 방어나 변호, 각자(세상 모든 사람)를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의 그램분자성 속에 뿌리박게 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기. 왜냐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램분자적 집합인 반면 세상 모든 사람 되기는 이와 전혀 다른 문제, 즉 분자적 성분들을 가지고 우주와 놀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 되기는 세계 만들기이며(faire monde), 하나의 세계 만들기(faire un monde)이다. 없애버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추상적인 선, 그 자체로 추상적인 퍼즐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다른 선들, 다른 조각들과 접합접속하고 연결하면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져서, 투명함 속에서 먼저번 세계를 완전히 뒤덮을 수 있게 된다. 동물적인 우아함, 위장하는 물고기, 잠행자. 이 위에는 그 무엇과도 유사하지 않으며, 자신의 유기적 분할조차 따르고 있지 않은 추상적인 선들이 가로질러 간다. 그러나 이렇게 해체되고 탈구되었기에 이것은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위해 바위나 모래나 식물들의 선들과 함께 세계를 만든다. 그 물고기는 중국의 문인화가와도 같다. 모방적이지도 않고 구조적이지도 않으며, 우주적이라는 점에서. 프랑수아 쳉이 밝힌 바에 따르면, 문인화가는 유사성을 추구하지 않으며 “기하학적 비례”를 계산하지도 않는다. 문인화가는 자연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운동만을 지니고 있다가 뽑아낸다. 이어지거나 겹쳐진 “선(traits)”만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세상 모든 사람 되기, 세계를 생성으로 만들기란 곧 세계 만들기, 하나의 세계 또는 여러 세계를 만들기이며, 다시 말해 자신의 근방역과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찾기이다. 추상적인 기계인 <우주>,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배치물인 각각의 세계. 다른 선들과 연속되고 결합되는 하나나 여러 개의 추상적인 선으로 환원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무매개적으로, 직접 하나의 세계를 생산하기. 이 세계에서는 세계 그 자체가 생성되고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된다. 글이 중국 문인화의 선처럼 되는 것이 케루악, 그리고 그 이전에 버지니아 울프의 꿈이었다.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각각의 원자를 흠뻑 적셔야만” 하며, 그것을 없애버리려면 모든 유사성과 유비를 없애버려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놔둬야만” 한다. 즉 순간을 뛰어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되 그 순간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놔둘 것 ― 그리고 순간은 일순간이 아니라 <이것임>이다. 사람들은 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이것은 투명함을 통해 다른 <이것임>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세계의 정각에 있기. 지각할 수 없는 것, 식별할 수 없는 것, 비인칭적인 것 ― 이 세 가지 덕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다른 선들과 함께 자신의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를 찾기 위해 하나의 추상적인 선, 일필(一筆)로 환원되기, 그리고 이렇게 해서 창조자의 비인칭성 속으로 들어가듯이 <이것임> 속으로 들어가기. 그 때 우리는 풀과 같다. 즉 우리는 세계를,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의 생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소통하는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사물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사물들 한가운데서 자라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정관사, 생성-부정법, 나아가 우리가 환원되는 고유명사 등 “전체”를 조합한 것이다. 흠뻑 적시기, 없애버리기, 모든 것을 놔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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