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철학과 문화론

  Franz Kafka, Ein Bericht fuer eine Akademie (전영애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pp. 109-118.

  그 생각을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출구(出口)가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겁니다. 적어도 똑바로는 되지를 않았어요, 똑바로 제 앞에는 궤짝이 있고 널빤지가 널빤지에 단단히 붙어 있었습니다. 널빤지들 사이에 길쭉한 틈이 하나 있기는 해서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는 무지했던 탓에 기쁨에 넘친 어리석음의 울부짖음을 토하며 환영을 했었건만, 이 틈바구니는 꼬리를 들이밀기에도 너무 좁은 것이었고, 있는 원숭이힘을 다해도 넓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뒷날 저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저는 비상하리만치 작은 소음밖에 내지 않아서 그 점으로 보아 제가 틀림없이 곧 죽거나 아니면 이 최초의 시련기를 넘기고 살아남을 경우 매우 잘 길들여질 것으로 추론했답니다. 저는 이 시기를 넘기고 살아남았습니다. 소리 죽여 흐느끼기, 고통스러운 벼룩 수색, 야자 하나를 지치도록 핥기, 머리로 궤짝벽을 짓찧기, 누가 가까이 오면 혀 내밀기 - 그런 것이 새로운 생활에 있어서의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갖 짓을 다 해봐도 출구는 없다는 그 한 가지 느낌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원숭이답게 느꼈던 것을 제가 오늘에 인간의 말로 그릴 수가 있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비록 제가 옛날의 원숭이의 진실에 더 이상 이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의 기술(記述)의 방향에는 그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제가 출구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똑바로 이해받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저는 이 말을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빈틈없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자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방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감정을 뜻하는 게 아니거든요. 원숭이였을 때 저는 아마도 그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때도 오늘날도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유로써 사람들은 인간들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기만당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헤아려지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저는 쇼에서 제가 등장하기에 앞서 곡예사 한 쌍이 저 위 천장에서 그네식 철봉을 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훌쩍 뛰어넘고, 그네를 타고, 도약을 하고, 서로가 둥실 떠 서로의 품안으로 떨어지고, 하나가 이빨로 상대방의 머리카락을 물어 나릅니다. '이것도 인간 자유로구나'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돋보이려는 이 안하무인의 율동도' 신성한 자연을 경멸하다니! 그 어떤 건축물도 이 광경울 보고 원숭이다움이 터뜨린 웃음 앞에서는 지탱을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의 출구를 오른쪽, 왼쪽, 그 어디로든 간에, 저는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출구 또한 비록 하나의 착각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요구는 작았습니다. 착각이 더 크지는 않을 테지요.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계속 나아가자! 궤짝벽에 몸을 눌러 붙인 채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지.
  (...)
  되풀이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모방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아니었지요. 또한 예의 저 승리로서도 아직 별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습니다. 급방 다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나왔고, 소주병에 대한 혐오감은 심지어 더 강해지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아무튼 저에게 일단 방향은 주어졌던 겁니다.
  제가 함부르크에서 최초의 조련사에게 넘겨졌을 때 저는 곧 제게 열려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알아차렸어요. 동물원 아니면 쇼 무대였죠. 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쇼 무대로 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자, 그것이 출구다, 동물원은 새로운 우리일 뿐 그 안에 들어가면 너는 없어지고 마는 거다라고요.
  그리하여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 출구를 원한다면 배웁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배우는 법입니다. 회초리로 스스로를 감독하고, 지극히 조그만 저항만 있어도 제 살을 짓찧었습니다. 원숭이 본성은 둘둘 뭉쳐져 데굴데굴 쏜살같이 제게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첫 스승 자신이 그것으로 하여 거의 원숭이처럼 되어버려, 곧 수업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회복되었습니다만.
  (...)
  이 진보! 앎의 빛이 온 사방에서부터 깨이는 두뇌 속으로 뚫고 들어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백하자면, 저는 그것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그랬고, 오늘날은 훨씬 더 그렇습니다. 지금껏 지상에서 되풀이된 바 없는 긴장된 노력을 통하여 저는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닐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우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이 특별한 출구, 이 인간 출구를 마련해 준 한에서는, 그래도 상당합니다. 슬쩍 달아난다는 탁월한 독일어 표현이 있는데, 그걸 제가 했습니다, 저는 슬쩍 달아났습니다. 제게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언제나 전제로 하고요.

  ----------

  이 흥미진진한 몇 대목은 카프카에게서 '출구'(첫 문단)와 '도망'(끝 문단)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김재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안티 오이디푸스" 1쇄 중 수정사항 정리 (2015년 2월 2일) 철학자 2015.02.09 1106
공지 나쁜 독서와 아예 읽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가치가 더 나은지 알지 못한다 철학자 2014.12.08 1685
공지 들뢰즈 국제학술대회 및 캠프 안내 (최종버전) 철학자 2016.06.09 1194
공지 박사학위논문 통과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2] 철학자 2013.01.17 128948
공지 김재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파일) 철학자 2013.04.17 136425
공지 들뢰즈에게 궁금한 것들 [46] 철학자 2011.08.17 27958
290 천개의 고원 8장 [3] 삼식이 2005.01.23 3265
289 constructions / deleuze connections [3] 조현일 2005.01.20 3122
288 시간의 힘 [1] 김재인 2005.01.17 3011
287 늦었지만, "천 개의 고원이..."를 읽고. MANN 2005.01.13 3065
286 정직은 최선의 정책 [1] 김재인 2004.12.28 3039
285 네트워크 과학 김재인 2004.12.20 3023
284 그래도 이진경님이 좀 나은 것 아닌가 하는 것은.... [16] 땡땡이 2004.11.23 4648
283 [re] 이진경-되기의 모순 [4] livingred 2004.11.13 3099
282 번역이 나왔군요. 유진 홀랜드 [2] .. 2004.11.04 3289
»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와 도주 [1] 김재인 2004.10.29 3728
280 햄버거에 대한 명상 [2] 김시원 2004.10.28 3001
279 패스트푸드 철학 (全文) (삭제) [3] 김재인 2004.10.19 3044
278 [추석선물] 이진경비판 문학동네 원고 [6] 김재인 2004.09.22 6010
277 逃走와 脫走에 대한 짧은 생각 [6] 以逸待勞 2004.09.13 3170
276 이진경-되기의 모순 [12] 김재인 2004.09.10 4362
275 탈주냐 도주냐 (펌) [11] studraw 님 2004.09.08 2930
274 안티오이디푸스의 새번역이 나왔군요 [3] 2004.09.07 2831
273 번역출간에 대해서 2004.09.06 3186
272 "과학도 역사도 우발성이 지배한다" 김재인 2004.09.06 3371
271 부산강연 녹음 2 (질의 답변) - 볼륨 수정 편집 김재인 2004.08.31 3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