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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역자 후기>
  생성, 하나의 삶의 종합

  이 책의 저자 라이크만(John Rajchman)과의 인연은 상당히 깊은 편이다. 옮긴이가 대학 초년생일 때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라는 책을 원서로 읽고 많은 도움을 받은 바 있는데, 이제 다시 <들뢰즈 커넥션>을 번역 출간하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 들뢰즈의 사상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적절한 입문서가 없던 차에 이 책은 한국에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특히 예술과 미학을 다루는 6장은 이 책의 백미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바로 미학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음모와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커넥션’이라는 표현은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모종의 선입견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그런 의미의 커넥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커넥션은 ‘종합’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전문 철학 용어일 뿐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세계의 생산 또는 생성이 이루어지는 세 가지 방식을 ‘연결접속(connexion)’ ‘분리접속(disjonction)’ ‘접합접속(conjonction)’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종합의 세 형식이기도 한데, 여기서 말하는 종합이란 형식논리적 종합이 아니라 차라리 사물 또는 세계의 종합을 가리킨다. 들뢰즈에게 종합은 곧 생성의 논리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이 생성의 논리는 한국의 해석자들에게, 또는 심지어 다른 나라의 해석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거의 이해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내가 게으르고 과문하여 어느 훌륭한 해석자의 글을 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인 비판에서 시작하겠다. 내가 보기에 생성의 논리 또는 들뢰즈 철학에서의 종합에 대해 가장 전형적인 오해와 왜곡은 이진경에서 잘 드러난다(후주 참고).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 종합의 각각이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되느냐 하는 용어상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핵심은 설명의 내용이다. 들뢰즈의 생성 논리는 철두철미하게 시간 이해와 관련된다. 가령 이진경처럼 “입과 식도가 접속하여 먹는 기계가 된다”는 서술을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입과 식도를 등위(等位)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것은 시간을 배제하고 형식논리적으로 들뢰즈를 이해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봄의 방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에 놓인 두 점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순서상, 그리고 여기서 ‘순서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논리적 순서와 시간적 순서 양자를 동시에 지칭하는 것인데, 이런 서술은 ‘입’과 ‘식도’가 먼저 있고 나서(그래야 양자를 동시에, 등위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 둘이 아닌 제3의 무엇인 ‘먹는 기계’가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진경이 말하는 “A와 B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A도 아니고 B도 아닌 제3의 것인 C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라는 서술은 바로 그런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들뢰즈가 가장 피하고자 했던 이해 방식, 즉 초월적 구도 내에서 생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초월적 구도 내에서 생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지적 시점에서 사태를 본다는 뜻이다. 여기에 결여된 것은 시간이다. 들뢰즈가 햄릿을 빌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시간은 마디에서 벗어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즉, 시간은 마디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질주한다. 이 말로써 들뢰즈가 뜻한 바는, 이 세상에서는 전지적, 초월적 시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를 들뢰즈는 ‘내재성’이라는 말로 부른다. 내재성의 관점에서 생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관점에서 그것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삶은 전지적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삶은 한 순간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만듦’ 즉 ‘만들어짐’과 ‘만들어 감’의 과정이다. 김진석의 표현을 빌면 ‘포월(匍越)’이다. 그 눈 먼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들뢰즈의 핵심 물음이다. 마디에서 벗어난 시간이란 바로 이런 눈 먼 삶의 시간, 내재성의 시간을 지칭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종합은 바로 이러한 생성의 종합, 삶의 종합을 가리키며, 이는 결국 ‘존 재(의 생성)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는 생성이고, 생성은 존재이므로, 종합은 존재 생성의 종합인 것이다. 바로 이 종합의 세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가 도입한 개념적 도구가 ‘연결접속 종합’ ‘분리접속 종합’ ‘접합접속 종합’이다. 들뢰즈는 이 말들을 전통 논리학에서 가져오긴 했으나 전혀 다른 규정과 용법을 부여한다.
  내가 ‘연결접속’이라 옮긴 connexion은 이른바 미리 존재하는 A와 B의 결합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굳이 그런 식으로 항(項)을 동원하여 표현하자면, A는 B로 생성한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항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A나 B가 아니라 차라리 사태, 즉 존재 생성의 각 국면(스냅사진의 내용물과도 같은)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고(et)”, “그 다음에는(et puis)”의 형식을 지닌다(들뢰즈는 이런 식으로 형식논리의 “그리고”를 생성논리의 “그 다음에는”으로 바꾼다, AO, p. 11). 즉 A와 B의 형식논리적 결합이 아니라, A 그리고, 그 다음에는 B라는 형식을 지닌다는 것이다. 입이 미리 있고, 식도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까 “망설이는”(AO, p. 7) ‘입’이 있고(그러나 망설인다는 점에서 이 ‘입’은 엄밀히 말해 항상 아직 여전히 입이 아니며, 뭐랄까 어리버리한 입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무언가로 생성하는데, 그렇게 생성한 것은 ‘입+식도’(먹는 기계)로, ‘입+기도’(호흡 기계)로, 또는 ‘입+항문’(그러나 이 경우에서처럼 항문으로서의 입, 즉 토하는 입은 엄밀히 말해 입이 아니다, 차라리 무언가가 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작은 부품과도 같다)으로 결판난다. 어디에도 초시간적 자기동일성을 지닌 입이란 없다. 그것은 때로는 ‘입+악기’(노래하는 기계)가 때로는 ‘입+주둥이’(슬레피안의 개가 된 사내)로 결판날 수도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것은 ‘입+식도’, ‘입+기도’ 등이다. 이것을 굳이 분리하여 항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에너지-기계에 해당하는 음식의 흐름(이것이 질료에 대한 그리스적 관념인 휠레[hyle]가 뜻하는 바다)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는 기계에 의해 ‘입’과 ‘식도’(이것들이 기관-기계이다)가 생성한다. 즉 생성이 먼저고 각 항에 대한 규정은 나중에 부여된다. 들뢰즈가 기계를 ‘절단들의 체계’(AO, p. 43)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다른 예를 들면, 공기의 흐름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는 기계에 의해 ‘입’과 ‘기도’가 생성한다. 물론 이 ‘입’과 앞의 예의 ‘입’은 사실은 전혀 다른 기관이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면, 음의 흐름이 있고 그것을 절단하는 기계에 의해 ‘입’과 ‘악기’가 생성한다. 연결접속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생산의 생산’이다.
  그러면 내가 ‘분리접속’이라 옮긴 disjonction은 어떤 종합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들뢰즈의 고유한 해석의 표현이다. 분리접속은 반복과 억압의 관계에 대해 들뢰즈가 말할 때의 반복의 계기이다. 억압이 있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있기에 억압이 있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이 반복은 ‘……이거나 ……이거나’(soit…… soit……)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그 (시간적) 사이에 억압이 존재한다. 이때 억압은 생산(즉, 생산의 생산)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 전부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도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시간이다. 예를 통해 보자. 밭에다 콩을 심건 옥수수를 심건 감자를 심건 밭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다. 밭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 위에 아무 것도 심겨지지 않는 편이 더 낫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처럼 콩을 ‘심건’ 옥수수를 ‘심건’ 감자를 ‘심건’이라는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분리접속 종합이다. 콩을 심는 생산의 사행(事行)과 옥수수를 심는 생산의 사행, 그리고 감자를 심는 사행은 서로 동시에 일어날 수 없으며, 항상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즉, 일단 어느 하나가 심겨지게 되면 다른 것은 심겨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여기서 심겨지지 못한 모든 것은 억압되는 것이요, 억압은 하여간 뭔가가 심겨진다는 사태(이것이 반복이 뜻하는 바다)에 후행한다.
  여기서 ‘……이거나 ……이거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ou bien)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종합이다. 들뢰즈는 굳이 양자택일을 가리키는 형식논리적 선언(選言) 또는 이접(離接)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고 강조까지 했던 것이다(이점에서도 이진경의 설명은 모두 헛되고 헛되다. 게다가 <노마디즘>에는 들뢰즈의 종합이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가장 초보적이고도 중요한 사항이 전혀 강조되어 있지 않다).
  형식논리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역시도 등위적 선택의 문제로 다가오며, 미리 존재하는 두 선택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반면 생성논리에서는 “이것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에’ 저것이거나” 하는 식으로 종합이 일어난다(물론 여기서 ‘저것’은 ‘이것’과 다른 시점에 생성하기 때문에 ‘이것’이라고 쓰지 않은 것이지, 실제로는 여전히 ‘이것’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확률 통계적으로 이것과 저것이 반씩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후회해야 소용없는 냉혹한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며, 시간 속에서 가정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일어난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what is done cannot be undone)”(맥베스). 이것이 바로 ‘(생성의 시간에서의) 분배의 생산’이다.
  영원회귀의 가장 깊은 비밀은 ‘긍정’에 있다. 바로 이 긍정이 세 번째 종합인 접합접속, 즉 conjonction이 의미하는 바다. 긍정이란 흔한 오해처럼 추수(追隨)가 아니다. 긍정은 생성의 향유, 즉 ‘(생성의) 소비의 생산’이다. 주체가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주체는 생성을 향유하는 자로서 생성의 주변에서 생성이 완료(그러나 잠깐 그런 것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될 때 겨우 등장한다. 생성에 접합하는 자, 젊은 이인성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낯선 시간 속으로>)고 말하는 자, 시간을 받아들이는 자가 주체인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는 최고의 긍정의 형식”인 것이다. 주체는 긍정하는 자라기보다는 긍정이 만들어내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생성의 사상은 최고의 유물론적 사상이다.
  지금까지 들뢰즈의 생성 논리 또는 종합에 관해 제기되었던 가장 통속적인 오해를 해명해 보았다. 물론 이 해명 또한 불충분한 점이 있을 것이고 다른 오해를 낳기도 할 것이다. 옮긴이로서 지나친 발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조심스럽기도 했고, 더 자세한 것은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밝혀야 하겠지만, 워낙 깊은 세간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중간보고 형식으로라도 짧게 정리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옮긴이가 재번역하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간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고, 이 책 <들뢰즈 커넥션>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깊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나의 이런 행위를 허용해주리라 믿는다.
  번역 과정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와는 조금 다른 번역어를 찾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변용태’나 ‘정서’로 옮겼던 affect 즉 ‘정감(情感)’이다. 우리말에서 이 단어는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며 ‘정감 어린 시선’이나 ‘정감이 넘치는 풍경’처럼 상당히 한정된 맥락에서만 사용되곤 한다. 동시에 ‘정감’은 심리적 주관적 상태와 동시에 객체적 독자적 상태를 지칭할 수도 있는 말이어서 좋은 점도 있다. 철학의 개념이란 것이 일상어의 의미를 깊게 재해석하고 재규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곤 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가령 들뢰즈가 당시까지 별로 많이 사용되지 않던 불어 표현 affect를 affection과 구분해서 규정했던 것처럼,  ‘정감’이란 말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한국에서 affect는 가장 흔하게는 ‘정동(情動)’이라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하는 식으로, 뒤이어서는 ‘정서(情緖)’나 ‘감응(感應)’이라는 말로 번역이 시도되어 왔었다. 나는 들뢰즈의 맥락에서 <천 개의 고원>을 옮기며 ‘변용태’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바 있으며 이 번역어는 어느 정도까지는 여전히 타당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인간의 문제와 관련해서 인간의 심리를 반영하는 번역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반드시 인간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면서도 얼마간 그와 관련된 말을 찾던 중에 ‘정감’에 착안했으며, 꽤나 적합하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난 메이데이에 시테유니베르시테르에서의 대화, 특히 박기순 형과의 대화에서 촉발된 사유가 다음 날 오전까지 이어져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번역어 중 ‘도표’라고 옮겼던 diagramme은 ‘도해(圖解)’로 정정했으며, ‘베르그송’을 ‘베르그손’으로 바꾸었다. 그밖에 변경한 몇몇 번역어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현실문화연구 김수기 사장님의 권유로 작업을 시작한 건 물론이고 예정 기한을 넘긴 지도 한참이다. 기다려준 출판사와 독자 여러분께, 그리고 옮긴이의 게으름을 견디고 애써주신 편집부 좌세훈 차장께도 감사드린다. 번역 세미나의 일부를 함께하고 절반 넘게 초역을 도와준 파리의 경혜영에게 감사한다. 최종 원고를 읽고 문장과 내용에 걸쳐 조언을 준 김지현, 이정기 선생께 감사한다. 끝으로 이번에도 역시 최종 원고를 읽고 따끔하고도 따뜻한 말을 안겨준, 다른 길로 도주하겠다고 협박하면서도 늘 함께 도주하는 아내 문경미에게 감사한다.

2005년 7월 5일 옮긴이 김재인

* 후주: 좀 길지만, 발췌 인용에서 비롯되는 오해의 여지를 피하기 위해, 전문을 인용하겠다. 해당 대목은 이진경, <노마디즘> 1권, 휴머니스트, 91-3쪽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먼저 리좀은 ‘접속(connexion)’의 원리에 의해 정의되고 만들어집니다. 어떤 의미에선지는 불명료하지만, 예전에 칸딘스키는 20세기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는 주문에, 19세기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 oder)”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와(und)’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와’는 바로 접속을 표시하는 접속사예요. 즉 접속이란 말은 넓은 의미로는 ‘와(et, und/and)’로 연결되는 모든 경우를 지칭합니다. 책과 외부, 이 책과 저 책, 손과 자동차, 명사와 동사 등등.
  그러나 저자들은 접속이란 말에 특정한 외연을 부여합니다. 일찍이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접속과 이접(離接, disjonction)과 통접(統接, conjonction)을 구별한 바 있는데, 이러한 구별은 가타리와 함께 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접속의 접속사는 ‘…… et ……’(……와……)예요. 이접의 접속사는 ‘soit…… soit……’(‘이것이든 저것이든’, ‘이것이냐 저것이냐’)지요. 통접의 접속사는 ‘donc……’(그리하여……)예요. 세 경우 모두 가령 A와 B가 결합하거나 분지(分枝)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접속은 A와 B가 등위적(等位的)으로 결합하여, A도 아니고 B도 아닌 제3의 것인 C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입과 식도(食道)가 접속하여 먹는 기계가 되고, 입과 성대가 접속하여 말하는 기계가 되며, 입과 입이 접속하여 입맞추는 기계(섹스기계)가 됩니다.
  이접은 A냐 B냐를 선택―논리학에서는 ‘선언(選言)’이라고 하지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둘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배타적(exclusive) 이접과, 상이한 경우를 허용하는 포함적(inclusive) 이접이 있습니다. “네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질문, 혹은 “동성애자인가 이성애자인가”라는 질문이 앞의 경우라면, “네가 남자든 여자든” 내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하는 문장이 뒤의 경우예요. 접속이 등가적인 위치에서 두 항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접, 특히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배타적 이접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이분법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거나 호오(好惡)의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지요.
  통접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A와 B는 물론, C, D 등 그 이상의 것들이 모여 모두가 어떤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소화기관과 호흡기관, 순환기관, 배설기관 등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한다든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의 기관이 모여 국가장치를 구성하는 경우나, 혹은 이런저런 장들이 모여서 하나의 책이 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이와 달리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경우도 역시 통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 이윤, 소득, 이자 등등이 모여 ‘통화량’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화폐의 흐름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각각이 부분적인 기관이 되어 하나의 유기체 내지 통일적 전체로 통합되는 것이란 점에서 ‘유기적 통접’이라면, 후자는 각각이 탈형식화되어 ‘통화량’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는 것이란 점에서 ‘흐름으로의 통접’입니다.
  포함적인 이접이나 흐름으로의 통접이 있긴 하지만, 이접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항적 선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통접은 하나의 유기체나 결과물로 통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통상적인 의미에서(포함적 이접이나 흐름으로서의 통접이 아니란 의미에서) 이접과 통접은 관련된 항들을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갑니다. 반면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서 제3의 것,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귀결점도 없고, 호오의 선별도 없습니다.

옮긴이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재인은 서울대학교 동물자원학과를 자퇴하고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출강하고 있다.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민음사 2002, 공저), <21세기 키워드 100>(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3, 공저) 등을 써서 출간하였고, <이 기쁜 철학>(문학과지성사)과 학위논문 <들뢰즈의 실천 존재론>(가제)을 쓰고 있다. 또한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리처드커니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 공역), 로저 스크루턴 <크산티페의 대화>(민음사 1999), 로저 스크루턴 <프뤼네의 향연>(민음사 1999),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 등을 번역 출간하였고,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를 번역하고 있다. 홈페이지는 http://armdown.net이며 이메일은 zen@armdown.ne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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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1] 오온욱 2005.02.15 3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