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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정보 김재인의 철학사(1)

아무것도 아닌 자 2010.08.06 19:29 조회 수 : 9581

 존재론의 이전의 존재

 

 

 밑도 긑도 없는 캄캄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khainein 있다khaos. 아가리 속에서 어떤 떨림을 느낀다. 그러나 뱉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뿌욤한aether 빛 한 줄기photon 보이지 않는 아가리 속은 시간마저 삼키고 있어arkhe 소리 한 점vox 새지 않았다. 아가리 주위로 외롭고 쓸쓸한 밤nyx이 얼만큼 오래 머문 것인지 까닭도 없다. 까닭도 없이, 다른 하나가 태어나기 전의 모든 하나를 캄캄한 밤의 형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끝없는                              은 아니다. 아예 없음은 형식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홀로 있어 크기도 없고, 크기가 없으므로 자리매김도 없고, 자리매김이 없으므로 처음과 끝이 없는 흐름 끊긴 아가리 속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캄캄한 밤과 함께 굳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모든 하나는 터무니없다. 까닭없이 생겼으나 그림자라도 있어야 스스로 드러난다. 그림자조차 없는 그것은 힘만이 가득 찬 헤아릴 수 없는 아가리 속이었다. 무늬도 바탕도 모두 지워진 밤의 아가리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린 듯하다. 찰나였고, 여전히 까닭없는 밤이었으므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차라리 아가리 속에 갇혀 있던 다스릴 수 없는 힘의 분노였다. 한 번의 외침이 있자, 아가리 속 여기저기서 아가리를 찢으며 바깥으로 달아나는 힘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아가리를 찢은 힘은 알갱이가 되고 수많은 먼지가 되었다. 먼지는 먼지들과 부딪히며 타오르고 아가리 속은 점점 환해졌다. 타오르며 빛을 내는 먼지들로 아직 뭉치지 못한 수많은 먼지들이 드러났다. 뭉쳐지지 않는 알갱이는 타오르는 식은 재에 갇혔다. 캄캄하던 밤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얼룩이 번지고 있다. 캄캄한 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무늬들을 만들고 있다. 빛이 어둠을 불러 오고, 어둠이 빛을 찾아갈 수 있다면 서로 떨어진 아가리의 겉과 속은 보기 좋게 한몸을 이루는 안과 밖이 된다. 먼지는 한몸의 아름다움을 쫓아 안팎을 떠돌며 서로 다른 모습들을 만든다. 먼지의 부딪힘과 축축하게 식은 재와 그 속에서 서로를 잡아당기게 하는  힘을 가진 알갱이(힘의 실천적 형식인 입자)만 있다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었다. 흩어진 재에서 빠져 나온 힘의 알갱이는 머물던 재의 모습을 찾아 아직 뭉치지 않은  먼지(원자) 사이를 떠돈다(힘의 의지적 형식인 편자: 에피쿠로스의 편자는 차후 힉스 입자와 함께 상세하게 다뤄질 것임). 그리고 먼지와 먼지의 모습들이 나름의 자리를 잡자, 너와 나의 거리 곧 시간이 생겼다. 마주한 시간 가득 수많은 얼룩이 아롱져 아름다운 무늬를 드러내고 있다. 머잖아 아름다운 무늬들의 시간을 자리매김하는 의식의 주관자도 생겨나리라. 그러나 그 전에 오롯이 흩어지지 못한 아가리 속 끈적한 외침들은 무거운 숨결과 가벼운 숨결로 나뉘어 여기저기로 고여 든다. 어떤 먼지는 무겁게 가라앉아  뭉쳐지고 어떤 먼지는 너무나 가벼워서 끝없이 솟구치는 듯하다. 힘은 다스림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서 힘과 한몸이 된 낱낱의 먼지들은 처음 한몸이었던 고요한 아가리 속을 그리워 한다. 낱낱의 먼지들이 펼치는 모습은 힘의 움직임과는 달리 흔들림 없이 아득하게 멈추고 싶어, 힘을 억누르려 더욱 무겁게 뭉친다. 그러면 힘은 뭉쳐진 먼지 속에서도 바깥에서와 같이 솟구치고 가라앉아 뭉쳐진 먼지와 맞선다. 뜨거운 숨결은 먼지의 바깥에서 짖누르고, 가둬진 힘들은 먼지 속에서 거세게 맞선다. 아프게 찔리고 세차게 부딪혀 고요한 날이 없다. 아가리를 닮은 먼지의 그리움이 그러하듯 먼지를 닮은 상처들은 뭔가 끈적한 가운데 먼지의 곡두들을 만든다. 함께 아가리의 숨결로 머물렀으나 빠져 나와 이리저리 떠돌던 한숨(산소)은 어디에나 머문 아가리의 숨결(수소)과 덩어리를 이루어 곡두들을 감싼다. 곡두들이 춤을 춘다. 춤의 곡두 가운데서 상처는 먼지의 부스럼을 남긴다. 먼지의 부스러기는 그러나 먼지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상처가 상처를 낳고 상처가 상처를 감싸며 먼지는 수많은 곡두에 휩싸인 부스러기들을 제 품에 담는다. 부스러기 가운데 파래와 이끼가 먼저 있었고, 그 위를 맴돌던 독룡과 맹수의 시간도 아득하다.

 하얗게 언땅 위로 묵직한 저음의 울부짖음이 들렸고 이어 숨죽인 디딤발 소리가 보인다. 걸음걸이는 어찌나 고요한지 도리어 그 침묵의 소리에 언땅이 갈라지는 듯하다. 몸가죽은 황토보다 짙고, 오래된 고목과도 같은 검은 털이 여러겹의 줄무늬를 드리웠다. 털끝으로 공간을 다스리며 걸음마다 매화꽃 발자국을 남긴다. 까마귀 몇 마리 침엽수 가지 끝에 앉아 무언가를 재촉하며 따갑게 운다. 짐승은 다만 등뼈를 곧추세우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 걸음 멈춘 몸체는 작은 움직임도 없다. 이윽고 짐승의 발자국을 온몸에 찍은 듯한 매화 무늬의 여린 몸체 하나가 무언가에 놀라 힘껏 땅을 밀어 달아나자 짐승은 땅을 힘껏 잡아당겨 쫓는다. 언땅이 녹고 땅이 누런 제 몸빛을 되찾자 말라비틀어진 매화 무늬 가죽 사이로 수천 수백의 구데기 떼가 드러난다. 주검을 뒤로 하고 짐승은 벌써 하얗게 언땅 저편으로 한 점 수묵 되어 사라졌다. 짐승의 털가죽을 걸친 한 무리가 사라진 짐승을 쫓고 있다. 결 좋이 쪼개진 검은 돌로 끝을 엮은 창을 들고 무리는 짐승의 발자국이 끝난 동굴 앞에 다다랐다. 칠일 밤낮을 젖먹이 새끼들과 함께 한 짐승이 동굴 밖을 나서자 흡사 그 만큼의 밤낮을 쫓아 온 무리가 창끝으로 찌른다. 짐승은 무리 가운데 맨 앞의 하나를 앞발로 찢고, 그 뒤의 하나를 날카로운 이빨로 뜯는다. 그러나 짐승은 결국 죽는다. 한 무리는 짐승의 가죽을 가지게 될 아무개를 가렸고, 가죽을 벗기기에 앞서 주검을 한데 모아 나뭇잎과 가지들로 덮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세계

 

 

  짐승의 가죽을 걸친 아무개가 무리와 함께 동굴로 들어서자 동굴 속 무리들이 달려들어 매만진다. 동굴 벽 여기저기에 짐승의 무늬와도 같은 긁고 새긴 자국들이 뚜렷하다. 뚜렷한 자국들을 흉내 내어 무리 가운데 하나가 이번에는 동굴 바닥에 무늬를 새긴다. 까닭없는 그 짓을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무리들이 모인 자리로 가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 속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간혹 무리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지만 이내 머리를 튼다. 무리의 눈 속을 아무도 들여다 본 일 없고, 어디에도 무리의 얼굴은 없다. 무리가 거듭하는 일은 사냥과 번식과 깊은 잠뿐이다. 대지는 아직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리에게 있어 사냥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삶 그대로였다. 사냥의 부정적 매개인 사냥 도구와 기술이 지닌 권력은 아직 드러난 바 없다. 단지 하나보다는 여럿이 뭉치고 사냥하는 것이 무리를 오래도록 살게 하였다. 무리의 어미 아비가 주먹돌로 딱딱한 껍질 속 열매를 깨어 먹을 무렵부터 그렇게 무리는 무리 지어 살았다. 그러나 돌을 쪼개어 짐승을 사냥할 무렵에는 몸체의 크기와 힘의 세기로 드러나는 짐승의 위계는 아무 소용 없었다. 사냥 도구를 지닌 힘이 약한 아무개들은 어미 아비 때와 달리 무리 지어 힘센 아무개를 공격했다. 힘이 약한 여럿의 아무개들이 무리에거 쫓겨나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무리의 나날들 여느 때와 같이 암컷 무리가 동시에 거부하는 수컷 아무개는, 수컷 무리 아무개들이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와 함께 번번이 생겨났다. 암컷 무리에게 버림받은 수컷 아무개는 암컷 무리의 따돌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무리를 떠나지도 버림받은 암컷을 찾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몇몇의 암수를 뺀 무리는 짝을 바꿔 수시로 성기를 맞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굴 속은 무리의 기쁨이 땀범벅 된 야릇한 냄새가 떠나지를 않았다.* 무리는 그 냄새가 짐승의 피냄새보다 좋았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일은 무리 모두의 몫이었으므로 제 뱃속으로 낳은 새끼를 따로이 챙기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보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암수 몇몇을 무리가 거부한 것처럼, 무슨 까닭에서인지 근친끼리의 흘레는 드물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먹어서는 안 될 열매를 가리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비가 온다il pleut, 밤이다il fait nuit.* 피에 굶주린 사냥꾼의 시간은 잠들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태초의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의 몸체들로 동굴 속 이곳저곳은 그늘 속 빛띠처럼 부시다. 어느 몸체의 어울림이 아름다울까, 어느 몸체의 울림이 먹구름 저편 별자리에 닿을까, 동굴 속 아득히 백치들의 보석같은 질투가 숨죽인 별빛보다 밝게 타오른다. 긴 밤으로 타오른 불꽃의 따스함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면 이제는 젖달라 보채는 새끼들의 울음소리로 동굴 속은 다시 한 번 소란 속이다. 갓난새끼들 또한 저마다 달라서 자주 보채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쉽게 다룰 수 있는 무리도 있다. 물론 제법 자라서도 젖을 떼지 못하고 수시로 보채는 별난 새끼들도 간혹 눈에 띈다. 무리의 어미 아비들은 새끼들 아무개 하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뭔가 달라 보이고 따돌리게 되는 아무개도 무리에게는 쓰임새가 있었다. 암컷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수컷 아무개는 동굴 벽에 짐승의 무늬를 새기는 일이 잦았다. 짐승의 무늬는 무리가 보기에 좋았다. 수컷이 찾지 않는 암컷 아무개는 사냥 도구인 창 끝에 돌칼을 잘 엮었다. 무리는 무리의 아무개들을 똑같이 귀하게 다루었다. 무리의 한 몸체를 위해 아무개의 몸체는 힘껏 움직였다. 무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뜻하지도 않았으나, 아무개의 자그마한 움직임은 곧 무리의 몸체가 움직이는 듯한 큰 힘을 펼쳤다. 3만 5천년 전 그 때를 우리는 도구적 구석기라 부른다. 도구의 단순 사용을 넘어, 도구를 만들고 부려 낳아준 자연과 맞서던 시기였다. 몸체는 저를 낳은 아가리 속보다 오히려 깊고 복잡하다. 몸체의 탄생은 모든 존재와 존재자의 시간을 원점으로 되돌려 초토화 시킨다. 몸체는 수많은 세계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세계와 만나고 합성하며 다양한 기계를 생산한다. 저기 하늘나라의 유령에게 홀린 21세기의 근엄한 현자와 교부의 자손들이 꿈에서도 짐작 못한 몸체의 놀라운 광경이 벌써부터 펼쳐지고 있다. 보라. 야생의 보리밭에 희한하게 솟은 오동나무와 은사시나무 언덕 사이를 살펴 은사시나무 언덕 너머 너도밤나무 숲까지의 거리를 재고 보리밭의 일렁임과는 다른 숲의 움직임을 헤아리는 특별한 몸체의 관측 기계를. 암컷 무리의 생산적 몸체가 펼치는 보리방아 찧기와 가죽과 대를 엮어 의복과 이부자리를 짜는 정교한 직조 기계를. 수컷 무리는 날 선 창끝으로 떼를 지어 위협적인 자연의 거대한 몸체를 매끄럽게 절단한다.* 파괴와 척살 기계로 간교한 아무것도 목적하지 않은 채 스스로 도달하는 몸체의 자기 실현을 위한 자기 해체. 이제 무리는 점점 더 자기 파괴의 몰입으로 치닫는다. 더 큰 몸체인 자연과의 전쟁, 낱낱이 분열된 몸체의 자기 파괴적인 내부의 전쟁, 몸체는 분열된 자기 배반의 씨앗을 뿌려서라도 몸체의 드러남이라는 자기 확립의 최후를 결단코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최후는 쓸쓸하지 않다. 모든 존재(곧 실체)와 하나의 몸체를 이룬 주체는 비로소 최후의 평화에 몰입할 것이니. 천천히 존재 이전의 몸체에 깊이 몸 담그자. 팔을 내리고, 겸손한 그의 욕망을 따라. 성급한 욕망은 백 년이 흘러서야 겸손한 그 곳에 닿는다. 그러므로 서두르자.

 

 

 

 몸체의 탄생

 

 -몸체, 김재인을 따라서 나는 그를 존재의 일의적 내용 전부라고 말한다. (김재인의 몸체론, 김재현, 2027, 철학과 문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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