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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화론

철학과 철학사 과학적 노동에 대하여 / 이종영

김상 2006.04.19 10:22 조회 수 : 3508 추천:13

과학적 노동에 대하여

 

이종영

 

 

 

 

한국사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사회에서, 상투적인 위로의 말에 가볍게 만족해버리는 사회에서, 과학에 대해, 과학의 엄밀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편하다. 게다가 과학이 자연과학 또는 기껏해야 경험주의와 동일시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요즘에 와서는 과학은 독단주의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과학에 반대하는 힘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한국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은 유아론적인 자기중심적 폭력을 숨기고 있다. 그처럼 부드러움으로 가장한 폭력은 자신을 그 뿌리로부터 해부하려는 과학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아론적 폭력으로부터 ‘도주’하기에 급급한, 그러나 무의식 속에 그러한 폭력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자들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열정적으로 거부한다. 그들의 조급한 내면 속에는 끈질긴 인내의 시련을 요구하는 과학적 노동을 위한 공간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이 도피하려고 하는 ‘권위체’를 과학에 투사하기도 한다.

 

이 짧은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는,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적 노동은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지를 숙지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낭비하고 있는 많은 에피고넨들로 하여금 인식의 생산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로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의 표출에 불과한 철학의 해악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맑스는 철학을 역사적 유물론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프로이트도 철학을 편집증적 착란의 한 형태로 간주했고, 그리하여 철학을 메타심리학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라깡은 철학적 담화를 지배자의 담화로, 철학자를 궁정의 광인으로 간주했다. 레비-스트로스도 철학에 대한 자신의 혐오를 명백히 표현한다. 엄밀한 과학을 행할 수 있기를 염원했던 이들은 왜 한결같이 철학에 대해 명백한 부정적 태도를 표명한 것일까? 이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말자. 과학적 성취를 이룬 자들에겐 철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은 언제나 운동의 형태로, 노동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하나의 노동과정, 인식의 공백지대에 위치한 인식대상에 대한 노동과정이다. 또 과학은 그 원리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임을 유념해두자.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다.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자연이고, 자연법칙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몸과 두뇌를 가진 인간이, 밥을 먹고 똥을 누는 인간이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편집증적 상상력의 끈질김을 드러내줄 뿐이다.2) 하지만 전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폭력적인 철학적 결정론은 단 하나의 작은 규정성 또는 몇 가지 규정성들의 특정한 접합효과를 다루는 과학의 섬세한 결정론과는 전혀 다른 것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인식의 공백지대에 위치한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식대상에 대해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학자들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과도 분리되고 또 교수나 학문애호가들과도 분리된다. 오직 지금 현재 인식대상에 대해 노동을 하고 있는 자만이 과학자이다. 그가 어떠한 학문분과에 속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과학자들이 인식대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그 구멍을 섯불리 메우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지워진다. 과학자들은 그 구멍이 매우 오랜 노동을 통해서만 메꾸어질 수 있음을 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적다는 것, 인간의 인식능력은 매우 저열한 등급의 것이라는 것, 맑스가 평생을 거친 과학적 노동을 했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해서마저도 충분히 정합적인 인식을 생산해내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반면, 상징적 질서의 구멍을 인식의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식의 대체물로, 이데올로기로, 편집증적 상상력으로 메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상징적 질서의 구멍을 참아내지 못하는, 상징적 질서가 언제나 꽉 채워져 있어야만 안심하는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자들이 철학자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과학사는 인식을 위한 열정의 역사인 반면, 철학사는 편집증의 역사이다. 과학사는 인식론의 영역인 반면, 철학사는 정신분석학의 대상이다.

 

        

철학자들은 인식의 무대에 외부로부터 개입하여 인식의 생산을 방해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후 그 이유를 살펴보자.



        1. 진실, 참, 진리


        

참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한다. 즉 진실은 참된 사실이다. 이순신이 만약 1999년 9월 9일에 죽었다면, 그것이 참이라면, 이 사실은 진실이다. 진실은 따라서 사실의 수준, ‘팩트’(fact)의 수준에 위치한다. 올바른 ‘팩트’, 즉 ‘사실’로서의 진실의 수준에 관여하는 것은 ‘그래피’(graphie)이다. 오늘날의 수준에서의 역사학이나 민족지학이 그러한 ‘그래피’이다. ‘그래피’는 진실로서의 사실을 기술하려는 것이다.

 

        

반면, 과학은 사실을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면, 그것은 개별적이거나 사건적인 사실이 아니라 의미있는 특정한 반복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과학이 그러한 사실 그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과학은 사실의 생산을 설명한다. 이 말은 과학이 사실을 생산시킨 뿌리, 사실을 지배하는 법칙에 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참은 진실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참은 ‘팩트’적 수준이 아닌 순수 논리적 수준 또는 수학적 수준에 위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말해 참은 명제의 수준에 위치한다. 즉 올바른 명제가 참인 것이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라는 ‘수학적 진리’는 엄밀한 의미의 ‘진리’가 아니라 참이다. 이른바 ‘수학적 진리’와는 달리 엄밀한 의미의 진리는 실재를 지배하는 법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는 비록 법칙적인 것이긴 하지만, 또 비록 공간에 의해 매개된 것이긴 하지만, 결코 실재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삼각형은 순수논리적 구성물이거나, 또는 기하학에 대한 경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면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참은 모든 논리적인 언어활동의 수준에 위치한다. 사실과 부합하는 명제,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지 않은 명제는 참일 수 있겠지만, 결코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명제적 수준에 위치하지 않는다. 진리는 참된 명제들을 내포하지만, 참된 명제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진리가 참된 명제들을 내포하는 것은 실재하는 법칙을 드러내기 위한 논증 절차 속에서이다. 진리는 특정한 실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논증해주는 일련의 참된 명제를 내포한다. 즉 진리는 모든 참된 명제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참된 명제를 자기제시의 수단으로 내포할 뿐이다. 진리에 내포된 특정한 명제들은 오직 진리에 가닿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모든 논리적 형태의 언어활동에서 제시되는 명제들은 끝이 없지만, 진리는 특정한 실재, 부분적인 실재에 한정되어 있다. 명제는 언어활동의 층위에 속하지만, 진리는 언어활동을 매개로 특정한 실재에 가닿는다. 이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끝     없     는        명    제    들           ●

                                                                     

                                                                     

                                                                     

                                                                     

                                                                   

실재




        

만약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 태양이 5000미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사실이라면, “육안으로 볼 때 태양은 5000미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명제는 참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단지 감각적 사실에만 관여할 뿐이다. 객관적 사실에 관여하는 명제는 예컨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킬로미터”라는 명제이다. 하지만 이 명제가 진리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아직 사실의 수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거리를 그처럼 유지하도록 하는 구조적 법칙에 관여한다.

        

과학은 특정한 실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하려 한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우선 과학이 언어활동이나 명제 그 자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와 명제는 단지 과학의 수단 또는 재료이다. 과학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에 관여한다.

        

하지만 과학이 관여하는 것은 ‘모든 실재’도 아니지만 ‘개별자적 실재’도 아니다. 물론 과학이 관여하는 실재는 반드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관여하는 실재는 인간 내부의 심리적 현실일 수도 있고, 인간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을 규정하여 인간 내부를 구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상 과학적 대상은 비록 겉보기에 인간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다시 주체 자체를 규정하여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외적 대상들은 언제나 주체의 내면과 삶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대상이 되는 실재는 엄밀히 말해 실재에 대한 하나의 규정적인 힘이다.3) 실재에 대한 화학적 규정성, 물리학적 규정성, 생물학적 규정성, 생산양식적 규정성, 언어적 규정성, 무의식적 규정성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규정성들은 다른 규정성들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지니는, 즉 나름의 완결적인 자체적 구조성(構造性)을 갖는, 자율적 규정성이다. 과학자는 수많은 규정성들 또는 층위들이 상호교착적인 복합체를 이루고 있는 실재로부터 실재의 한 자율적 층위 또는 규정성을 독립시켜 인식대상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인식대상의 설정은 상징적 질서에 생긴 구멍으로부터 시작된다.

 

        

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생기는 것은 실재 속에서 설명될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그러한 모순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또 그는 그러한 모순을 해명해가면서, 자신이 아는 것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사실상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안다’고 하나는 것은, 과학적 인식을 제외할 경우, 편집증적인 주관적 판단들로 이루어진 상상적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안다고 하는 착각’에 그치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의 발견과정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즉 미래의 과학자는 실재 속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러한 모순에 대한 설명을 기존 기식들 속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한 그는 기존 지식과 실재사이의 모순을 발견한다(제2의 모순). 이윽고 그는 기존 지식 자체 내에서의 모순 또는 공백을 발견한다(제3의 모순). 결국 그는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실재의 모순과 관련된 기존 지식 내의 모순 또는 공백이 어떠한 것인지를 식별해야 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통헤 실재의 모순을 구조화된 인식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

        

이때 인식대상은 하나의 자율적 규정성의 파편적 부분이어서는 안 되고, 또 상호무관한 규정성들이 불필요하게 교착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하나의 인식대상은 문제삼아지는 실재를 생산하고 지배하는 법칙이 일종의 구조처럼, 구조화된 힘처럼 존재하는 장소여야 한다.

        

과학이 밝히려는 것은 진리이다. 사실상 과학만이 유일하게 진리를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진리는 언제나 과학적 진리일 뿐이다. 혹시 신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진리가 진정으로 진리일 수 있다면, 오로지 그 경우를 예외로 하고서 말이다. 진리의 생산조건을 밝힌다는 인식론은 철학적 논의들에 토대한 경우 필연적으로 관념적인 언어적 폭력으로 귀결한다. 포퍼나 쿤 등에게서처럼 말이다. 인식대상을 결여하고 있는 철학이 진리의 생산조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배에의 의지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진리의 생산조건을 말할 수 있는 인식론은 오로지 과학에 내재적인 인식론일 뿐이다. 바슐라르, 깡길렘, 코이레는 그러한 내재적 인식론을 실천한다.

        

과학이 생산하는 진리는 실재에 대한 하나의 규정성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법칙적 진리이다. 이 법칙적 진리는 매우 제한된 것이지만, 항구적인 것이다. 물론 그 법칙적 진리는 역사적으로 상이한 현상형태들을 가질 수 있겠고, 또다른 규정성들에 의해 차단되어 현실적으로 표현이 안 될 수도 있다.

        

과학적 진리가 매우 제한된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놀이는 결코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언어활동의 놀이적 성격을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모순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단지 언어놀이가 언어적 규칙 이상의 것이라는 것일 뿐이다. 즉 언어놀이는 규칙과도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소쉬르가 밝혀낸 랑그의 과학적 진리에도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놀이는 모든 언어활동의 수준에 폭넓게 위치하는 것이며, 소쉬르가 해명해낸 랑그의 과학적 진리는 언어활동에 대한 단 하나의 작은 규정성에만 관계하는 것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처럼 말이다.




     

                    언       어      놀      이                 ●

                                                                      ↑

                                                                    랑그의

                                                                  과학적 진리




        어떤 사람들은 “모든 공리계에서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괴델의 정리가 과학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과학은 괴델이 대상으로 한 산술적 진술의 무한한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과학은 단지 매우 제한된 부분적인 실재에만 관여할 뿐이다. 단 하나의 규정성에만 말이다. 과학이 관여하는 실재는 자연이고,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비록 역사 속에서 현상형태를 달리 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동일한 메카니즘을 갖고 지속되는 것이다. 과학이 밝히려는 것은 실재의 한 규정성의 작동메카니즘이다. 따라서 그 작동메카니즘에는 수학적 의미에서 증명도 반증도 될 수 없는 그러한 결정불가능한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과학에서는 단지 실재의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가 그처럼 작동하고 있는데, 무슨 결정불가능한 것이 있겠는가?

        존 캐스티와 베르너 드파울 리가 쓴 󰡔괴델󰡕(몸과마음, 2002)이란 책의 54쪽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 이 그림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 공간’이다. 괴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논리적 공간 속에서 특정한 형식체계를 통해 증명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는 결정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형식체계 M에 의해 증명된 것               결정불가능한 것

                        

                   ●

   

 

 

                                               형식체계 M에 의해 반증된 것




        

이러한 그림은 순수논리적 층위에 속하는 것이다.

반면 과학은 논리적 층위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관여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만약 위의 그림에서 과학의 위치를 비유적 의미에서 표시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인식의 공백지대를 탐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인접한 작은 점의 형태를 취할 것이다.

        

논리적 공간과 실재의 공간 사이의 혼동은 인식대상을 갖고 있지 못한 철학자들이 세계와 논리를 혼동해서 생겨난 것이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논리적 공간 속의 사실들이 세계이다”라고 말하면서, 실재의 세계, 즉 과학의 세계를 소멸시켜버린다. 인식의 대상을 갖지 못한 한 부르주아 철학자의 말장난이 권력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대중에 대해 ‘대상 a’로, ‘욕망의 원인’으로 제시하려는 무수한 나르시스적 아류들에게 자기과시적 소일거리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예컨대 언어놀이가 규칙에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 모르겠는가? 철학이란 동네 할아버지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차범근 감독의 ‘축구철학’도 있지 않은가? 반면 과학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들, 무의식, 착취, 지배, 권력 등등에 대해 그 내밀한 메카니즘을 알려준다.



        2. 개념과 이론


        

과학적 노동의 재료는 언어이다. 과학적 노동은 단어를 개념으로 변화시키면서 전개된다. 단어는 사물을 지시한다. 하지만 단어 자체가 그 지시되는 사물의 속성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은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그러한 단어들이 지시하고 있는 사물들의 속성을 대부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예컨대 “나는 저 자에게 주먹질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말할 때, 또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충동’이나 ‘사랑’이란 단어에 의해 지시되는 내적 실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충동이나 사랑에 대해 과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충동과 사랑의 동력과 기능양식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때의 앎은 불완전할 수 있다.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개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에 대해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일정하게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이 일정하게 확고한 인식을 제시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일지언정 실재의 작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나 가족을 예로 들어보자. 학교라는 단어와 학교의 개념은 다르다. 학교라는 단어는 단지 학교라는 장소를 지시할 뿐이고, 기껏해야 학교라는 장소와 관련된 몇 가지 이미지들을 동반할 뿐이다. 반면 학교의 개념은 학교의 내적 구조와 외적 규정성들을 드러낸다.

        

학교의 개념에 따를 때 학교는 우선 인문주의 학교와 자본주의 학교의 모순적 통일체로 드러난다. 인문주의 학교는 계몽적 기능을 외적인 규정성으로 갖고, 자본주의 학교는 노동시장에의 노동력 공급을 외적 규정성으로 갖는다. 학교는 교사, 교육수단, 학생의 결합형태라는 내적 구조를 갖는데, 이러한 내적 구조는 노동시장에의 노동력 공급과 계몽적 기능이라는 외적 규정성들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에 따라 학교의 내적 구조는 계몽의 대상이자 미래의 노동력이라는 학생의 이중적 위치를 중심으로 짜여지게 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 학교의 개념의 일단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이라는 단어와 가족의 개념은 다르다. 가족이란 단어는 기껏해야 가족이라는 장소에 대한 몇 가지 모호한 이미지를 동반할 뿐이다. 반면 가족의 개념은 가족의 내적 구조와 외적 규정성들을 드러낸다.

        

가족은 우선 성적 본능과 그 사회적 규제라는 외적 규정성을 갖는다. 이에 따라 가족은 사회적으로 규제된 성적 결합과 종(種)의 재생산의 장소로 나타나고, 다른 어떤 장소와도 비견될 수 없는 친밀성의 장소로 제시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 가족은 사회적 지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외적 규정성을 갖는다. 이에 따라 가족은 사회적 지배관계의 실현과 재생산의 장소, 사물화와 동일성의 독재의 실현장소, 타자의 자유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랑의 실현장소, 사랑과 증오의 양가적 관계가 복합적으로 관철되는 장소, 루이 알뛰세르가 말한 바 ‘가장 끔찍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등장한다. 내밀성의 공간 속에서의 남편, 아내, 자식의 관계라는 가족의 내적 구조는 이러한 외적 규정성들에 의해 복합적 양상을 갖게 된다. 그 내적 구조는 사랑과 결합한 폭력 및 사물화와 그것에 대항하는 기만과 배반으로 엮어진 오이디푸스적 구조이자 또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고 또 아예 오이디푸스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개념은 우리에게 인식 또는 적어도 인식의 단초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개념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념은 단지 대상의 내적 논리에 가닿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적 결실일 뿐이다. 라깡의 예를 들어보자.

 

        라깡에 따를 때, 충동, 욕망, 사랑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충동은 ‘사물’(Chose, 언어 이전의 실상(le Réel)이자 실상의 경계지점)로부터 파생되는 ‘머리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목표지점을 돌아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운동을 한다. 욕망은 판타즘에 의해 지탱되는 것으로 쾌락원리에 의해 매개되어 향유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갖는 것이자, 또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라깡은 본능의 개념을 아예 문제틀에서 축출해버린다.

        

라깡의 이러한 충동, 욕망, 사랑의 개념은 매우 흥미로운 것들이지만 아직 지극히 불충분한 것들이다. 즉 충동, 욕망, 사랑의 발생 계기, 동력, 대상 등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명확히 설정되지 못하고 있다.

        

생각을 해보자. 라깡은 충동이 ‘사물’로부터 비롯되는 ‘머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와의 원초적 관계가 ‘사물적인 것’이라고 할 때, 충동의 동력은 후천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충동의 거역할 수 없는 ‘충동적’ 성격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이 대답은 아직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또 라깡의 욕망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자. 1) 라깡은 욕망이 판타즘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욕망은 판타즘으로 가득찬 ‘머리가 있다.’ 그렇다면 ‘머리가 있는 욕망’과 ‘머리가 없는 충동’은 어떻게 모두 ‘대상 a’를 원인으로 가질 수 있을까? 2)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타자에 대한 것일까, 자기에 대한 것일까? 3) ‘머리가 있는’ 욕망은 향유에 대한 방어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자신의 존재를 향유하려는 ‘자아의 욕망’일까, 아니면 성적 욕망일까? 4) 라깡은 󰡔세미나󰡕 11집(세이유 문고판, 261쪽)에서 “욕망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욕망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은 같은 것일까? 5) 또 라깡은 “욕망의 실현을 욕망하는 것”과 “욕망의 비(非)실현을 욕망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실현 또는 비실현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로서의 욕망’과 그러한 욕망의 실현 또는 비실현을 욕망하는 ‘동사로서의 욕망’은 어떻게 다를까?

        

또 라깡은 사랑에 대해 여러 얘기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정합적이지 못하다. 결국 라깡에게서는 충동, 욕망, 사랑이 각각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은 서로 간에 포섭관계에 있는지 아니면 배제관계에 있는지,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들에 발생하는지 등등의 문제가 여전히 불명료하다. 그리하여 라깡은 충동, 욕망, 본능, 사랑을 구성 요소로 하는 무의식적 주체의 내적 구조라는 자신의 인식대상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라깡의 개념적 노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형식주의이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지배와 그 양식들󰡕의 머리말(28-32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라깡은 대상 속에서 대상의 논리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재하는 형식주의 논리학을 대상에 적용시킨다. 그러나 개념의 형성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적 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의 논리 앞에서 자신의 주관성을 철회하는 것이다. 반면 라깡은 자신의 주관성 속에 내재하는 형식주의 논리학을 인식대상에 부과한다. 하지만 과학적 노동에 있어서 논리학은 오직 대상의 논리를 읽어내는 데에 기여할 때에만 존재의미를 갖는다. 대상의 논리와 무관한 논리학은 과학적 노동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간이 나르시스적 욕망의 상상적 구성물에 불과한 주관적 자기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긴 과정이다.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에서 전개되는, ‘쾌락의 향유 → 마음의 법칙 → 덕성 → 문인들의 창작행위 → 법칙제정적 이성 → 법칙검증적 이성’의 과정과 또 이어서 「정신」 장에서 전개되는, ‘절대도덕 → 양심 → 아름다운 영혼 →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의 상호 화해’의 과정은 나르시스적 욕망의 구현물로서의 자기의식이 길고긴 변증법적 자기지양의 과정을 거쳐 붕괴되고, 나와 타자의 적나라한 동일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의식을 철회하고 대상 앞에 고개를 숙이는 과정, 대상의 논리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으로서의 개념생산의 과학적 노동이다. 따라서 개념생산의 과학적 노동은 자기의식의 변증법적 자기지양의 과정을 일정하게 거쳐나온 연후에만, 또는 적어도 대상의 논리를 존중할 수 있는 자기통제능력을 획득한 다음에야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 라깡에게서는 바로 형식주의 논리학이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자기의식의 한 형태로 존재했다.

        

개념은 대상의 논리로부터 도출된다. 대상이 내적 구조를 갖고 또 그 구조의 구성요소들을 갖는 한에서, 개념 또한 여러 하위 개념들을 포괄할 수 있다. 학교의 개념이 교사, 교육수단, 학생의 개념을 내포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개념이 자본가, 노동자, 착취, 잉여가치의 개념을 내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위 개념들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이론의 지위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념은 어디까지나 지시되는 대상의 내적 구조의 형식만을 말해준다. 상위 개념은 따라서 그 구성요소를 이루는 하위 개념들의 관계의 형식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엄밀한 의미에서 개념의 체계를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게다가 이론은 결코 개념의 굳어진 체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개념과 이론은 어떻게 다를까? 개념은 보편적인 규정성 또는 일반적인 규정성을 지시하는 반면, 이론은 살아서 운동하는 역사적 현실에 관한 것이다. 개념은 단어에 갇혀 있지만, 이론은 개념을 통해 현실과 관계한다. 한 마디로 이론은 개념이 지시하는 규정성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구체적 방식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보자.


        

1) 개념과 이론이 동일한 인식대상에 관계하는 경우.

        

2) 개념에 의해 지시된 규정성이 실현되는 개별적 경우에 이론이 관계하는 경우.


        

우선 첫 번째 경우, 이론의 대상은 엄밀하게 설정된 과학적 인식대상 자체이다. 하지만 이 인식대상은 개념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론화된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생산양식의 개념과 생산양식의 이론이 다르듯이, 지배양식의 개념과 지배양식의 이론이 다르듯이, 무의식의 개념과 무의식의 이론이 다르듯이 말이다.

        

맑스에 따를 때 생산양식의 개념은 생산자와 비생산자 그리고 생산수단 사이의 결합형식이다. 하지만 생산양식의 이론은 여러 역사적 생산양식들 속에서 생산자, 비생산자, 생산수단이 구체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계기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생산양식의 이론은 역사 속에서 계기적으로 연속된 여러 생산양식들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적 노동에 따라 생산양식의 개념 자체가 변화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관련해서도 이론과 개념은 다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개념은 자본가가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양식이다. 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구체적 현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해명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이론에서 가치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로 나뉘어지고, 교환가치는 다시 잉여가치와 노동력가치로 나뉘어지며, 다시 상대적 잉여가치와 절대적 잉여가치로 나뉘어진 잉여가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의한 매개를 거쳐 여러 형태의 이윤들과 지대로 나뉘어진다. 가치에서 생산가격으로까지 이르는 이러한 운동은 생산양식의 개념에서 말하는 생산자와 비생산자가 생산수단을 둘러싸고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 운동의 메카니즘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론을 만약 개념들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론은 개념들의 굳어진 체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개념들이 역사적 현실 속에서 운동하는 체계이다.

        

두 번째 경우, 예컨대 우리는 자본주의의 개념과 한국자본주의의 이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자본주의의 이론은 자본주의라는 규정성이 한국사회에서 실현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한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규정성이 한국사회에서 실현되는 구체적 방식은 언제나 다른 규정성들의 개입에 의해 중층결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노동에서 중층결정적인 여타 규정성들은 단지 그 규정성들이 중층결정에 참여하는 그 한도 내에서만 고찰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자본주의라는 개별적 경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본주의의 이론과 개념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나 신분제적 관계와 전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 왜냐하면 초과이윤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므로 ― 이 새롭게 인식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개념은 언제나 불완전하다고 했지만, 개념은 이론을 인도하면서 또 이론 속에서 부단히 수정된다. 또 이론은 부단히 새로운 역사적 현실을 만나면서 자기지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과 이론은 그것들이 과학적 개념, 과학적 이론인 한에서,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개념과 이론은 실재의 운동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개념과 이론은 그것들이 과학적인 한에서 상상적 구성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실재적 존재의 움직임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 실재는 언제나 그처럼 운동을 하고 있는 한에서, 과학적 개념과 이론은 일정한 확실성을 언제나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영미계의 과학철학자들이 무엇이라 말하건간에, 유클리드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관여하는 실재에 있어서는 언제나 타당하다.

        

이론은 개념을 자신의 수단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이론이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론은 단지 개념을 안내도구로 해서 현실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이론은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개념을 생산한다.

        

그러나 하나의 개념에 대해 다양한 이론이 존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자본주의의 과학적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상이한 이론들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이때 이론들의 다양성은 여러 이유를 가질 수 있다. 우선, 개념적으로 지시된 규정성이 실현되는 개별적 경우들의 다양성(중층결정되는 방식의 다양성)이 그 가장 큰 이유이겠다. 둘째로는 대상의 논리 앞에 자신의 주관성을 철회하는 훈련이 올바로 되지 않아, 과학적 이론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이론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 번째 경우의 다양성은 보다 더 정합적인 이론발전의 토대가 되겠지만, 두 번째 경우 다양성은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이론적 투쟁의 원인이 되겠다.

        

이론은 현실 속에서 구조화된 법칙적 운동을 만난다. 하지만 그러한 법칙적 운동은 철학적 결정론에서 말해지는 것보다 언제나 섬세하게, 일면적으로만 자신을 실현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의 모습을 완전히 감춰서 단지 부재하는 원인으로만 존재하기도 하고, 또다른 법칙적 운동들을 만나 전혀 새로운 접합효과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3. 징후, 구조, 법칙  


        

과학적 노동은 인식대상을 식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인식대상의 식별은 문제의식에 의해 인도된다. 문제의식이란 무엇일까? 정치적 문제의식, 윤리적 문제의식 등과 과학적 인식에의 길을 열어주는 문제의식은 다를 것이다. 과학적 인식에의 길을 열어주는 문제의식은 ‘알고자 하는 것’을 지니는 형태를 갖는다. 이 ‘알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 인식에의 노동으로 이어지면서 ‘알아내야만 하는 것’의 형태로 발전한다.

        

‘알고자 하는 것’은 체험과 지식의 괴리로부터 비롯된다. 즉 기존의 지식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는 체험의 존재가 ‘알고자 하는 것’을 동기짓는다. 우리는 그러한 ‘체험’에 대해 ‘왜’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인식에의 길로 접어든다.

        

물론 우리는 기존의 지식 또는 이데올로기와 괴리되는 수많은 체험들을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체험들을 그냥 흘러보낼 수 있다. 사실상 ‘왜’라고 묻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은 개인적으로 습득된 이론들의 힘일 수도 있고 개인사적으로 형성된 정신적 독립성의 힘일 수도 있다.4)

        

그러한 ‘왜’는 징후들의 발견을 통해 보다 구조화된 형태를 지니게 된다. 현실의 모든 현상들은 징후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날 문득 어떤 사실이 징후로 다가올 수 있다. 징후란 숨겨져 있는 구조의 일단을 암시해주는 현상이다.

        

사실상 모든 현상들은 숨겨져 있는 구조의 생산물이란 점에서 징후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징후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주로 문제의식을 가진 자에게이다. 문제의식은 현상을 징후로 변화시켜준다. 흔하게는 아니고 오히려 매우 드물게.

 

 



문제의식

 

 

현상 ―→ 징후



        문제의식은 경험적 수준에 위치한다. “왜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을까?”, “왜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할까?”, “왜 나의 아내는 노이로제에 걸리는 것일까?”와 같은 문제의식들은 바로 경험적 사실들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이다. 하지만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아직 인식대상의 설정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다.

        

문제의식은 경험적 수준에 위치한다. 반면 징후는 경험적 수준에 위치하면서도 경험을 생산시킨 구조를 암시해준다. 달리 말해본다면 징후는 경험적 수준과 구조적 수준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진 자에게 하나의 사실이 징후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돌연히 그 사실로 인해 구조의 일단을 엿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징후

 

 

사실 ―→ 구조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징후이다. “왜 신문의 정치면은 맨날 똑같은 얘기들을 싣고 있는 것일까?”, “왜 자본가들은 서로 생사를 건 경쟁을 하는 것일까?”, “왜 노이로제 환자는 의미 없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일까?”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구조로 접근하게 된다. 신문의 정치면이 맨날 똑같은 얘기들을 싣고 있다라는 징후로부터 우리는 정치가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즉 정치가 계급지배의 관리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관건은 정치 자체가 아니라 정치를 그처럼 위치지우는 지배양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본가들간의 경쟁이라는 징후를 통해 착취에서 생산양식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고, 무의미한 것에 대한 노이로제 환자의 집착을 통해 노이로제의 숨겨진 전이적(轉移的) 구조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징후는 구조에의 길을 열어준다. 물론 하나의 징후는 다른 징후들로 이어지면서 구조의 짜임새를 보다 온전히 식별하도록 해주겠지만 말이다. 구조가 경험적 수준에 위치하지 않고 오직 징후로부터만 접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구조가 지성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스똥 바슐라르가 󰡔새로운 과학정신󰡕(PUF, 1987)에서 과학이란 “정신에 내재한 합리적 힘을 통해 세계를 도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꼬이레나 깡길렘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것이다. 또 발터 벤야민이 󰡔독일비극의 원천󰡕에서 말한 ‘관조’도 숨겨진 구조를 정합적으로 구성해내기 위한 정신적 힘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구조의 지적 구성은 라깡에게서처럼 외재적 논리의 부과를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구성과정은 오직 징후들을 통해 드러나는 구조의 내적 논리를 인내심을 가지고 뒤따름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지성

 

징후 ―→ 구조



        

징후들을 통해 정합적으로 구성된 구조는 과학적 인식대상을 이룬다. 생산양식이라는 대상, 지배양식이라는 대상, 무의식이라는 대상, 랑그라는 대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출발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인식을 해야할 ‘대상’을 갖춘 것이다. 이 대상은 그러한 우리에게 외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 대상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규정성인 것이다. 대상이 주체를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헤겔이 대상인식은 곧 자기인식이라고 했듯이 말이다.

        

과학적 인식대상을 설정했다는 것은 이제 과학적 노동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 노동이란 그처럼 설정된 인식대상에 대해 노동을 하여 새로운 인식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노동의 과정에서 인식대상은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새롭게 설정될 수 있다. 라깡이 󰡔세미나󰡕 11집에서 “과학의 진화과정 속에서 과학의 대상이 부단히 변화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인식대상에 대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식대상으로 설정된 규정성의 구조의 작동메카니즘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인식대상의 구조의 작동메카니즘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생산해낸 뿌리, 그 구조를 움직이는 법칙적 힘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구조를 그 뿌리로부터 포착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그 구조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정합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 구조에 혼재하고 있던 외삽적 요소들을 축출할 수 있다. 즉, 인식대상에 대한 노동은 인식대상의 구조의 수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대상의 구조를 생산시킨 법칙적 힘으로부터 행해지는 것이다.

        

인식대상의 구조를 뿌리로부터 포착한다는 것은 예컨대 지배양식을 정체성의 향유와 성적 권력의 획득을 위한 남근적 욕망으로부터 포착한다는 것, 생산양식을 잉여가치의 착취를 동기짓는 경쟁과 몰락에의 불안으로부터 포착한다는 것, 노이로제를 그 숨겨진 의미를 이루는 성적 욕망으로부터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뿌리로부터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합적으로 포착된다. 구조는 그러한 뿌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대상에 대해 과학적 노동을 가해서 생산되는 새로운 인식은 그것이 인식대상을 움직이는 법칙적인 힘을 포착함으로써 생산된 것일 때에만, 인식대상의 뿌리로부터 생산된 것일 때에만, ‘과학적 진리’라는 명칭을 가질 수 있다.



        

4. ‘적용’의 반(反)과학적 성격


        

과학적 노동에 있어서 ‘적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노동은 인식대상의 내적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인식의 노동을 안내하는 것일 뿐이고, 이론은 언제나 역사적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메카닉한 적용의 대상이 아니다.

        

적용이란 언제나 인식대상의 외부에서 발전된 것을 인식대상에 부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용은 언제나 사실에 대한 폭력이다. 그처럼 폭력적인 적용이 행해지는 이유는 과학적 노동을 ‘흉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그처럼 과학적 노동을 ‘흉내’내는 이유는, 과학적 노동을 행하기 위한 주체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작업결과를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명예, 권력, 지위 등을 획득하기 위해서.

        

적용은 언제나 외부에서 발전된 개념과 이론을 나름의 고유성을 갖는 인식대상에 부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가장 뛰어난 경제사학자들 중 한 명인 이영훈 씨는 조선시대의 생산양식을 연구하면서 몇몇 농장의 경험적 사례와 극히 거시적인 수준의 국유제·사유제 논의를 결합시킨다. 표면적이고 국지적인 경험들에서 갑자기 거대이론으로 비약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영훈 씨가 조선시대의 생산양식이라는 자신의 인식대상의 내적 구조에 대한 정밀한 분석에 착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외부에서 발전된 ‘국유제’ 또는 ‘사유제’ 등의 개념을 폭력적으로 부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의 생산양식의 내적 구조는 국가, 양반지배계급, 노비, 양인(良人) 사이의 여섯 가지 관계의 결합으로 짜여진다.

아래의 그림에서처럼.



                                         ①

                            국가 ───────── 양반

                             │             ④       │

                          ② │                      │ ③

                             │              ⑤      │

                            양인 ───────── 노비

                                         ⑥



        

이 중 ①은 양반지배계급과 그 계급지배 재생산기구 사이의 관계이고, ③은 생산관계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 착취관계이다. ②는 계급지배 재생산기구의 물적 토대로서 일정한 동맹관계이고, 반면 ④는 지주-전호 사이의 착취관계이거나 이데올로기적 평등관계(초기) 또는 지배관계(중기)이다. 또 ⑤는 재생산기구의 물적토대이자 착취관계이고, ⑥은 지주-전호의 착취관계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차별관계이다.

        

조선시대의 생산양식은 이러한 여섯 가지 관계와 그것들의 결합방식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분석이 행해지기 이전에는 결코 ‘국유제’니 ‘사유제’니 하는 용어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조선시대 생산양식의 내적 구조에 대한 분석 결과는 ‘국유제’니 ‘사유제’니 하는 거칠은 결론으로는 귀착되지 않을 것이다.

        

이론의 ‘적용’이 유달리 많이 행해지는 영역은 아마도 문학 연구의 영역일 것이다. 이 사실은 문학 연구가 아직 과학적 연구의 길에 전혀 접어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과학적 외장’을 취하기를 열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적 외장’이 갖는 폭력적 성격은 과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연히 과학에 대한 반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러한 반감은 ‘과학적 외장’이라는 폭력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정당한 것이면서도, 자신의 저항 대상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눈먼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 적용되는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은 오히려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왜곡할 뿐이다. 구조주의는 친족과 신화라는,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병리적 표출양식이라는 고유의 인식대상을 갖는다. 자신의 인식대상을 떠난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은 유효성과 분석능력을 잃고, 일종의 폭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문학은 과학적 노동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과학적 노동은 언제나 매우 제한된 규정성에만 관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정된 규정성에만 관여하는 과학적 노동은 문학과 같은 폭넓은 현상에는 개입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문학이 과학적 노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적 활동 그 자체, 순수한 문학 행위 그 자체로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은 적용될 수 없는 영역을 인식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문학적 활동 자체는 그것이 오히려 어떠한 ‘적용’ 행위의 대상도 될 수 없음으로 해서 바로 과학적 인식대상일 수 있다. 과학적 인식대상은 오직 인식의 공백지대에서만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학적 노동이야말로 가장 반(反)메카닠한 활동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과학적 노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과학적 인식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적 활동 그 자체는 어떠한 형태 아래 과학적 인식대상을 구성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문학적 활동 자체’란 어떠한 것일까?

        

프루스트는 1909년말부터 1922년에 죽을 때까지 “실내벽에 코르크를 대어 주위의 소음을 방지하고 덧문마저 닫아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게 해놓은”(정음사판, 1권의 해설) 자기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다. 그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한 힘은 무엇일까? 위대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위대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욕심만으로는 위대한 작품이 생산될 수 없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완전해지면 완전해질수록 의도는 예술로부터 떨어져나간다”고 한다(󰡔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1984년판, 130쪽). 루카치도 󰡔미학󰡕(제3권, 미술문화사, 49쪽)에서 “예술적 반영에서도 주관을 순화시키는 과정이 선행”한다고 한다. 프루스트에게는 주관적 야망을 넘어서는 어떤 것, 대상의 아름다움 앞에서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관적 의도를 잃어버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독한 자가 이 덧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애달픈 사랑일까? 모든 죽어가는 존재들 속에서 반짝이는 빛들에 대한 이끌림일까?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문학 활동 자체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것이 과학적 인식대상을 구성할 수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 구체적인 문학 활동 자체는, 그러한 문학 활동이 만약 엄밀한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주관적 의도’로부터 자유로워진 문학적 주체성이 예술적 형상화의 대상에 대해 문학적 노동을 행하는 활동이다.

        

이때 문학적 주체성의 형성 자체는 과학적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언제 문학적 주체로 탄생했는지, 카프카가 언제 문학적 주체로 탄생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문학적 주체성은 문학적 노동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속단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쨋거나 과학적 인식대상은 문학적 노동과정 속에 있는, 문학적 노동을 행하고 있는 문학적 주체성, 또는 문학적 노동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문학적 주체성이다.

        

문학이란 개별성(Einzelheit, singularité)의 수준에서 ― 루카치가 강조한 특수성(Besonderheit, particularité)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 주체성의 진실과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주체성은 타자의 주체성일 수도 있고 작가 자신의 주체성일 수도 있지만, 문학적 주체는 그러한 주체성을 자신의 주관적 의도를 버린 채 객체적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문학적 노동과정 속에서 자기포기를 견지하게 하는 힘이 문학적 주체성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어떠한 힘일까? 그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일종의 진리체험에서 비롯되는 힘일까? 나로서는 지금 이러한 것들을 지극히 막연한 수준에서 말할 수밖에 없다. 여하간 과학적 인식대상으로서의 문학적 활동 자체는 문학적 주체와 그의 체험세계를 결합시켜주는 특정한 자기포기적 관계와 그 동력적 원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의 경우, 만약 문제가 되는 시가 횔더린이나 김지하의 시처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면, 시적 주체성은 언어를 뛰어넘어 있는 일종의 진리체험일 것이다. 그 진리체험은 쓸쓸하고 황량한 것일 수도 있겠고 또 무한히 따슷한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언어를 통해 전달되면서도 언어를 뛰어넘는 진리체험인 한에서, 그것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 경우 과학적 인식대상으로서의 시적 활동 자체는 언어들 사이로 진리체험을 전달하는 시적 주체성의 노동이다.



        

5. 철학자들은 왜 궁정의 광인인가? 철학적 담화는 왜 지배자의 담화인가?


        

라깡은 1972년에 쓰여진 「에뚜르디(Etourdit)」라는 논문에서 철학자를 ‘광인’(狂人)이라고, ‘미친 자’라고 규정한다(󰡔실리셋󰡕 4집, 9쪽 주1). 광인의 특징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광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한다. 물론 그러한 ‘횡설수설’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기는 하다.

        

광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대상이 없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이유, 그가 말하는 목적은 확실치 않다.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도 확실치 않다. 철학자들이 바로 그렇다. 철학자들은 광인처럼 대상이 없는 말을 한다. 알뛰세르는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의 명제 3과 명제 4에서 “철학은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철학은 과학이 대상을 갖는다는 의미에서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즉 철학은 그 비밀을 알아내야만 하는 인식대상을 갖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인식대상을 갖지도 않으면서 왜 그처럼, 광인처럼 ‘횡설수설’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인식을 갖고 있는 자를 흉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깡은 「에뚜르디」에서 철학자들을 ‘쌍블랑’(semblant)이라고 한다. ‘흉내내는 자’, ‘...척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왜 그처럼 흉내를 내는 것일까? 권력을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듯한 흉내를 냄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 ‘가짜 인식’을 권력의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반면 인식의 생산에 몰두하는 과학자들은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의 생산 그 자체가 그에게는 가장 큰 향유를 이루기 때문이다.

        

라깡에 따를 때, 광인인 철학자들은 진리의 빈 자리를 메꾼다. 진리의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상적 구성물로 그 빈 자리를 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사실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진리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식대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대상이 없이는 진리도 없다. 진리는 언제나 인식대상에 대한 진리이다.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 바로 진리이다.

        

알고자 하는 사실이 없다면 진리의 생산이 없다는 이 자명한 사실을 다시 한번 머리에 새겨두자. 철학자들은 알고자 하는 사실이 없으므로, 인식대상이 없으므로, 진리를 가질 수 없다. 인식대상을 결여한 철학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철학자는 거짓 진리를 내세우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자이다.

        

물론 철학자는 일종의 상상적인 방식으로 허구적 대상을 갖기도 한다. 엄밀한 의미의 인식대상이 될 수 없는 허구적 대상들 말이다. 예컨대 전혀 그 구성적 규정성들이 밝혀지지 않은 허구적 총체성으로서의 세계 전체, 전혀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실체’나 ‘존재’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세계’, ‘실체’, ‘존재’에 대해서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다. 그것들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 인식대상과 그러한 ‘허구적 대상’ 사이의 차이는, 과학적 인식대상에 대해서는 내적 구조와 외적 규정성을 알고 있는 반면, 철학의 ‘허구적 대상’에 대해서는 그 내적 구성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허구적 대상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진리일 수 없고 단지 ‘느낌’ 또는 ‘의견’일 뿐이다.

        

철학자들은 (그 내적 구성을 모르므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들의 ‘느낌’이나 ‘의견’을 ‘인식’이라고,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진리는 필연적으로 ‘거짓된 진리’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진리’를 내세우거나 전혀 그 내적 구성이 밝혀지지 않은 허구적 대상에 대한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전체 현실이 세계이다”, “세계와 삶은 하나이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적용된, 생각된 명제기호가 사고이다”라는 식으로, 세계와 사고에 대한 엄청난 허구들을 말한다. 과연 세계가 진정으로 그러할까? 과연 사고가 진정으로 그러할까? 그러면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철학적 ‘횡설수설’이다.   

        

라깡은 철학자를 광인이라고 하면서, 특히 ‘궁정의 광인’이라고 다시 규정한다. ‘궁정’이란 현대적 장소가 아니다. 궁정은 진리의 현대적 생산조건이 성립하지 않은 장소이다. 그렇다면 ‘궁정의 광인’으로서의 철학자는 진리의 현대적 생산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자이다. 따라서 현대의 철학자들은 시대착오적 존재이다. 진리의 생산조건이 부재하는 ‘궁정’에나 존재해야 할 광인들이 오늘날에도 아직 남아 ‘세계’, ‘존재’, ‘실체’에 대한 느낌들과 의견들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거짓된 지식을 이용해 권력을 획득하려는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그러한 욕망의 담지자이다. 그들이 그러한 욕망을 기꺼이 담지하는 것은 스스로를 ‘대상 a’로, ‘욕망의 원인’으로 제시하여 타자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다. 도대체 아무런 인식대상이 없이도, 무엇에 대해 말한다는 목적이 없이도, ‘횡설수설’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말을 이용해 다른 무엇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라깡은 󰡔세미나󰡕 17집과 「에뚜르디」에서 이처럼 권력을 획득하려는 욕망에 의해 지배받는 철학자들의 담화를 지배자의 담화로 간주한다. 도대체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담화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적 담화는 구조적으로 지배자만이 행할 수 있는 담화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생각을 해보자. 철학적 담화가 인식대상을 갖지 않는 것은 인식에의 열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질서에 구멍을 뚫어주는 체험이나 계기를 철학자들은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죽음에 대한 의문,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 자체를 구조화하고 있는 규정성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라깡은 이 점을 확실히 지적한다. 그는 “주인은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가?”라고 물은 뒤, “진정한 주인은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다. 그는 욕망하는 것은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 뿐이다”라고 대답한다(󰡔세미나󰡕 17집, 23-24쪽). 즉 철학자들이 인식대상을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그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이고, 적어도 이 세상 밖이 아닌 이 세상에 관한 한 그들은 상징적 질서와 괴리되는 체험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인식에의 열망을 갖지 않으면서도 인식의 무대에 개입하고 싶어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진리인양 내세우려 한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철학자들이 말할 권리와 시간을 갖는 지배자들이라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은 이처럼 말할 권리와 시간을 갖지 못한다. 첫째로,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는 사실, 둘째로, 말할 권리와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은 철학자가 지배자임을 확실히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을 획득하고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교설(敎說)의 형태로 제시할 뿐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착취관계와 지배관계를 사상(捨象)하고서 리(理)와 기(氣)를 말하는 것이고,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착취‘관계’와 지배‘관계’를 사상한 채 ‘관계’론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담화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경계를 제거한다. 또 확실하게 아는 것과 단지 추측되는 것,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도 제거한다. 사실상 지배자의 담화로서의 철학적 담화는 ‘무지에의 열정’에 의해 규정된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실재, 인식대상이 없이 횡설수설하는 자신의 진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식의 공백지대에 접하여 앞으로 더 밀고나갈 용기를 갖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인식의 공백지대를 접하게 된다면 그들은 마치 ‘심연’을 만난 듯 몸서리치며 곧장 ‘자기자신’으로 회귀한다. 이때 ‘자기자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지의 근거로서의 나르시스적인 상상적 구성물이다. 이처럼 상상적인 ‘자기자신’으로 회귀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실재’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지에의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철학적 담화가 인식의 무대‘에 개입하면 오히려 과학적 인식의 노동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몰아부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학적 담화에 대한 철학적 담화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철학적 담화는 한편으로는 자기자신과는 달리 인식을 생산해내는 과학적 담화를 비방하면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거짓되게 부각시켜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담화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과학적 담화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교설화(敎說化)하기 위해서는 이미 생산된 과학적 담화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담화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담화는 자신의 독트린화의 근거로서 과학적 담화를 필요로 한다. 바로 그래서 라깡은 󰡔세미나󰡕 17집 21쪽, 173쪽 등에서 철학을 노예의 지식을 탈취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또 루이 알뛰세르는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서 철학자들의 기본적 성격을 “과학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사실상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는 제법 복합적이다. 그 관계들의 몇 가지를 열거해보자. 전제해둘 것은 이미 말했듯이 과학자란 ‘과학’이라 칭해지는 학문분과에 속해있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인식대상에 대해 노동을 하는 자라는 것이다.


        

1) 우선 모든 과학자들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일정한 철학을 지닌다. 모든 사람이 철학을 지닐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2) 몇몇 진지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인생의 특정 시점에서 과학자로 전향한다(맑스). 또 어떤 철학자들은 과학자로 전향하길 열망하지만 중도에서 포기하고 오히려 반동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루이 알뛰세르).

        

3) 자신의 허구적 대상에 대한 몇몇 철학자들의 ‘의견’은 과학적 인식대상 설정의 통로를 열어주기도 한다(스피노자, 헤겔...).

        

4) 철학적 외장 속에서 과학적 노동이 행해지기도 한다(헤겔의 󰡔정신현상학󰡕).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시대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들의 철학이 과학을 착취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즉 그들은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철학자로서의 그들은 과학자로서의 그들을 착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 철학자들은 과학을 순수하게 착취하기만 할 뿐이다(베르그송, 들뢰즈).

        

그 내적 짜임새를 모르면서 실체, 양태, 자연, 정신, 세계,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러한 점에서 철학은 언제나 편집증적 상상력이다. 라깡은 󰡔세미나󰡕 20집 115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적인 과학이 도래하기 이전에는 인식에 있어서 판타즘만이 존재했었다.” 이때 판타즘은 바로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사는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된다. 철학사는 편집증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철학은 상징적 질서에 뚫린 구멍을 서둘러 메꿔 버린다. 스스로를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모르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식을 생산하는 듯한 ‘흉내’를 낸다. 속이 텅빈 ‘범주’들을 통해서. 그리하여 실재에 대해서는 구멍이 지속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상징적 질서에 구멍을 메꾸고 실재에 구멍을 뚫는 상상적 질서에 의해 지탱되는 일종의 보로메우스 매듭처럼 나타난다.



        6. 존재론과 윤리학


        

하지만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에 왜 이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존재에 대해 철학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 한 명의 명상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불교는, 또 도교는, 존재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과연 존재론이 철학에서 한 분과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지성사 비판의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원래 현존하는 철학은 그 한편에 있어서 매우 불완전한 형태의 지성사학으로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단지 지성사학의 맥락에서 ‘존재자’ 개념을 비판하고 ‘존재’ 개념을 복권시켰을 뿐이다. 하지만 ‘존재의 망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가 존재 자체에 대해서 접근이나 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존재’는 과연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 과연 그가 󰡔존재와 시간󰡕에서 20세기 초 독일의 시대정신을 반영할 뿐인, ‘세인의 담화’를 비판하는 문명비판론을 제기하고, 세대에 의한 결정․결단을 다소간 파시스트적으로 부르짓은 후, 결국 후기 작품에 와서, 서로 공속적으로 존재하는 대지, 하늘, 신적인 것, 죽음을 맞아힐 자가 노는 놀이를 세계라고 할 때, 소위 하이데거의 전공자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물론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열어준 것은 너무도 많다고.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론의 귀착점이 대지, 하늘, 신적인 것, 죽음을 맞이할 자의 공속적 놀이라는 것은 좀 너무 하지 않을까?

        

바로 그러한 것이 철학이다. 인식대상을 갖지 않는 철학의 운명은 결국 자신의 주관성의 토로로 귀착하는 것이다. 요즘 ‘새로운’ 존재론을 내세우고 알랭 바디우에게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과연 피와 살을 가진 존재가 바디우가 생각하듯이 수학을 통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일까? 개별성과 무한성이 과연 수학을 통해 충분히 접근될 수 있을까? 1과 2 사이가 끝이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될까? 바디우가 ‘존재론적으로 불필요한’ 수학적 존재론 속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것은 그가 혁명을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지휘’하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그는 진리공정들의 공속적 사고가능성을 철학이 담당하여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개별성의 정치를 주장하는 그가 왜 철학에게 진리공정들을 전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떠맡기는 것일까? 진리공정들 그 자체는 민중들처럼 눈이 멀어서 지배자인 철학의 ‘지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바디우의 존재론은 라깡이 󰡔세미나󰡕 17집에서 말하고 있는 주인의 담화에 그대로 부합한다.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진 라깡이 그래도 지배의 담화로서의 철학의 성격을 명확히 꿰뚫어 본 데에는, 그가 그 누구보다도 존재론에 있어서 앞서 나갔다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존재론에 있어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의식의 주체’라는 과학적 인식대상의 천착을 통해서이다.

        

철학적 존재론은 존재를 건드리기나 하는가? 철학은 언제나 너무 일찍 온다. 상징적 질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서두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의견’, 겉보기엔 현명한 듯 하지만 결국은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드러나는 ‘의견’에 그치고 만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슬픔은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힘(코나투스)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은 남성지배사회의 수동적 소녀가 하는 어린애같은 애기처럼 우스꽝스럽다. 슬픔을 모르는 존재야말로 백치가 아닌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슬픔이고, 그러나 슬픔을 감당하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 자신이 슬픔을 몰랐다면 이후의 과학 발전에 유익한 기여를 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가닿을 수 있었을까? 진정한 존재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물학, 의학, 영성학, 정신분석학의 발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잘못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모르는 것에 대해 추측을 할 때는 결코 ‘교설’의 형태를 취하면 안 되고, 단지 ‘시민의 의견’으로서 진술해야만 한다.

        

물론 싸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드러낸 ‘자유의 현상학’은 매우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만, 그것은 싸르트르가 ‘자유의 운동형태’라는 명확한 연구테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결국은 ‘무’로 환원될 뿐인 그의 대자존재 개념은 사실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다. 그에 따를 때 죽은 사물에 불과한 즉자존재와 대립되는 진정한 존재로서의 대자존재는 ‘무’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무’가 아닌가? 즉자존재도 어차피 ‘무’이므로. 사실상 싸르트르는 오로지 ‘자유의 문제’를 다루었을 뿐인데, 그는 그것을 ‘존재의 문제’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철학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많은 철학적 범주들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이성’이나 ‘정신’과 같은 범주,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실체’나 ‘양태’와 같은 범주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오히려 알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5) 한의학에서 음양오행의 범주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지배자들의 담화이다.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자. 이미 보았듯이, 그들은 지배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아무것이나 말을 하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을 감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지배자적 지위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배자들인 철학자들이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신의 인식대상을 갖지도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철학자들이 타인들에 대해, 사회에 대해,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비윤리적인 존재이므로 ‘그들 자신의 윤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지배자로서, 오로지 ‘피지배자의 윤리’에 대해 말할 따름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윤리학은 고압적이다. 즉 철학자들의 윤리학은 “너와 내가 같이 살기 위해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나보다 못난 너는 이렇게 해야 돼!”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슬픔보다는 기쁨을 택하라고 하고 감정의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이성과 인식을 택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윤리학이 아니고, ‘아동교육학’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처럼 말할 것이다. 심지어 칸트는 “너는 이것을 지킬 수 없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돼”라고 말한다. 또 레비나스에게서 타자는 같이 노동하는 타자가 아니라 초월적인 타자, 신에 준거되는 타자이다. 헤겔이 윤리학을 쓰지 않은 것은, 윤리란 일하는 시민들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6)

        

이 점을 확실히 해두자. 윤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노동하는 자들 뿐이다. 철학자는 윤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적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철학적 사변, 달리 말해 철학적 편집증일 뿐이다. 노동과는 달리 철학은 타자에게 소용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단지 타자를 기만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고 편집증의 역사로서의 철학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반면 이미 보았듯이 과학적 노동은 존재한다. 과학적 노동은 우리가 알아야 할 인식대상에 대해 인식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이 인식은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것이고 불완전할지언정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명백한 도움을 준다. 따라서 과학자는 윤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윤리는 오직 노동하는 시민의 자격으로서만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하는 시민은 자신의 특수한 노동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의 체험, 즉 ‘실재의 확인’을 통해 윤리에 대해 기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도 과학적 노동의 성과로서 드러난 실재의 부분적 측면을 통해 윤리에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라깡은 󰡔세미나󰡕 7집에서 정신분석적 노동의 성과에 기초하여 윤리에 대해 말한다. 왜 윤리는 항상 갈등적일 수밖에 없는지, 왜 윤리는 지키기 싫은 것을 언제나 지키라고 하는지 말이다.

        

또한 과학은 윤리의 역사에 대한, 역사적 실재로서의 윤리의 존재형태들에 대한, 과학적 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 윤리를 부과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지배자의 내적 갈등형태와 부과된 윤리를 지키는 피지배자의 내적 갈등형태 사이의 역사적 접합양식들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노동이 그것이다. 지배자의 주관적 판단들로 가득한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그러한 과학적 노동 자체가 결코 윤리를 구성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다만 노동하는 시민들이 어떻게 내적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근거를 제시할 따름이다.



        

7. 한국에서...


        

과학의 개념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한국에서 이론은 종종 종교의 형태를 취한다. 또 그래서 손쉽게 종교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이론들만이 널리 유통된다. 손쉽게 종교의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이론들이란 상징적 질서에 생긴 구멍을 서둘러 메꾸려는 편집증적 상상력에 토대한 것들이다.

        

그래서 공자, 주자를 숭배하던 전통이 이제는 들뢰즈나 네그리라는 우상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심리적 필요 때문이다. 우상을 필요로 하는 심리적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힘든 인식에의 노동을 스스로 행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가르쳐주는 ‘안다고 가정된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처럼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여겨질 수 있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편집증적 에세이스트일 수밖에 없다.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명확히 파악하면서 인식의 공백지대를 탐사하는 과학적 노동을 하는 자들은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경쾌함’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 경쾌함은 이성(異性)을 유혹하려는 몸치장과 같은 것이다. 상징직 질서의 구멍을 편집증적 상상력으로 가볍게 메워버리는 경쾌함이 그것이다.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과학적 노동은 경제주의적 논리에 대립한다. 반면 우상이 생산되는 것은 사고의 경제, 사고의 절약 또는 면제를 위한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는 과학적 노동의 절차가 제대로 교육되지 않는다. 이론이 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가르쳐지지 않는다. 발전되는 것은 과학적 노동을 회피하는 기술들이다. 빵을 원하는 자들은 경험주의적, 통계학적인 공학적 논문들을 쓰고, 권력을 원하는 자들은 기성의 이론들을 수입하여 전파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전파’한 이론을 우상화한다. 이들은 자신의 우상과 스스로를 일체화하여 자기자신은 잃어버리지만 한시적인 권력을 얻는다. 우상이 현실검증을 거쳐 탈우상화될 때까지 말이다. 그 때 이들은 새로운 우상을 또 만들어내야 한다.

        

빵을 원해 공학적 논문을 쓰는 현상은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더욱 강화될 것이다. 반면, 우상을 만들어내는 현상은 과도적인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그러한 불필요한 매개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직접 읽으면 될 것을 불필요하게 매개하면서 오히려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과학적 인식대상 설정을 매개해주는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있다고 해보자. 중요한 것은 철학적 문제나 과학적 인식대상이 없는 자들의 글을 ‘학문적인’ 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에세이들 또는 잡문들을 쓰는 것을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기능을 한다. 다만 학문적이지 않을 따름이다. 문제는 불필요한 ‘학문적’ 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남이 한 얘기들을 그대로 요약 반복하는 글들,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한 개념적 이해 자체가 안 되어 있는 글들, 아무런 목적 없이 쓰여진 글들, 논증 안 된 주장들 또는 선언들 만이 있는 글들이 그러한 글들이다. 한국에서 일단 필요한 것은 그러한 글들을 없애는 것이다.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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