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이 곧 실천이다 – 인문학과 실천학

아마도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갈등은 오래된 만큼 반복되는 고민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갈등은 가짜 문제로 인한 갈등이며, 따라서 폐기되어 마땅하다. 이론은 논리와 말 차원에서의 전투이다.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말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이론의 작업이다. 심정적으로는 반감이 가지만 대세로서 힘을 행사하는 담론들을 접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담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 경합시켜야 한다. 이론은 다른 이론하고만 싸울 수 있다.

이론이 현실적인 폭력 앞에서 무력하다는 점은 판을 달리하는 문제이며, 논의를 잘못된 방향으로 뒤트는 언사이다. 현실적인 폭력 앞에서는 이론만 무력한 것이 아니며, 아주 많은 것들이 무력하다. 괜히 이론의 약함만을 강조하지는 말지어다.

다른 한편 이론은 이론가의 삶의 실천이 빚어낸 산물이다. 이론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 이론 창조요 이론적 전투이다. 어부에게 농사를 못 짓는다고 탓하는 것은 범주 착오이다. 사람마다 각기 사는 자리와 사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이론가는 언어라는 무기를 쓰는 사람이며, 자기 영역에서 얼마나 잘 해내느냐 하는 점만이 시금석일 뿐이다.

더구나 이론은 그 자체로 정치적 장이다. 만약 이론이 정치적 실천과 무관한 영역이라면 이론에 대한 검열이 존재했을 턱이 없다. 다른 예를 통해 보자면, 아직도 일부 우둔한 사람들은 예술과 현실이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을 한 번도 진지하게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책, 문학, 회화, 음악, 조각, 건축, 연극, 영화, 디자인 등을 빼고 우리 삶의 자리를 바라보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쉽게, 솔직하게 생각하자. 잠은 어디서 자고 밥은 어디서 먹을래? 이론의 경우도 예술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생각의 싸움이며 가치관의 싸움이다. 의미와 가치를 떠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움은 자기가 속한 구체적 영역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 바깥을 핑계로, 바깥에 ‘있는’ (다만 상상적으로만 있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핑계로, 자기 자리를 방기하지 말자. 내가 몸 담고 있는 인문학의 자리에서 보자면, 나쁜 글과 말도 안 되는 번역의 범람이 가장 위험한 사태이다. 인문학이란 자기의 삶을 언어로 써내는 작업이다. 인문학도에게 삶과 언어 바깥에 더 중요한 것이란 없다. 따라서 삶과 언어에 성실하다면 불성실한 글과 번역이 나올 수 없다. 이 경우 결과는 원인을 정확히 함축한다. 그런데 요즈음 글과 번역의 불성실함이 많이 눈에 띈다. 기만과 불신도 만연해 있다. 파시스트의 방식으로 혁명을 말할 수 있을까? 독재자의 방식으로 민주를 말할 수 있을까? 내용만 좋으면 문체와 번역은 좀 나빠도 된다는 안이한 태도가 인문학적 글쓰기의 위기를 초래하고 또 결국엔 인문적 삶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다.

[이 글은 1997년 「대학신문」의 ‘대학원에서’라는 코너에 썼던 에세이를 살짝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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