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 006

과정의 둘째입니다. 원서 10쪽의 새로 시작하는 문단입니다. “둘째로, 더군다나 ‘인간’과 ‘자연’의 구분은 없다.” 이 부분은 맑스의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아래에서는 《초고》)를 굉장히 깊게 참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주4에 나오는 제라르 그라넬(Gérard Granel)이라는 학자의 글을 굉장히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L’Ontologie marxiste de 1844 et la question de la coupure,” in l’Endurance de la pensée, Paris: Plon, 1969). 이 논문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연구가 별로 없는 데, 내가 연구해서 박사학위논문에 수록했습니다. 한 절도 아니고 두세 절을 할애를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꼭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들뢰즈·과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맑스의 존재론을 참고한다는 점입니다. 존재론이라고 하면 주로 청년 맑스라고 부르는 1845~6년 전의 맑스를 지칭합니다. 정치경제학 비판자로서의 경제학자 맑스는 그 후, 대략 런던으로 도망간 후 시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 1장에서 존재론을 건축하는 맑스와 3장에서 자본주의 분석을 하는 맑스, 이 두 맑스는 사실상 서로 맑스가 아닌 통일된 맑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측면은 맑스 연구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면 초기와 후기를 가르려고 하는 게, 이유를 불문하고 루카치 계열이건 알튀세르 계열이건 아니면 소외론 중심의 프랑크프르트학파 계열이건 다 나누려고 했던 게, 일반적인 접근이었거든요. 그런데 들뢰즈는 그 둘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후기 맑스의 사회 분석 및 경제학 탐구가 맑스 초기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거죠. 제 가설에 따르면, 존재론은 추상적이면 안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존재를 바탕으로 해야되는 데, 맑스가 살았던 그 시기는 자본주의 사회고, 존재론 탐구의 구체적인 데이터는 당대 사회에서 수집했으며, 그것을 연구 발전시킨 게 《자본》이라고 정리됩니다. 초기 비판은 당연히 헤겔의 관념론적인 사회 이론, 즉 법, 국각, 종교, 정치, 문화 현상에 대해 헤겔이 갖고 있던 관념론적인 구성을 타파하기 위해서 일단은 헤겔을 철학적으로 비판했고요. 그 다음에 그 비판에 실증성을 부여하는 과정은 당대 사회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아무튼요, 이 문단에서는 맑스를 아주 많이 참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어서 봅니다. “더군다나 ‘인간’과 ‘자연’의 구별은 없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말하자면 인간의 유적 삶 안에서 일치하듯, 생산 내지 산업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일치한다. 산업은 이제 효용이라는 외면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고, 자연과의 근본적 동일성 속에서 파악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인간의 생산 및 인간에 의한 생산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 이렇게 읽으면 암호죠.

《독일 이데올로기》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비판에서 논의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논리적 분석이 아닙니다. 물리적 분석 또는 물질적 분석이 중요합니다. 무릇 인간이 살고 있는 상황, 시점, 그 자체를 들여다보자는 거죠. 그럴 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순수한 자연과 마주 대한 적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인간이 노동을 가해서 만들어진 결과물과 이미 뒤섞여 있는 자연이고, 항상 인간은 이 자연과 마주하고 있다는 거죠. 맑스가 드는 사례 중의 하나는, 포이어바흐도 그런 사례를 들고 있는데, 벚나무는 몇 백년 전까지는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과실수가 상업에 의해 이전되어 유럽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식물들을 이전하고 동물들도 데리고 가죠.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동식물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때의 환경이라는 것은 ‘순수 자연(pure nature)’이 아니라 ‘인공 자연(artificial nature)’이고, 인간은 항상 산업이 개입한 결과물로서 ‘인간 산업과 자연의 복합체’와 만나는 것이지, 그냥 만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연을 인간적 자연으로 생성하고, 자연은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있습니다.

방금 전 구절의 표현을 풀면, ‘자연은 인간을 생산하고 인간은 자연을 생산하는 그런, 어려운 말로하면 착종된 순환적 관계 속에 항상 있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건 진화론적인 수준에서 인간을 발생론적으로 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아주 초기에 인류가 형성되는 시기에 인간 집단이 일정하게 집합적인 행동을 하면서 도구를 개발하고 의사수통 수단을 찾아내고 한 그 자체가 인공적인 것이거든요. 그리고 인간은 자기 안식처, 들뢰즈·과타리 용어로는 영토라고 하는데, 자기 영토를 만들면서만 인간은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왜냐하면 영토 바깥은 황무지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영토 안에서만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발생론적으로 접근을 한다면 애초부터 만들어진 자연, 인공적 자연 안에 거주했고,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순수한 자연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게 그런 겁니다.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한 이래로 자연과 인간이 동일하다는 얘기의 출발점에는, 이런 것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자연이 당연히 먼저 있죠. 인간은 발생적으로 뒤늦게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지금을 출발점으로 삼자는 거예요. 그게 21세기 초반의 인류건 아니면 인류가 처음 지구에 등장했던 시점이건 간에, 어쨌든 그 이후의 인간은 자연과 다른 존재가 아니에요. 이때 ‘동일성(identité, identity)’이라는 말이 강한 주장이긴 해요. 이 점은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말처럼, 인간의 신앙적인 혹은 종교적인 특권을 파괴하려는 게 이 대목의 진술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이어지는 문장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온갖 형태 또는 온갖 종류의 깊은 삶과 접촉해 있으며, 별들 및 동물들도 짊어지고 있고, 기관-기계를 에너지-기계로, 나무를 자기 몸으로, 젖가슴을 입으로, 태양을 엉덩이로 끊임없이 가지 뻗는 자, 즉 우주의 기계들의 영원한 담당자이다. 이것이 과정의 둘째 의미이다. 인과나 이해나 표현 등의 관계(원인-결과, 주관-객체 등)에서 파악되는 때조차도,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항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산자 및 생산물의 하나의 동일한 본질적 현실이다.” 마지막 구절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une seule et même réalité essentielle du producteur et du produit.” 영어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y are one and the same essential reality, the producer-product.”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one and the same essential reality of producer and of product.” 생산자와 생산물이 본질적으로 하나인 현실을 가리킵니다. 이때 생산자는 누구일까요? 인간만이 생산자도 아니고, 자연만이 생산자도 아닙니다. 또한 생산물은 무엇일까요? 인간만이 생산물도 아니고, 자연만이 생산물이 아닙니다. 그 둘은 결국 하나로 섞여 있습니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초점은 거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우리가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분리 불가능하다. 논리적인 분리는 단지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요. “과정으로서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들을 넘어서 있으며, […]” 방금 전에 말씀드린 논리적인 분리입니다. “[…]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과 관계된 하나의 순환을 형성한다.” 순환(cycle)이라는 말에서 ‘자연과 인간의 순환’을 그려볼 수 있고요.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 데, 간과하기 쉽지만,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이 그것입니다. 우주 생산의 경과를 가동시키는 원리는 내재적이고 그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망에 대한 규정이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처음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욕망은 생산의 내재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생산의 내재적 원리’라고 하면 사실은 동어반복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욕망한다는 말과 생산한다는 말은 같은 뜻이니까요.

그 다음에 계속 보겠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욕망적 생산은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실효적 범주인데,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분열자를 호모 나투라(Homo natura)로 설정하며 다룬다.” ‘호모 나투라’라는 말이 인간(homo)과 자연(natura)의 동일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호모가 인간이고 나투라가 자연이죠. 이 둘을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하잖아요? 앞에 대문자로 쓴 Homo는 분류학상 ‘속(屬)’이고 소문자로 쓴 sapiens는 ‘종차(種差)’로서 다른 Homo 속(가령 호모 플로레시엔스, 호모 네안데르탈레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날레디 등)과 현생 인류를 구별해주는 특징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책 《사피엔스》는 ‘인간’을 가리키는 잘못되고 조악한 명칭인 거죠. 아무튼, 위의 문장에서 들뢰즈·과타리는 인간의 종차로 ‘자연’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인’은 앞서 말했던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붙으며, 이 조건이 과정의 셋째 의미를 구성합니다. 셋째 의미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쉽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동일성 또는 본질적 현실과 관련해서 얘기됩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하나의 순환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질적 동일성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즉 ‘a는 a다’라는 의미의 동일성이 아니에요. 한 몸을 이루고, 하나의 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일성이에요. 이 순환을 야기하는 것,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원(圓)이거든요. [[그림 삽입]] 빨간 글씨로 표현한,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게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입니다. 이 순환을 가동시키는 내재적 원리. 왜 내재적이냐면, 외부의 원인이 아니라 우주 안에 있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달리 표현하면 ‘세계, 물질 등’입니다. 그걸 움직이는 원리가 초월적이지 않습니다. 초월적 원인이라고 하면, 예를 들면, 신이 가동시키는 거죠. 보통 이게 ‘최초의 원인(first mover, prime mover)’이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다른 것에 의해 작용을 받은 것이 아니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보통 창조주로서의 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 여기에 대응됩니다. 그런데 들뢰즈·과타리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세계 내적인 거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욕망이라는 말의 의미가 처음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두 번째 의미의 과정하고 관련된 얘기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것들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셋째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즉 과정은 목표나 끝으로 파악되면 안 되며, […]” 이건 목적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연히 그리고 과정과 목표/끝(fin, end)은 양립하기 어렵죠. 문장 후반부가 조금 어려운데요. “[…]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과 혼동돼서도 안 된다.”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은 사실 바로 뒤에 나오지만 ‘무의미한 공전’이나 다름없습니다. “과정의 끝 또는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 양자는 엄밀히 말해 과정의 난폭하고 미숙한 정지와 같은 것인데 — 병원에서 보게 되는 것 같은 인공적 분열자, 즉 임상 존재로서 생산된 자폐증 환자가 생겨나는 원인이다.” 들뢰즈·과타리는 참 예를 잘 드는 데요, 로런스가 사랑에 관해 말한 대목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과정을 목표로 밀어붙였다.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과정의 영속화가 아니라 그 과정의 완성이다. (……) 과정은 완성으로 치달아야 하며, 영혼과 육체가 궁극적으로 사멸해 버릴 어떤 끔찍한 강화와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된다.>” 사랑은 과정의 완성이라는 거예요. 영속화란 불가능한 목표죠. 영속성을 추구하면 죽음으로 치닫게 된다는 거예요. 분열증도 사랑과 마찬가지다. 분열증적 특유성도 분열증적 임상실체도 없다. 이어서 이렇게 문단을 마무리합니다. “분열증도 사랑과 마찬가지이다. 분열증적 특유성도 분열증적 임상 존재도 없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1차적인 보편적[우주적] 생산이다.” 과정을 완성한다는 말은 그때그때 최고점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최고점이라는 말이 좀 뭐하지만, 그냥 타성화되고 습관화된 사랑, 과정, 이런 게 아니라 그때그때 완성되는 사랑과 마찬가지인 그런 과정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그때 완성되었다는 말이 생산의 세 종합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고요. 분열증은 이런 세 가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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