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법의 거리 좁히기 :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서평

‘정의’와 ‘법’이 충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정의’란 ‘올바름이 이루어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 여기서 ‘올바름’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요? 그 문제는 잠깐 보류하고, 일단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올바른 상태’를 전제하겠습니다. 자, 이번엔 ‘법’을 보지요.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따라야 할 규칙’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상당히 넓고 느슨한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네요. 물론 이 규칙은 ‘강제력’을 수반합니다. 말로만 ‘규칙’이라고 한다면, 효력이 없겠지요.

자, 이제 ‘정의’와 ‘법’이 충돌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원칙적으로 ‘법’은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의 실현에 봉사해야 합니다. ‘정의’는 목적이고, ‘법’은 수단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법(=규칙)’이 ‘정의(=올바른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하리라는 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어떤 ‘법’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자연법주의’와 ‘법실증주의’의 입장이 나뉩니다.

자연법주의는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도 정당하다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해당 목적이 정당한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해당 목적은 우리의 오랜 편견일 수 있고, 언제든 정당하지 않다고 까발려질 수 있습니다. 법실증주의는 정당한 수단을 통해 도달되는 결과는 정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수단이 목적을 보증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해당 수단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정의를 획득할 수 있도록 규칙들을 잘 설계하고 구성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 설계는 여러 가지 시도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결과가 정당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규칙을 믿고 따라야 할까요?

그 누구도 ‘법’을 완벽하다고 보지 않고 있으며, 그 누구도 똑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기본 구도를 잡기에는 이와 같은 구분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과 똑같은 성격을 지닌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인간이 사회를 이룬 모든 시간과 장소에 걸쳐 늘 있었던 논쟁입니다. 이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논쟁의 역사는 곧 역사의 논쟁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정의와 법의 거리 좁히기’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논쟁은 끝나지 않을 거고, 당분간 잠잠해지더라도 앞으로 다시 반복될 겁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2004년(꽤 오래 되었네요)에 발표한 서평입니다. 제가 ‘자크 데리다’라는 철학자를 따른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데리다 전에, 또는 데리다 없이도, 이미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 논의를 알아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보았고, 데리다의 사상 중에서 뭔가 얻어 배울 만한 생각을 담고 있는 책이 《법의 힘》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소개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정의’와 ‘법’의 충돌이라는 주제는, 아래 서평의 전반부까지만 관련됩니다. 후반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관련된 논의입니다.

(2018.03. 최종 수정. 여기에서 맥락상 불필요한 대목을 삭제했음.)


정의와 법의 거리 좁히기 : 자크 데리다, 《법의 힘》(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원서 Force de Loi, 1994) 서평

번역된 책을 읽는 일은, 더욱이 번역서의 서평은 쓰는 일은 많은 경우 위험하고 고통스럽다. 철학서의 경우는 특히 더한데, 왜냐하면 철학 자체가 엄밀한 개념과 고도의 사고를 요하기에, 자칫 역자가 저자의 그것들을 놓칠 경우 독자는 허구적 저자(역자가 뇌피셜로 지어낸 저자)의 상상적 담론과 접하게 되기 십상인 것이다. 프랑스 철학의 경우에는 그 위험이 더하다. 프랑스 학문의 실상이 소개된 역사도 짧거니와 그 특유의 수학과 과학, 문학과 철학을 한데 어우른 교육과정 자체가 문과와 이과를 엄밀히 구획하는 우리에겐 낯설고도 난해한 까닭이다.

이번에 번역 소개된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은 이런 모든 번역상의 의혹을 일거에 말소시킨 책이다. 역자 진태원은 《법의 힘》에서 다루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법의 힘》의 핵심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독립 선언들’을 함께 옮겨 소개함으로써 책의 체제를 완결시켰다. 또한 상당히 긴 용어 해설과 역주를 통해 데리다의 철학을 둘러싼 그간의 숱한 오해를 풀어주고 있으며 나아가 난해한 데리다의 철학을 가급적 쉽게 안내하고 있다. 꼼꼼한 번역이 그 중심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교과서적으로 말해, 법의 이념은 정의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법과 정의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의가 목적들의 척도라면, 적법성은 수단들의 척도다. (…)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주의는 목적들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들을 ‘정당화’하려 하고, 법실증주의는 수단들의 정당화를 통해 목적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려 한다. 공통적인 독단적 전제가 거짓이라면, 한편의 정당화된 수단들과 다른 편의 정당한 목적들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면, 이율배반은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p. 141) 요컨대 벤야민은, 데리다가 그의 논의가 혼돈스럽다고 지적하고는 있지만, 법과 정의가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법의 힘’은 원어로 force de loi이다. 여기서 불어 force의 원어가 독일어 Gewalt임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상당히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힘뿐만 아니라 폭력, 권력, 권위 등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법의 힘’이란 ‘법이 수행하는 폭력’이라는 뜻과 ‘법이 지니는 권위’라는 뜻으로 세분되며, 데리다는 이 두 의미와 이들 간의 관계를 해체적으로 읽어내려 한다(p. 15~17). 그러나 여기서 전자[=폭력]가 부정적인 뜻을, 후자[=권위]가 긍정적인 뜻을 지닐 것이라는 첫인상은, 놀랍게도, 빨리 걷어버리는 것이 좋다.

벤야민에 따르면 “우선 두 가지 법적 폭력, 법과 관련된 두 가지 폭력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는데, 법을 설립하고 정립하는 정초적 폭력(die rechtsetzende Gewalt, 법정립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 곧 법의 영속성과 적용 가능성을 유지하고 확증하고 보장하는 폭력(die rechtserhaltende Gewalt, 법보존적 폭력)의 구분이 그것이다.”(p. 75) 벤야민의 구분에는 전자의 혁명적 성격과 후자의 보수적 성격이 함축되어 있다. 벤야민이 국가를 폐지하게 되는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전자의 예로 드는 것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p. 87).

그러나 데리다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는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절될 수 없다는 해석을 제안”(p. 88)한다. 정초적 폭력은 자기 자신의 반복을 요구하며, 정초적 폭력은 보존되어야 하고 보존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정초한다는 점은 정초적 폭력의 구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립과 보존 사이에는 아무런 엄격한 대립도 존재하지 않으며” “양자의 차이[差移]적 오염이라 부르려 하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p. 90).

이제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정의와 법정립적 폭력 사이의 관계이다. 데리다는 정의에 대한 레비나스의 규정, 곧 “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p. 48)를 수용한다. 여기서 타인은 ‘타자’이며 ‘아마도’이고 ‘장래(avenir)’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법과 계산을 초과하고, 규정 가능한 것을 범람하여 도래할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p. 59)이다. 정의는 우리를 인도하며 그때마다 법을 정립하나, 우리와 우리의 법은 정의에 완성태로 도달할 수는 없다. 그 간극을 좁히려는 운동이 역사이다. “인간과 그의 현존, 그의 생명의 가치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정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정의의 장래, 정의-로움의 장래, 정의로워야 함의 장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 117)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전개하는 독특한 논법은 부록으로 실린 ‘독립 선언들’에서 이미 개진된 바 있다. 독립 선언은 독특한 행위이다. 누가 그 선언에 권리를 부여하는가? 아직 독립되어 있지 않은 존재라면 권리가 없을 것이고 이미 독립되어 있는 존재라면 선언 자체가 필요치 않다. 이 ‘아직’과 ‘이미’ 사이에 개입하는 것이 선언의 수행적(performative), 정립적 성격이다. “힘의 행사는 권리를 만들고, 권리를 정초하고, 권리를 선사하고, 법을 낳는다.”(p. 177) 독립 선언은 앞으로 독립이 성취될 그 때를 기점으로 하여 권리를 부여받고 그 권리에 의거해 선언을 행함으로써 결국 독립을 성취한다.

짧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 책을 그나마 읽히도록 만든 힘은 전적으로 역자에게 있다. 평자는 평소 데리다의 정교한 해체적 독서가 좀 장황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거시적 의미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더 그런 혐의가 짙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현대 철학에서 데리다의 위치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은, 그의 해체가 갖는 폭로적 성격이다. 정의의 추구가 불의로 바뀌고, 진리의 추구가 허위로 귀결되는 전도(顚倒)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데리다는 평생 이 문제를 천착하여 왔다.

역자도 강조하듯이 특히 《법의 힘》은 해체와 실천 철학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어렵고 장구한 해체의 작업을 데리다 이후에 누가 얼마나 이어 나갈 수 있을까? 데리다의 철학이 실천적으로 발현하기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 출전 : 계간 《문학과사회》 67호,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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