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느낌의 차이 (움베르토 마투라나를 읽기 위한 자세)

보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관찰하는 것은 관찰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진술이다. 관찰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느낌이다. 또한 느낌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포함한다. 따라서 느낌은 바깥에서 시작할지라도 안에서 완성된다. 종의 진화 과정에서, 또 개인 체험의 역사 속에서, 느낌은 바깥과 안의 ‘짝짓기(coupling)’의 결과다.

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얼마간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 위협이 될 만큼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해석되는 것일수록, 또한 몸에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객관적 태도는 위축된다. 달려드는 맹견이나 자동차에 대한 객관적 관찰은 어렵다. 팔에 피가 철철 흐를 때 관찰과 느낌은 서로 교차한다. 많은 이가 방금 진술한 두 상황에 대해 동의한다면, 느낌의 ‘주관성’은 그저 주관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느낌은 공유되며, 그런 식의 ‘공통 느낌’은 부인할 수 없는 사회 현상이다. 사실 인류 대부분이 공산품을 소비한다는 행위 자체가 공통 느낌의 증거이기도 하다. 비슷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공산품, 가령 옷, 침구, 세면도구, 위생용품, 가전, 자동차, 가구, 집, 약품 등을 이용할 때 나와 너는 공통의 우리로 수렴한다.

느끼는 자를 관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출발에서는 바깥의 다른 대상에 대한 관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느끼는 자가 자신처럼 느끼는 자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후에도 여전히 같게 관찰할 수 있을까? 노력을 통해 그렇게 할 수도, 혹은 그렇게 해야만 할 수도 있다(가령 외과의사). 그러나 대개의 상황에서는 느끼는 자를 관찰하는 일은 가만히 있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과는 다르다. 관찰도 아니고 자신을 느끼는 것도 아닌, 뭔가 제3의 태도를 요구받게 된다.

적게 느끼는 자나 다르게 느끼는 자를 만날 때는 어떨까? 가령 고양이는 적거나 다르게 느낀다. 적다는 말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의식 수준이 낮거나 생각이 많지 않다는 지점이다. 의식과 생각은 인간한테 놀랍게 발달한 능력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할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적어도 ‘종차이주의자’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스피노자윅스퀼을 계승한다는 점은 분명히 했으면 한다. 적거나 다르게 느끼는 대상을 관찰할 때는 이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의인화하면 대상을 망가뜨린다. 관찰하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최선의 접근은 윅스퀼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참고: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에서 윅스퀼의 위상).

길게 얘기한 건, 움베르토 마투라나를 읽을 때 관찰과 느낌을 구별하면 좋겠다 싶어서다. 근래 번역된 《자기생성과 인지》(1979)는 먼저 번역된 《앎의 나무》(1984/1992)나 《있음에서 함으로》(2004)보다 먼저 나온 책임을, 그래서 후자보다 덜 선명한 점이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좋겠다.

덧. 마투라나에 대한 나의 설명은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의 142~145쪽, 354쪽 이하를 참고할 수 있다. 윅스퀼에 대한 설명도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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