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 교수가 번역한 들뢰즈의 《대담》(원제는 《협상들》)의 한 구절에 대한 비평

다음 문장을 읽고 무슨 뜻인지 설명하시오(20점).

“영화, 그것은 우선 운동-이미지입니다. 이미지와 운동 사이에 ‘관계’조차도 없어요. 영화는 이미지의 자동-운동을 창조합니다. 그러고 나서 영화가 ‘칸트적인’ 혁명을 이루면, 다시 말해서, 영화가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지 않게 되면, 그리고 운동으로 시간의 독립을 만들어 낸다면(거짓 운동을 시간의 관계들로 제시하는 것), 영화적 이미지는 시간-이미지가, 이미지의 자동-시간화가 됩니다.”(126쪽)


들뢰즈가 〈상상계(l’imaginaire)에 대한 의심들〉(1986)에서 말한 내용이다. 위 번역은 신지영 교수가 번역한 들뢰즈의 책의 한 구절이다. (번역서에 대한 첫 인상과 촌평은 글 맨 뒤에 있음.)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구절에는 6개의 오류가 있다. 이를 찬찬히 살펴보겠다.

우선 원문과 영어본의 구절을 각각 제시하겠다.

“Le cinéma, c’est d’abord l’image-mouvement : il n’y a même pas un «rapport » entre l’image et le mouvement, le cinéma crée l’auto-mouvement de l’image. Puis, quand le cinéma fait sa révolution «kantienne », c’est-à-dire quans il cesse de subordonner le temps au mouvement, quand il fait du mouvement une dépendance du temps (le faux mouvement comme présentation des rapports de temps), alors l’image cinématographique devient une image-temps, une auto-temporalisation de l’image.”(PP 92)

“Cinema begins with the movement-image — not with any “relation between image and movement even: cinema creates a self-moving image. Then, when cinema goes through its “Kantian” revolution, that’s to say when it stops subordinating time to motion, when it makes motion depend on time (with false moves manifesting temporal relations), the cinematic image becomes a time-image, an autotemporalization of the image.”(65)

한 문장씩 검토해 보자. 존대법은 고려사항이 아니며, 비교가 되는 부분의 강조는 내가 했다.

우선 첫 문장. “영화, 그것은 우선 운동-이미지입니다.” vs. “영화, 그건 무엇보다 운동-이미지이다.” 이건 큰 오류라고 보긴 어렵다. 글을 읽는 감각의 문제다.

둘째 문장. “이미지와 운동 사이에 ‘관계’조차도 없어요.” vs. “이미지와 운동 사이에는 ‘관계’라 할 만한 것조차 없다.” 들뢰즈는 ‘이미지’와 ‘운동’이 같은 것이기에 둘 사이에 관계라 할 만한 것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따옴표를 붙여 “관계”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그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셋째 문장. “영화는 이미지의 자동-운동을 창조합니다.” vs. “영화는 이미지의 자기-운동을 창조한다.” auto의 전형적 오역이다. auto는 그리스어 αὐτο(아우토)를 로마 알파벳으로 적은 것으로, ‘자기'(self)라는 뜻이다. 라틴어의 ego, 영어의 I다. 그래서 l’auto-mouvement은 ‘자기-운동’이고, (다음 문장의) une auto-temporalisation은 ‘자기-시간화’다. 문맥상, 스스로 운동하고, 스스로 시간화한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스스로 운동하는 이미지를 영화가 창조한다는 뜻이다.

넷째 문장. 첫 부분. “그러고 나서 영화가 ‘칸트적인’ 혁명을 이루면,” vs. “다음으로, 영화가 ‘칸트적’ 혁명을 해낼 ,” 이 부분은 ‘칸트적 혁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이해된다. 다음 부분에 첫째 부연 설명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지 않게 되면,” vs. “다시 말해, 영화가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기를 멈출 때, ” 이어서 둘째 부연 설명. “그리고 운동으로 시간의 독립을 만들어 낸다면” vs. “그리고 운동을 시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들 때“. 둘째 부연 설명에 대한 설명이 괄호 안에 나온다. “거짓 운동을 시간의 관계들로 제시하는 것” vs. “시간의 관계들의 제시로서 가짜 운동“. 사실 여기까지 언급된 ‘칸트적 혁명’의 의미는 내가 논문으로 정리한 바 있다(참고: 들뢰즈의 칸트 해석에서 시간이라는 문제) 요약하면, 시간이 운동에서 독립해서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칸트적 혁명이다.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전후(戰後) 운동-이미지가 위기 혹은 파탄에 빠지고 시간-이미지가 본질적인 것으로 등장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지각-행동’의 회로에 갇힌 운동 혹은 ‘감각-운동 도식’ 속 운동이 아닌 시간을 드러내는 ‘가짜 운동’이라는 말의 뜻이다. 셋째 부분. “영화적 이미지는 시간-이미지가, 이미지의 자동-시간화가 됩니다.” vs. ” 영화 이미지는 시간-이미지, 이미지의 자기-시간화가 된다.” 방금 설명했듯, 영화는 이제 스스로 시간화하는 이미지가 된다.

아래는 딥엘로 번역하고, ‘움직임’을 ‘운동’으로 바꾼 것이다. 평가는 독자가 알아서 할지어다.

“우선, 영화는 이미지-운동이다: 이미지와 운동 사이에는 ‘관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미지의 자기 운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화가 ‘칸트적’ 혁명을 일으킬 때, 즉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지 않을 때, 운동을 시간의 종속으로 만들 때(시간 관계의 표현으로서의 거짓 운동), 영화적 이미지는 이미지-시간, 이미지의 자기 시간화가 된다.”

 


들뢰즈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30년 전, 들뢰즈의 책 중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단행본으로, 이번엔 신지영 교수가 재번역했다. 가독성 면에서 전의 번역보다 훨씬 낫지만, 몇 가지 불만이 있다.

1. 우선 책 제목

역자는 《대담》으로 옮겼다. 원제는 Pourparlers. ‘협상, 협의’라는 뜻이다.
《라루스(Larousse) 사전》에는 Entretiens préalables à la conclusion d’une entente, d’un traité ou en vue de régler une affaire : Entrer en pourparlers라고 되어 있다. 직역하면, 합의나 조약에 앞선, 혹은 사건 해결을 위한 논의 : 협상에 돌입하다.
들뢰즈가 (한국어 역자가 번역에서 빠뜨린) 프랑스어 원서 7쪽에서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힌다. “전쟁의 일부인지 아니면 벌써 평화의 일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협상(pourparlers)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때도 있다. 실로 철학은 시대에 대한 분노와도 시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평정과도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번역을 빠뜨리면서도 ‘옮긴이 서문’에서 “인터뷰들의 모음집인 이 책이 ‘협상’의 뉘앙스를 갖는다고 보기는 무척 어렵다”고 밝힌다(번역 12쪽).

2. ‘과타리’를 ‘가타리’로 표기

들뢰즈와 ‘자본주의와 분열증’ 두 권을 함께 쓴 F. Guattari는 연구자 사이에서 ‘과타리’라는 표기로 정착되고 있다. 이는 과타리와 교류했던 지인들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과테말라’라고 할 때의 그 ‘과’ 말이다.

3. 사소하지만은 않은 오역 (아래는 한국어 판 쪽수)

– 35쪽: ‘무의식-기계, 분열증적 무의식’은 ‘기계-무의식, 분열증적 무의식’이 되어야 함
– 39쪽: ‘이 장치들(초자아, 자아, 그것)의 인격화’는 ‘이 장치들(초자아, 자아, 이드)의 인물화’가 되어야 함. ‘그것’은 프로이트가 만든 조어 das ES의 프랑스어 번역인 le Ça의 번역으로 맞지 않음. 역자는 ça로 읽은 듯. 또한 personnification 혹은 personne은 ‘인격’과 상관 없는 말. 아빠, 엄마, 나 같은 인물을 가리킴.
– 41쪽: ‘우중충하고 작은’은 ‘더럽고 작은’이 맞음. 이 구절은 dirty little secret이라는 D. H. 로런스의 구절을 들뢰즈와 과타리가 인용한 것임.
– 45쪽: ‘능동적이고 실증적인 도주선들’은 ‘능동적이고 정립적인 도주선들’이 되어야 함. posotive라는 형용사는 poser(정립하다)에서 유래. ‘실증’과는 아무 상관 없음.
– 59쪽: ‘[인터넷] 망’에서 ‘인터넷’이라는 삽입구는 일단 시대착오적. 1980년 당시에는 대중에겐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음. 미니텔마저 1982년에 서비스 시작. 들뢰즈가 언급하는 맥락상 ‘인적 네트워크’ 정도로 이해됨.
– 61쪽: ‘내면적 언어의 화용론’의 원문은 une pragmatique d’un langage intimiste임. intimiste는 intime(내면의, 내밀한)의 최상급 표현이며, 여성형 명사인 pragmatique을 수식함. 따라서 ‘언어(활동)의 가장 내밀한 화용론/화행론’ 정도가 되어야 적절. 번역어 선택은 별개의 문제로 삼더라도.
– 64-65쪽: ‘어떤 유형의 공간, 아주 특별한 인간과 기술적이고 정서적인 요소들(무기와 장신구)의 구성’은 ‘공간의 특정한 유형, 아주 특별한 인간들과 기술적이고 기운적인 요소들(무기와 장신구…)의 합성/조성’이 되어야.
– 65쪽: ‘사행(事行)’으로 옮긴 ‘processus’는 ‘과정’임. 굳이 ‘사행’에 대응하는 용어는 ‘procès’로 ‘소송'(카프카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기도 함)이라는 뜻도 있음. 용어 이해를 뒤집어서 했음.
– 70쪽: ‘도주선으로 구성되는 선적인 배치’라? 우선 원문은 un agencement linéaire qui se construit sur des lignes de fuite임. 따라서 ‘도주선들 위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선형 배치체’라고 해야 함. ‘배치체’라는 번역어 선택 문제는 차치하고, sur를 어떻게 이렇게 옮겼는지…?
– 71쪽: ‘도주선이 필연적으로 창조적이라거나, 매끈한 공간은 분절된 공간이나 홈패인 공간보다 낫다거나, 비릴리오가 보여준 것처럼 핵잠수함이 전쟁과 공포를 위하여 매끈한 공간을 재구성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어이없는 오역. 원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음. ‘도주선이 필연적으로 창조적이라거나, 매끈한 공간은 분절된 공간이나 홈패인 공간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비릴리오가 보여준 것처럼, 핵잠수함은 전쟁과 공포를 위하여 매끈한 공간을 재구성합니다.’
– 72쪽: ‘글쓰기 그 자체가 내재성의 느낌,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리라거나 우리의 등 뒤에서 이미 일어났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면 그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문장에서 ‘내재성’은 immenence(임박)을 immanence로 잘못 읽고 한 번역. 이런 문장에서 ‘내재성’이 갑자기 나올 리가 없지.
이상은 1부의 두 번째, 세 번째, 즉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1권(《안티 오이디푸스》)과 2권(《천 개의 고원》)이 출간된 직후에 가진 인터뷰만 훑었을 때 발견된 문제임.

4.

책 말미의 ‘control’을 ‘통제’라고 옮긴 점도 불만. 물론 이런 뜻이 있긴 하지만, 이 개념은 푸코의 뉘앙스가 풍기는 개념(그건 ‘훈육’ 또는 ‘규율’)과 구별해야 하며 ‘통제’라고 옮기면 뜻의 절반이 사라짐. 사이버네틱스에서 나오는 ‘제어’ 정도가 무난. ‘통제’는 강제적이고 타율적이지만 ‘제어’는 자율과 타율이 교차.

5.

번역이 노고임은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항이고, 노고에는 감사하되, 30년 만에 다시 번역된 책이 더 정확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음. 국내 들뢰즈 학계의 층이 얇아도 너무 얇은 탓이 아닐는지… 나? 그래도 꽤 정확한 번역으로 《안티 오이디푸스》와 《베르그손주의》를 번역 소개했고, 22년 전에 번역한 《천 개의 고원》은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는 운명이라. 쩝.

(2023년 12월 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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