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용어 설명] 인물(person) [‘인칭’이 아님]

정신분석 이후의 현대철학에서 person(프: personne, 독: Person)과 그에 대응하는 말들(personal, personality etc.)은 ‘인물’로 옮겨야 한다. ‘인칭’이 아니다. person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했고, 현대어에도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고대 (로마) 극에서 배우가 머리 전체에 뒤집어 썼던, 나무나 진흙으로 된 가면을 가리킨다. 물론 유래는 그리스 극으로 거슬러간다(얼굴이라는 뜻의 ‘프로소폰(prosopon).

[그림은 2세기 로마 모자이크에 새겨진 페르소나.]

당연히 페르소나는 다양한 뜻으로 분화했다. 사람, 역할, 인격, (법률상의) 인, (문법의) 인칭, (신학의) 위격 등이 그것이다. 문맥과 용법에 맞게 옮길 수 있겠다.

다만, 철학과 문화이론의 맥락에서 저 표현은 대체로 ‘인물’을 가리킨다. 흔히 번역되는 ‘인칭’은 잘못이다. 인칭이란 문법에서 화자를 가리키는 1인칭, 청자를 가리키는 2인칭, 화자와 청자 바깥의 누군가를 가리키는 3인칭, 이렇게 셋이 있다. 요컨대 ‘인칭’은 굉장히 용법이 제한되어 있는 용어다.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라캉 등 정신분석가들과 들뢰즈, 과타리, 그리고 푸코, 데리다 등의 학자들에게 person은 ‘인물’이다(이들에게 빚진 많은 철학자와 이론가에게도 마찬가지). 왜 인물인가? 그건 분명한 맥락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참고 논문: 들뢰즈의 ‘부분대상(objet partiel)’ 이론. 그 존재론적 미학적 의의의 탐색), 간략히 정리해 보자.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가 소홀히 다룬) 아동에 주목했다. 초창기의 삶에서 아기는 엄마를 전체로서 파악하지 못한다. 아이는 단지 자신에게 편안할 때 즐거움을 주는 젖꼭지 혹은 복통을 느낄 때의 무서운 젖꼭지를 향하는 ‘부분적 충동’을 표출한다. 아이의 충동은 부분적이며, 바로 그 부분 충동이 향하는 충족의 대상이 부분대상이다. 대상을 부분대상으로 환상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유아의 삶에 필수적이다. 즐거움을 주는 젖꼭지와 무서운 젖꼭지를 분열하지 않으면, 아이는 사랑과 잔인함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모든 환상의 대상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다. 유아의 관심이 한 사람의 전체(the whole)보다 한 부분(a part)에 국한된다는 점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이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히 미발달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 유아는 오직 자신의 즉각적인 만족 또는 만족의 결핍에만 관심을 둔다.”(M, Klein, “Weaning”, 1936).

그리고 유아는 생후 3개월이 지나면 인물을 현실적인 온전한 대상(a whole object)으로 지각할 정도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는 부분대상들의 통합이 일어난다. 비록 불가피한 ‘우울증’의 측면을 감당해야 하지만. 왜냐하면 즐거움을 주는 젖꼭지와 무서운 젖꼭지가 같은 젖꼭지라고 받아들여야만 하게 되었으니까.

《정신분석사전》(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1967, 임진수 역, 열린책들, 2005)을 쓴 장 라플랑슈와 장베르트랑 폰탈리스는 ‘대상’ 및 ‘부분대상’ 항목에서 관련된 설명을 한다. 한 대목만 인용한다: “부분대상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은 클라인 학파의 정신분석가들이다. 그들은 대상관계에 관한 정신분석 이론에서 그것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 그러나 충동의 대상이 반드시 한 사람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은 이미 프로이트에게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아마 프로이트가 대상 선택이나 대상애라고 말할 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한 사람 전체지만, 그가 부분 충동이 겨냥하는 대상을 연구할 때, 문제가 된늑 서은 바로 부분대상(젖가슴, 젖, 똥 등)이다.”(한글본 168쪽)

아이가 나중에 구별하게 되는 아빠, 엄마, 나 같은 것이 바로 person이다. 즉 온전한 대상으로 지각되는 전체로서의 인물이다. 즉, person은 부분대상과 대립하는 용어다. 특히, 들뢰즈·과타리는 person을 온전한 대상으로서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는 들뢰즈·과타리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앞의 인용에서 보았듯, 프로이트부터 그랬다.

‘인칭’이라는 번역어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초기에 정신분석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시절로 거슬러 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인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건 학적 게으름 혹은 불성실 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덧. 물론, 근거 있는 반론은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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