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구체성의 사고로

1. 소칼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과학사를 공부하는 한 선배가 영어 논문 하나를 내밀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제목은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neutics of Quantum Gravity)〉. 대충 훑어보니, 흔한 사이비 논문이었다. 제대로 이해도 못한 상태로 과학과 철학의 담론들을 묽게 희석해서 만든 “아메리칸 스타일”의 논문. “별로 재미없는 글”이라는 것이 내 소견이었다. 나중에 선배는 그 논문의 필자가 “요즘” 유행을 타고 있는 앨런 소칼(Alan Sokal)이라고 덧붙였다. 그 소칼이 여전히 “다시” 유행이다. 더불어 소칼이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다시 회자되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논의는 항상 변죽만 울리곤 했다. 풍문 속의 개념. 아무도 그 개념 규정에 합의한 적 없고 합의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그 괴이한 개념은 어떤 불사의 힘으로 계속 다시 부활하는가? 거의 30년 전에 김진석은 〈에피모더니즘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 개념을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 이야기한 바 있는데(《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문학과지성사 참조)! 그로테스크한 한국의 “포스트모던”이여. 30여 년의 논의가 맴맴 제자리 돌기였구나. 그러다가 어지럼증에 오바이트가 쏠린 것일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그건 힘든 일이다. 논쟁에 휩쓸리는 건 더 안 좋다. 논쟁은 대개 변증법적으로 타락하고 마니까. 차라리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로지르는 몇 가지 상이한 사상의 흐름들을 뽑아내는 편이 나은 듯싶다. 가령 프랑스 제(製) 사상과 아메리칸 스타일 사상은 지독히도 뒤섞여 꼬인 채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로질러 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면서 이 두 사상을 잘 가려내기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일의 위험은 감내할 만하게 되는 것 같다.

2. 아메리칸 스타일 사상

어떤 논쟁이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그 논쟁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가령 물리학자 소칼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진영을 공격하고자 한다. 이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과학 개념을 비과학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 이들 “포스트모더니스트”에는 주로 프랑스어권 사상가인 데리다, 라캉, 크리스테바, 보드리야르, 들뢰즈 등이 속한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인데, 이들은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무관심했거나 무관했던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만든 자는 바로 소칼 자신이었다.

소칼은 어디서 이런 나쁜 분류법을 배웠던 것일까? 물리학자로서의 소칼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의 인문학적 소양은 아마추어 수준이다.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받아들인 방식만 봐도 그 점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소칼은 풍문으로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마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인 것처럼 마구 얘기하고 있다. 소칼은 과학적 개념을 비과학적으로 사용했다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난했지만, 소칼 자신은 왜 인문학적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아가 소칼은 인문학은 “엄밀성”과 무관하며 그래서 과학과 반대되거나 잘 해봤자 과학의 성취에 도달할 수 없다는 편견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 같다. 소칼 식대로 대응하자면, 소칼의 아마추어적인 언급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아량을 갖고 침착하게 검토해 보자. 사실, 인문학에 대한 소칼의 “무시”는 “무지”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황당한 분류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자신이 비난하는 바로 그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무시/무지는 소칼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뭘 알겠는가? 문제는 소칼에게 그런 나쁜 분류법을 받아들이도록 한 미국의 인문학자에게 있다. 특히 정치 사회적 야망을 가진 미국 인문학자들. 따라서 중요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 바로 이 미국 인문학자들의 행태이다. 이들은 과학과 철학을 뒤섞었으며, 차라리 모든 것을 뒤섞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도 바로 이들 미국 학자들이다.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처음 등장한 그 개념을 문학 비평가들이 대중화시켰던 것. 물론 프랑스 철학자 료타르가 “포스트모던 조건”이라는 저서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형용사!)을 소개하기도 했다. 료타르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의 조건을 검토하기 위해, 마치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했던 것과 같은 작업을 하기 위해, 그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료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술회한 것을 보면, 료타르의 “포스트모던”이란 개념은 김진석이 말하는 “에피모던”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즉 시간과 역사를 굵은 직선이 아닌 겹의 선을 통해 파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 많이 오해되고 오용된.

“포스트모더니즘”이 “커다란 이야기”의 죽음을 말했다고 큰 소리로 얘기되곤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만큼 커다란 이야기가 있을까? 하지만 미국 학자들의 방식은 그랬다. 이들의 행태는 처음부터 이율배반이었다. 이들이 옹호하는 “작은 이야기”는 너무 “커다란 이야기”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이 모든 것을 탈(脫)정치화하는 데 커다란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다. 정치와 경제의 소멸 또는 약화. 예술과 문화의 득세와 강화.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충분한 월급 등 많은 안전 장치 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의 창조적 역량의 부족을 감추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포스트모던”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처음부터 실체가 불분명한 사고였던 것.

유감스럽게도 꽤 오랫동안 한국의 선진적인 학자들은 이들에 부화뇌동해서 이 개념을 무분별하게 수입했다. 이것은 우리에겐 커다란 화였다. 이 실체 없는 개념을 가지고 논쟁을 하려 했으니, 논쟁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개념 정립을 위한 논쟁마저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만은 봄 가뭄의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말이 유래한 기원의 망각과 함께, 이 말은 새로운 우상으로 신비화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오래 전에 제기되었기에, 비판은 이만 접어두련다.

3. 프랑스 제 사상

한편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그것에 섞여 들어온 프랑스 현대 철학의 흐름들은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그것과 구별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르트르 이후의 현대 철학이 거의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이름으로 소개된 일군의 사상가들은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구조주의”나 “탈구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더라도 각자의 이름으로 충분히 설 수 있는 사상가들. 즉 푸코, 들뢰즈, 바르트, 라캉, 데리다, 료타르, 보드리야르 등.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통찰을 주는 현대 프랑스 사상은 베르그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베르그손의 전통이라 함은 과학과 철학을 균등하게 다루는 학문 자세를 말한다. 이 전통은 프랑스 철학 특유의 강점으로 꼽힐 수 있다. 특히 들뢰즈의 철학은 베르그손의 전통에 가장 충실하다. 들뢰즈의 저술에 언급되는 과학 개념들은 대개는 과학자들 자신의 것이고, 인용과 각주의 형태로 그 원천이 공개된다. 그는 과학 개념을 비유적으로 쓰지 않았고, 철학적으로 재해석하려 노력했다. 따라서 만일 소칼이 들뢰즈를 공격한다면, 이는 들뢰즈의 저술을 전체적으로 섭렵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소칼은 부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부당한 비판에 우리가 또다시 부화뇌동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프랑스 철학자들을 전부 긍정하거나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지닌 채 이들 철학자들의 어떤 측면을 이용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들은 우리에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프랑스 현대 철학은 “긍정 신학”과 “부정 신학”이라는 오래된 철학사적 전통에 위치해 있다. 현대 초기에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이 두 입장은, 최근에는 푸코와 들뢰즈가 전자에 라캉과 데리다가 후자에 속하는 형국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들에게 강한 영감을 준 니체와 프로이트가 현대 철학의 대부로서 그 두 입장을 각각 대표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현대 철학은 점점 더 “긍정 신학”의 길을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고 앞으로도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모든 것을 내재면(plan d’immanence)에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과학의 작업을 적극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이 긍정되어야 하는 까닭은 오직 그것이다.

4.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막연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하는 사람은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이들 프랑스 철학자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영어나 한글 번역을 조금 읽거나 개론서만 읽은 경우가 대부분인 듯싶다. 그 과정에서의 무수한 오역과 오해들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텍스트를 읽어 가는 느린 속도와 현실을 분석하는 빠른 속도가 결합될 때 더 이상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구체성의 사고”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내재성의 사고는 구체성의 사고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체성의 사고를 우리가 많이 혼동했다면 그건 구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 구체성이란 늪과도 같아서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기 십상이다. 니체 이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은 그 구체성의 늪과 대결하면서 그 표면의 깊이 위에서 당당히 살아가려는 시도와 모색의 흔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속에서 목소리를 냈던 여러 주제들, 다시 말해 미적 해방, 성과 몸의 해방, 문화 정치, 담론의 전략 등은 구체성과 내재면으로 옮겨질 때에만 처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열정은 자기 자신밖에는 증명하지 못한다. 열정에 반드시 기계가 따라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열정을 현실화하는 기계. 그러기 위해 현실의 배치체(agencement)들을 냉철히 파악해야 할 것이고, 거듭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바, 책과 더불어 사색을, 예리한 사색을!

  • 2000년대 초반에 작성한 글로 기억합니다
  • 최종 수정 2018.02.

관련 글: 현대 철학의 지도 그리기 (20세기 중후반을 중심으로)

Comments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