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지도 그리기 (20세기 중후반을 중심으로)

1. 출발점으로서의 마르크스와 니체

현대 철학이라 하면 아무래도 마르크스와 니체 이후의 철학적 활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나는 아무래도 철학사가일 수는 없고 현대 철학 활동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객관적 입장에 서기보다는 나 자신의 철학적 시각에서 서술하게 된다. 실은 애써 객관+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거나 다수가 합의하는 내용만을 말하려는 것조차 하나의 특정한 견해일 수밖에 없으며, 이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현대 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철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인식되어 왔고, 진실은 확고부동한 시작점에서 출발해야 도달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여겨졌다. 진실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관점을 넘어서 있는, 그 누구나 객관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니체 이후 철학과 진실에 대한 그런 관점은 철저하게 파기되었다.

마르크스와 니체는 각각 물질적 현실과 욕망(‘생산력과 생산관계’ /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의 차원에서 무의식을 발견했다. 여기서 ‘무의식’(das Unbewußte)은 심리적 차원인 의식을 넘어서 있으면서 의식을 구성하는 초월론적(transcendental) 요소를 가리킨다. 인간은 누구나 이 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차라리 무의식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탐구하는 활동인 철학도 무의식에 의해 좌우된다. 이제 진실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다시금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니체는 현대 철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베버,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베르그손, 러셀,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등 20세기 초반의 여러 학자들 중 누군가를 현대 철학의 시원(始原)에 놓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한 사람이 빠진 듯하기 때문이다. 바로 폴 리쾨르가 ‘의심의 세 대가’ 중 한 사람으로 불렀던 프로이트. 라캉을 비롯해 료타르, 마르쿠제, 데리다, 지젝 등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그러고 보면 의식 너머에 있는 무의식을 발견한 장본인은 바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이라고 하지 않는가? 리쾨르가 ‘의심의 세 대가’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묶은 것도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이들은 최종 근거로서의 신을 폐기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야 니체를 통해 유명해졌지만, ‘신의 죽음’은 니체만의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신’은 종교의 신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최종 근거’를 가리킨다. 가령 데카르트를 보면 ‘나는 생각한다(cogito)’가 인식과 존재의 최종 근거로 확실성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세 대가는 바로 이 확실성 밑에 불확실성이 있으며 인식 주체 자신이 실은 인식되어야 할 미지의 그 무엇이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니체를 프로이트와 하나의 집합으로 묶기에는 동질적인 요소보다는 이질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차라리 시대와 상관없이 현대성 자체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프로이트 대신 스피노자와 베르그손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르크스와 니체를 현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놓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푸코 및 들뢰즈·과타리가 잘 지적한 것처럼 프로이트에게 부족한 것은 현실이다. 모든 현실은 힘 관계에 의해 상호작용을 한다. 심리적 현실은 다른 현실들(가령 물질적, 사회적 현실 등)의 복합적 산물이며 다른 것을 뛰어넘는 탁월한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프로이트는 심리적 현실을 다른 현실들과 독립시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회로 속에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복합적 힘 관계의 결과에 불과한 것을 모든 생산을 관장하는 원인으로 전도시킨 것이다. 애석하게도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생산력을 심리적인 영역에 가둬놓은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니체에게 무의식(das Unbewußte)은 의식(Bewußtsein)을 넘어서 있는 모든 현실을 가리켰다. 이들에게서 무의식의 개념이 똑같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물질과 사회 현실에 대한 강조는 그 누구에게서보다 두드러진다. 특히 니체에게서 이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독자의 탓이지 니체의 탓은 아니다(니체의 탁월한 해석가인 푸코나 들뢰즈의 작업 참조).

 

2. 실천을 둘러싼 모험

현대 철학은 실천을 둘러싼 과감한 모험을 감행했다. 실천이라는 주제는 20세기를 거치면서 깊은 부침을 겪었다. 20세기는 혁명, 전쟁, 파시즘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어떻게 세상을 좋게 바꿀 것인가? 어떻게 세상이 나쁘게 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 등의 물음이 생겨난 것은 필연이었다. 이 물음은 독일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등)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실존주의(사르트르,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등)에 의해 탐구되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이 결합되어 탄생한 프랑스 실존주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모토와 더불어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다. 즉 인간의 본질은 태어날 때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현실에 던지는 실천에 의해 사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르트르는 그 철학적 이념을 대표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볼 때 이 입장에는, 그렇게 자신을 던질 수 있는 능력(‘자유 의지’)이 실천하는 주체에게 있는지 여부가 문제로 남아 있었다.

한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의 이성이 그 내부에 비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전언을 던졌다. 이성은 자신을 형성하고 단련하기 위해 특정한 목적에 맞게 자신을 길들였다(‘도구적 이성’). 그 결과 인간의 다양한 욕망뿐 아니라 이성 자신과 사회조차 왜곡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전반기 세계를 풍미한 광기는 이성의 오류가 아니라 이성 자신의 광기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 때문에 이들은 이성적 실천보다는 미적 실천을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삼게 되어 현실적 공허함에 직면하고 말았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독일의 철학이 사회사 연구로 방향을 돌린 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지적 흐름이 개진되었다. 푸코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풍미했던 형식주의의 흐름은 특히 예술에서 두드러졌는데, 이는 철학적 차원에서 60년대의 구조주의로 표현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인류학+언어학), 라캉(정신분석+기호학), 알튀세르(마르크스주의+과학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 주체관을 과감히 포기했으며 주체를 다양한 형식들의 효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실천이라는 고민스런 문제는 다시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에는 베르그손-바슐라르-캉길렘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과학철학 전통에 속한 연구자들이 있었다. 특히 푸코와 들뢰즈는 이 선상에서 니체를 만났다. 기본적으로 인식론의 연장에 놓여 있는 과학철학은, 니체를 거치며 이성 내의 비이성/광기라는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성 자신이 일종의 광기라면 이성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이성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68년 혁명의 좌절을 겪으면서 푸코와 들뢰즈는 이 문제에 더 깊이 천착하게 된다.

푸코는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의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꼼꼼히 탐구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또한 고전주의 시기 이후에, 감옥, 병원, 군대, 학교 등에서 인간을 어떻게 훈육시키며 주체로 만들었는지를 연구하던 푸코는 뜻밖의 병으로 작업을 중단하게 된다. 푸코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사회 속에서 정치적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던 고대의 자기 훈육에 주목하며, 그것이 고전주의 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힌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주체를 형성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만다.

들뢰즈·과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등의 저술을 통해 마르크스와 니체를 종합하려는 방대한 시도를 한다. 푸코의 것과 상보적인 이들의 작업은, 욕망적 생산이 사회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밝히면서 현실의 생산과 생성을 윤리적+정치적+미적 과제로 만든다. 특히 파시즘의 상황, 즉 인간이 자신의 예속을 욕망하게 되는 오늘날의 역설적 상황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저술을 ‘비파시스트적 삶에 대한 입문서’로 활용하기를 기대한다. 욕망의 미시정치를 개체군(population)의 문제로 설정한 이들의 작업은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에게 종종 비판을 받는다. 왜냐하면 개체군의 변이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들뢰즈·과타리는 21세기로 넘겨진 가장 강력한 사유의 무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밖에도 주목을 받는 철학적 흐름이 둘 더 있는데 현상학과 언어철학이 그것이다. 후설이 창시한 현상학은 하이데거, 가다머, 레비나스, 실존주의, 료타르, 데리다 등의 작업과 연결되면서 족적을 남겼다. 또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프레게와 러셀의 형식 언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그리고 미국의 언어 분석철학은 형식주의의 영향 속에서 전개되었으나 철학과 현실의 괴리를 심화시키기도 했다.

 

3. 서로를 자극하는 예술과 철학

짧은 지면에 수십 명의 사상가와 수백 권의 책을 요약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시도이다. 따라서 나는 가볍게 몇 대목만 스케치했으며, 이마저도 독자에게는 읽기 쉽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요약하자면 나는 19세기의 마르크스와 니체, 20세기의 푸코와 들뢰즈·과타리를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에 비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많은 사상가를 이름만 언급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생략했다. 간단히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철학의 역사는 문제의 역사이다. 오늘날 어떤 철학이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현재의 문제와 관련해 뭔가 자극제가 되고 해결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그것이 현재의 문제와 가장 많은 조건과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각자의 처지에 따라, 문제 상황도 바뀌고 생각을 각자 스스로 해야만 한다.

따라서 단순히 호사가의 취미에서가 아니라면 현대 철학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 더 풍부한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철학자의 경우만 들더라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칸트 등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나아가 문학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 음악, 건축, 연극, 영화 등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많은 재료들이 있다. 작품은 생각을 자극하고 생각은 작품을 촉발한다. 이것이 철학과 예술의 바람직한 관계일 것이다.

예술가의 작업이 그렇듯이 생각 또한 앞선 결과물을 다만 참고하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모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충분히 녹여내어 자신의 스타일을 새겨야만 비로소 서명(sign)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들뢰즈의 책 중에 《차이와 반복》이 있다. 이 책은 말한다. 모든 차이는 반복에서 시작되지만 진정한 반복은 차이로부터 온다고. 무엇보다 예술 작품이 그 산 증인일 것이다.

 

  • 2000년대 초반에 작성한 글로 기억합니다.
  • 최종 수정 2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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