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다른 인문사회과학 분과도 포함해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습관적 사고’다. 습관적 사고가 뭘까?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기왕의 ‘틀’을 마구 적용하는 사고다. 끼워맞추기, 혹은 생각에서의 프로크루스테스.
그러나 이론이란 결국 틀을 찾아내고/만들고 그걸 적용하는 일 아니냐는 반문이 제기된다. 맞다, 보편성을 갖지 못하면 이론으로선 실패다. 하지만 보편성을 얻는다는 핑계로 ‘구체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이론이 일종의 ‘습관’처럼 굳어지는 건 수많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입증될 때다. 굳이 포퍼의 ‘반증 가능’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더 많은 사례에 적용되는 이론은 더 힘이 있고, 이론에 맞지 않는 사례가 많아지면 이론은 힘이 빠진다.
습관적 사고는 사례에 맞지 않는데도 계속 고수하려는 고집 센 사고다. 사례에 맞지 않으면 생각을 바꿔야지 사례를 왜곡하려 해선 안 된다.
한 예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조를 하나 짚어보려 한다. ‘신유물론(new materialism, 용어 번역에는 신경쓰지 말기로 하자)’, ‘행위자 관계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 등의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안다. 깊게 살피진 않아서 잘 모른다. 헌데 깊게 살피지 않은 이유가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더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알지도 못한다면서 들뢰즈가 더 깊단 말은 어떻게 하지? 들뢰즈가 왜 더 깊은데? 질문이 쏟아질 수 있다. 다른 이유가 이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이들 사조가 말을 꺼낼 때 꼭 나오는 표현이 있다. ‘몸(신체)과 마음(정신)을 분리하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이원론’ 운운이 그거다. 나는 이 관용구가 습관적 사고의 본보기라고 본다.
반례는 스피노자다. 데카르트(1596-1650)와 스피노자(1632-1677)는 다른 시기를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전혀 다른 철학을 개진한다. 무려 실체 일원론. 그렇다면 앞의 관용구는 다르게 진술되어야 옳다. ‘몸(신체)과 마음(정신)을 분리하는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를 제외한) 근대의 이원론’ 운운. 그러나 이도 옳지 않다. 또 다른 형태의 반론이 라이프니츠(1646-1716)한테서 나왔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무려 정신 일원론(‘모나드’론)을 말했다. 그렇다면 저 관용구는 이제 ‘몸(신체)과 마음(정신)을 분리하는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제외한) 근대의 이원론’ 운운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게 끝일까?
우선 나는 데카르트가 근대를 과잉 대표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데카르트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컸고(하지만 그 영향력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철학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 있다), 그와 갈릴레오의 역학을 종합한 뉴턴이 근대를 대표한다는 건 맞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이원론’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의 이원론’은 저 사조를 따르는 이들조차 부인할 수 없는 엄정한 경험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남의 마음을 들여다 본 사람은 우주 역사 이래 한 명도 없고, 내 몸은 항상 다른 몸/물체하고만 충돌한다. 내가 돌멩이와 나무와 숲과 늑대와 바다를 ‘알고 이해하려’ 해도 나는 ‘일방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응답을 해석하는 것도 나다. 나는 사물과 대화하지 못하며, 공존을 도모하려는 시도도 나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나는 오로지 인간과만 대화할 수 있다(물론 어렵다).
나는 이 명백한 사실을 놓고서도 데카르트의 이원론 운운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저 사조를 잘 알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좀 공부하긴 할 거다).
그럼 들뢰즈는 어떠냐? 그는 스피노자를 따른다. 물론 그에 앞서 스토아학파도 따르고 그 후의 베르그손도 따른다. 요점은, 몸과 마음,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철저하게 유지하되, 실체 일원론을 통해 그 간극을 해소한다. 몸과 마음 간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그 둘은 “같은 순서와 연결”(스피노자, <윤리학> 2부 명제7)을 갖는다. 나는 이것을 재봉틀 혹은 지퍼에 비유하곤 한다. 재봉틀 바늘이 천에 실을 박으면, 그 시간의 순서를 따라, 그와 동시에, 천의 앞면과 뒷면에 같은 무늬가 생겨난다. 지퍼를 열거나 잠그면 그와 동시에 앞면과 뒷면에 같은 운동이 펼쳐진다. 몸과 마음은 실제로 구별되지만, 자연이라는 하나의 실체의 두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게 스피노자의, 그리고 들뢰즈의 해법이다.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을 각각 실체로 여긴 데 반해, 스피노자는 그걸 속성(각각 펼쳐짐extensio과 생각cogitatio)으로 여겼다는 차이를 얘기하기 시작하면, 독자는더 이상 안 읽겠지…)
과타리와 만나면서 들뢰즈는 ‘배치체(agencement, assemblage)’ 이론을 착상한다. 모든 배치체는 두 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물체의 기계적 배치체(machinc assemblage of bodies)’요 다른 하나는 ‘언표작용의 집단 배치체(collective assemblage of enunciation)’다. 덴마크 언어학자 옐름슬레우를 발전시킨 이 구분, 즉 ‘내용 평면’과 ‘표현 평면’의 구분, 그리하여 푸코의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간의 구분은 모두, 결국, 스피노자의 이원론(속성 이원론)에서 온 것이다. 내가 평가하기에, 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한 적절한 해법이다.
습관적 사고를 비판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라는 관용구를 꺼내기 전에 잠깐 멈추고 묻자. 몸과 마음은 어떤 관계일까? ‘이원론’, 말하자면 서로 본성 혹은 본질이 다른 별개의 것인가? 이에 대한 해법은 한 실체의 두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위에서 설명했다. ‘일원론’, 즉 하나의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서로 달라 보이는 무수한 측면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드는 습관적 사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음에 귀 기울이고, 구체적 사례를 존중하라.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2023.02. 최종 수정)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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